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연속으로 오후 3시에 기상한 적이 있었다.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애매한, 그렇다고 마무리하기에도 어색한 '3'이라는 숫자의 모양은 불만을 품은 입술을 삐죽 내민 것처럼 보인다. 사람마다 시간에 대한 정의는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숫자이다.
어제는 오후 3시가 다가올 무렵 늘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의 집이라는 둥지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가장 애착을 느끼는 카페에서 이 협소한 공간에 가두어둘 수 없는 내 미래에 대한 흔적들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확신을 품고, 가방에 노트북과 미처 읽지 못한 소설을 서둘러 밀어 넣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배가 조금씩 허기지기 시작했다. 안타깝지만 가고자 하는 카페는 오로지 핸드드립과 음료 위주였다. 그렇다면 잠시만 멈춰서 내가 식사를 하지 못할 이유에 대해 물음표를 달아보자. 카페 시설 내에 음식 반입 금지라는 문구는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샌드위치 하나쯤은 들고 가도 되지 않을까. 여기서 다시 물음표가 떠오른다.
나만 샌드위치를 먹는다면 진정 행복할까?
쨍한 빨간색의 토마토와 연두색 양상추가 섞인채 가지런히 잘린채 절제된 샌드위치를 굳이 나만 봐야할까?
다시 느낌표로 응답한다. 함께 샌드위치를 나누자.
버스장 근처 빵집에서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샌드위치 두 상자를 구입했다. 하나는 두툼한 통밀빵으로 만든 실속형 샌드위치, 다른 하나는 네 조각으로 정갈하게 나뉜 페이스트리 샌드위치. 누군가는 타인의 몫까지 그토록 세심히 챙기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꽤나 성공한 셈이다.
"저는 영문 모를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좋아해요"라고 말한 어느 일본인 미디어 아티스트의 언급에 잠시 감하되었던 적이 있다.
대체되고 싶지 않다면 대체될 수 없는 인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되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꽤나 긴 시간의 여정 끝에 도착한 카페는 예상 밖의 인원수로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늘 한적했던 골목에 자리한 카페였기에 손님이 드물 것이라고 방심했다. 사장님에게만 샌드위치를 건네는 건 너무 소심한 용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샌드위치 봉투만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동그란 풍선 같은 머리는 총 4개였다. 문득 내가 구매한 페이스트리 샌드위치의 나눔도 총 4조각이었다. 신중하게 샌드위치를 고르던 과거의 나에게 묵묵한 감사를 전하며 사장님께 다가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우리 모두가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으면 좋겠다는 부끄러운 말이었다. 사장님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과 함께 한동안 네모난 샌드위치 상자를 손에서 놓지 못하셨다. 모든 테이블에 샌드위치가 놓일 수 있게 되었다. 타닥거리던 노트북 소리들이 잠시 멈춰버린다. 딱히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계산하지 않았다. 그저 여분의 마음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나에게는 네 가지 다른 모양의 고마움으로 돌아왔다. 샌드위치를 산 시간은 어정쩡한 오후 3시 30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