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트 클럽
최적화의 함정을 경고하는 송길영 작가님의 말씀은 마치 바늘처럼 나를 찌른다.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듯, 내 안에 자리한 페르소나는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강하고 자기계발적인 루틴을 추구하며 이른바 'that girl'이 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는가 하면 WWE의 언더테이커를 찬양하며 거친 감성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두 페르소나는 서로 크게 충돌하지는 않았지만 삶이라는 영화의 감독이 되기를 열망하며 프레임 속 중심을 음밀하게 차지하려 했다.
매일 피로감에 절여진 채 회사로 향하는 이름 없는 우리의 주인공은 역설적이게도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련된 가구와 안락한 집, 그리고 몇 달러로 감정마저 살 수 있는 세상 속에서도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손에 쥔 것이 많을수록 정작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듯한 삶처럼 보인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반항과 자유로 가득 찬 비누 판매원 타일러는 겉모습부터 주인공과 결이 전혀 맞지 않아 보인다. 다소 퉁명스러우면서도 젠틀한 태도로 명함을 건넨 타일러와의 짧은 만남은 불에 타버린 집 앞에서 다시 이어졌다. 스낵바에서 담소를 나누는 타일러의 말투는 다소 거만해 보이지만 그의 메시지는 우리가 맹목적으로 숭배해 온 소비 사회의 허상과 본질을 집어내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삶의 의미를 소유와 물질로 치환해 버리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연민과 냉소가 느껴진다.
스낵바를 나온 주인공에게 타일러는 자신을 한 대 때려달라는 요구를 부탁한다. 황당한 요구에 당황하던 주인공은 끝내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곧 타일러의 반격이 이어지며 둘은 본능적인 싸움을 시작한다. 처음엔 무의미해 보였던 이 싸움은 주인공에게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을 해방시키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해 준다. 그날 밤, 그는 자신들의 싸움이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억압과 위선에 저항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조금씩 깨닫는다. 그렇게 뒷골목의 한 창고에서 '파이트클럽'이라는 이름 아래, 세상의 규칙과 질서를 거부하는 비밀스러운 싸움의 장이 열리게 된다.
파이트클럽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의 장에서 현대 사회의 억압된 규범과 체계에 저항하는 비밀 조직으로 진화했다. 조직의 영향력은 빠르게 확장되었고, 타일러는 사람들을 선동하며 물질적 가치와 기존 사회 규범을 거침없이 조롱한다. 그의 선동 아래 조직의 폭력은 도시 전체를 무질서와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점차 타일러와 자신 사이의 괴리감에 고통받기 시작했고, 타일러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진실을 파헤치던 그는 마침내, 타일러가 곧 자신이라는 충격적인 깨달음과 마주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그는 자신의 행동이 만들어낸 혼란과 파괴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타일러의 계획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주요 건물들을 폭파시키는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는 시작되었고, 주인공은 이를 막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혼란의 끝에서 그는 타일러라는 자신이 그토록 바랬던 자아와 결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총으로 쏘아버리며 타일러를 제거한다.
창밖으로 폭발이 이어지고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게 된 마를라와 손을 맞잡은 채 혼돈과 파괴 속에서도 묘한 평온을 느끼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영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힌트를 준다. 피해보지 않는 최적화된 삶의 길을 찬양하며 소유하지 못한 지난 과거를 원망하는 나에게 그의 주먹은 묵직한 충격을 남긴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광란의 AI 세상에서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나의 가치는 끊임없이 평가받는다. 성공을 향한 야망과 매일 갱신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함을 기반한 자기계발적 삶은 과연 내가 원하던 삶이었을까?
소유와 집착으로 가득 찬 나의 세계에서 진정 '나'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타일러의 말처럼 내가 소유한 것들이 사실 나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현실에 가려져 있던 질문을 우리의 얼굴에 내던진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를 위해 스스로 질문해야 할 차례이다.
그래서 난 뭐가 되고 싶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