어느덧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이 지났다. 일본에서 지냈던 지난 10년보다 더욱 다이내믹한 시간이었다. 집 계약에서부터 결혼식, 사업준비, 집안 대소사까지 지난 12달 안에 모든 걸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면서 이곳이 한국인지 일본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간판에 보이는 글자가 한글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큰 차이가 없다. 사람들의 모습도 엇비슷하고.
길거리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처음에는 일본어처럼 들렸다. 그러다 음성이 점점 선명해지면서 비로소 한국말임을 알아차렸다. 한자어 명사(名詞) 발음이 비슷한 데서 오는 착각일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이런 기분이 들까.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일본어로 말할 기회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당장 티브이만 틀어도 한국어가 들려온다. 전화통화도 한국어, 미팅도 한국어. 일 때문에 일본 사이트를 둘러볼 때를 제외한다면 하루의 90%가 한국어로 가득 찬다. 일본에 살 때와 정반대다.
내심 걱정이 됐다. 이러다가 어렵게 다져둔 일본어 그릇이 깨져버리면 어떡하지? 나보다 앞서 한국에 돌아온 선배들을 보면 한국생활이 길어질수록 일본어 실력이 이전보다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일본원서를 일부러 소리 내서 읽기도 한다.
다행히도 아직 걱정만큼 일본어가 죽지 않은 것 같다. 3달에 한 번꼴로 일본 지인들을 이곳에서 만났다. 한국어를 못하기에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일본어 회로로 전환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금세 도쿄에 있을 때처럼 말문이 트였다. 오랜 기간 다져온 그릇이라 쉽게 깨지지 않나 보다.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
어느덧 일본어와 함께한 지 20년이 되었다. 사춘기 시절, 집안 책꽂이에 꽂혀 있던 빛바랜 일본어 회화책이 내 인생의 주춧돌이 될 줄 어찌 알았을까. 만약 학교 복도에 붙어 있던 일본 홈스테이 모집 공고를 그냥 지나쳤다면 일본어 선생님이라는 꿈을 갖게 되었을까.
거기서 이어져 대학, 취업, 일본행,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일본어라는 언어를 만났기에 써내려 올 수 있는 역사였다. 이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어를,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도구를 습득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번 브런치북을 처음 기획할 때 ‘일본어 공부법’에 초첨을 맞추려고 했다. 히라가나, 카타카나 암기에서부터 고교 일본어, 대학 교양일본어, JLPT 자격증 시험, 드라마 일본어, 원서 읽기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경험해 온 모든 공부법을 각 에피소드에 녹이고자 애썼다.
하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공부법보다 일본어를 만나면서 생기게 된 인생의 변화를 전달하는 것이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재나 공부법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나보다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여전히 네이티브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대신 누구보다 탄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아무리 일본어 단어를 많이 알아도, 말을 잘해도 스토리가 없다면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은 일본어와 더불어 영어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영어는 일본 해외영업직군 취업 때 공부했던 토익 이후로는 손을 놓고 지냈었다. 도구(점수)로만 접근했었다. 그러다 일본생활 마무리 전 떠났던 2달여간의 동남아여행에서 영어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했다. 곳곳에 일본 브랜드가 깊숙이 침투해 있었지만 현지어와 함께 영어가 커뮤니케이션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영어를 활용할 수 있다면 동남아를 넘어 더 넓은 세상을 무대로 새로운 스토리를 써 내려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매일 지하철 출퇴근 시간에 프린트해 둔 영어 스크립트를 훑어본다. 버스에서 일본 드라마 스크립트를 공부하던 때가 떠오른다. 모르는 단어나 문형은 체크해 두고 해석한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챗GPT의 등장이다. 문장을 프롬프트에 넣어 분석해 달라고 하면 문장을 쪼개주고 주요 문법도 알려주고 유사표현도 알려준다. 개인 과외선생님이 생긴 것이다. 어렵게 독학할 필요가 없다.
일본어는 실력이 수직상승하는 게 바로 와닿는 언어다. 하지만 영어는 108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가는 느낌이다. 이전보다 는 것 같은데 돌아보면 아직 몇 칸 안 올라왔다. 올라가야 할 계단이 아직도 까마득하다. 하지만 그 벽을 넘어서면 더 넓은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10년, 20년이 걸려도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일본어를 만났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