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로운 형태의 행위는 없다.
왜냐하면 행위는 결핍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관조하는 삶(한병철)
이렇게 아플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약 한 달 동안 앓아누웠다. 병원에서는 지금 이 나이에 이렇게 큰 대상포진이 발생하기 쉽지는 않다고 말씀하셨다. 꽤나 억울했다. 나름대로 운동도, 스트레스 관리도 적절하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노력이 나를 배신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24시간이 모자라다고 느끼는 나는 누운 채 방안 하얀 벽만 바라보며 아려오는 통증을 친구 삼아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흰 여백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쉼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쉰다는 것이 무엇일까?
유튜브 시청
빨래와 청소
독서
기타 등등....
사람마다 쉼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내가 벽을 보며 알게 된 것은 쉼은 여백이라는 것이다.
쉬는 시간에 공부를 했다. 책을 읽었다. 유튜브 편집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쉬는 시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움직이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나는 쉬는 시간에조차 생산적인 일을 했다"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벽 앞에 멈춰 선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팔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고, 나에게는 그저 벽만이 친구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이 가진 하얀 여백 속에 내가 있었다.
많은 이들의 쉼은 여전히 움직임 속에 있다. 쉼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가며 성취라는 또 다른 결과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여백은 다르다. 그것은 멈춰 있는 것, 비어 있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여백은 내게 질문했다.
"무엇을 해야만 의미 있는 쉼이 되는 걸까?"
나는 그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벽의 여백을 바라보며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쉼은 비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아주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벽을 가득 채운 하얀 여백처럼, 쉼이란 그렇게 나 자신을 채우지 않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