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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Jul 05. 2022

퇴사는 모든 여정의 끝이자 시작이다.

성장의 한계와 성장의 가능성 사이에는 퇴사가 있다.

이렇게 빨리 올거라고 예상 못했던, 마지막 출근날 아침이 밝았다. 여느때처럼 셔츠 차림에 검은색 가방을 등에 메고 8시 출발 전철에 몸을 실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부터 회사가 있는 유락쵸(有楽町)까지는 한시간. 걷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1시간 20분정도는 소요된다. 우리나라 2호선 같은 초록색 띠를 두른, JR 야마노테선(山手線)을 타고 출근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전철 창밖으로 지난 18개월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짧고도 길었던 시간들. 내 목표를 이루기도, 이루지 못하기도 했던 시간들. 그러나 다시금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작별을 직감하다.


계속 되는 매출에 대한 압박과 보고 준비, 손(숫자)으로만 하는 성장놀이에 지쳐가고 있었다. 만일 내가 호전(好戦)적인 사람이었다면 누가 뭐라고 하건 안 되는 건 안되는 것이고 이런 것 저런 것 해야한다고 강하게 밀어 붙이기라도 했겠지. 


그러나 나는 그게 잘 안되는 사람이다.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어가며 강한척 코스프레 하고 싶지도 않고. 세상에 모든 사람이 나와 인연이 아니듯 이곳도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회사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2022년 새해가 밝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초. 그날도 스즈키와의 보고 미팅이 잡혀 있었다. 매출 달성에 필요한 상품 추가 발주수량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온라인팀 기준으로 발주 수량을 잡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회사 전체를 기준으로 잡기를 희망했다. 그러면서 은연 중에 나의 수량 산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혹시 스즈키상이 사용하는 계산 시트가 따로 있나요?"

"회의 끝나고 찾아서 보내줄게요."


그랬다. 그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답이 있었고 방법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떠한 힌트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사실 이 미팅이 있기 전에도 수차례 질문과 답변을 반복했고 미팅도 수 없이 했다. 그럼에도 한 달 이상 답이 안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내 입에서 '시트'라는 말이 나올 때 까지 그는 절대로 그 시트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 한 거겠지...)


이내 기운이 빠져버렸다.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낙담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기에 그가 준 시트를 기준으로 다시 자료를 정리해서 보냈다. 얼마 뒤 사내 승인이 났고 그는 최종 발주를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만의 (새로운) 식으로 바뀌어 버린, 전혀 다른 결과물이 있었다.


다시 찾아 온 기회


사실 지난 연말부터 일본 생활 정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2013년도 처음 왔을 때의 그 끓어 오르던 감정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는 나의 나라 대한민국, 그에 비해 어제도 오늘도 변함 없이 조용한 나라 일본. 일본을 닮은 듯 성장성을 잃어 가는 나의 사회생활(과 연봉...).


이런 고민들 속에 살아가는 동안 종종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4번째 회사의 사장님이었다. 그곳에 있을 때는 그렇게 싸웠던 분이었지만 지금까지 만나 본 경영자 중 가장 존경 하는 분이기도 했다.


"형민씨. 한국 가기 전에 한번 만나요."


회사 퇴근 후 늦은 저녁 신주쿠(新宿)에 있는 전 직장 사무실에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하며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독립을 고민하고 있다는 말도 함께. 


"회사 정리되면 우리 일 좀 도와 줄 수 있어요?"


이곳도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인력 부족 문제도 있고 매출이 잘 나오지 않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외부 컨설팅 업체에 의뢰를 했었으나 그마저도 큰 효과가 없었다고. 그래서 나에게 요청을 해 온 것이었다. 매출을 만들어 본 경험도 있고 회사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기에.


"물론이죠!"


이후 이곳에 어떠한 것들을 도움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운영 중인 쇼핑몰 사이트들을 하나, 둘 살펴보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정리하였고 얼마 뒤에 제안 PT를 진행하였다. 


생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들이 많았다. 제안서에는 이러한 내용들을 카테고리별로 사례와 함께 정리하였고 사장님, 그리고 회사의 쇼핑몰팀 팀장님도 만족해 하는 분위기였다. 


"형민씨. 한 번 해봅시다."


이렇게 나는 회사의 직원이 아닌 인간 김형민으로 첫 번째 고객을 맞이 하게 되었다. 


6번째 회사와의 작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후로도 스즈키와는 미팅 할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작은 불똥들이 튀기는 했지만 큰 마찰은 없었다. 그러던 1월 중순 어느날. 나는 이윽고 준비한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3월 31일부로 퇴사하고 싶습니다."


회사규정에 퇴사 희망일로부터 2개월 전에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 있었고 그를 충실히 따랐다. 사실, 소리 소문 없이 퇴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었는데 나마저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즈키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동안 나에게 차갑게 대하던 그는, 태도를 180도 바꾸어 친절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마지막은 아름답게 마무리 짓고 싶어서 그랬던 것일까? 


얼마 후 회사와 최종적으로 퇴사일을 확정 지었고 본격적으로 업무 인수인계 절차에 들어갔다. 나를 제외하면 팀에 남은 사람은 두 사람. 그 중 (회사에서 지목한) 한 친구에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를 전달했다. 이전 직장에서 그랬던 것 처럼 최대한 상세하게. 재택근무였기 때문에 하루에 한시간 정도 화면 공유를 해가며 보고자료 작성법에서부터 매출관리, 키워드 서칭, 광고 관리 방법 등을 공유했다. 아마 이 기간동안 쓴 일본어가 지금까지 살면서 써 왔던 일본어 보다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퇴사 당일 업무를 끝내고 팀 동료와, 이보다 먼저 퇴사 했던 동료가 일하는 식당으로 찾아갔다. 카레집을 열고 싶다던 그는 경험을 쌓기 위해 카레 식당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서 있는 것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즐겁다고. 그의 얼굴에는 회사 다닐 때 볼 수 없었던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막차 시간 전까지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그렇게 집으로 돌아 왔다. 이렇게 6번째 회사 생활이 마무리 되었다. 일본생활의 마지막 갈증이었던 일본 회사에서 일 하는 것은 달성했지만 중간임원까지 승진 하겠다던 계획은 실패했다. 하지만 후회도 미련도 없는 시간들이었다.


이제는 나의 첫 번째 고객을 위해 지난 6번의 회사생활 때 이상으로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발전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자 퇴사 없는 영원한 고용의 시작일테니까.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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