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림 May 22. 2024

제가 우울과 함께 살았다고요?

예민한 종이 인간의 고군분투기 2


    "상담 예약을 하고 싶은데요, 언제 방문 가능할까요?"


    예약을 마치고 나니, 8가지 정도의 검사지가 문자로 날아왔다. 방문하기 전에 모든 검사지를 제출하고 오라는 내용과 함께. 상담 당일 아침,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상당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첫 번째 문항부터 하나하나 체크하기 시작했다. 모든 문항에 답을 다 해갈 때쯤, 상담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 알 것 같은 묘하고도 부정적인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됐든 정상은 아니라고 하겠구나. 여유롭던 마음이 조금은 무거워졌다.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의사 선생님은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상태나 기분, 과거 등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하고 내 이야기를 분주하게 기록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나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 현재의 상태는 꽤나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어 왔다고도 답했다. 스스로 그 상태를 이겨내기 위한 방법을 많이 찾아서 알고 있고 마치 파도의 밀물과 썰물처럼 내 인생에서 주기적으로 항상 있던 일이라고. 선생님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검사결과 그래프를 하나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래프가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수치와 결괏값으로 존재했지만 선생님은 어떤 것도 단정 지어 말하지 않았다. 단지, 우울감이 있어 왔을 수 있다 정도의 언급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에게 양자택일형 선택지를 주었다. 증상을 완화시키고 싶은지, 치료를 시작해보고 싶은지. 어떤 쪽이어도 괜찮으니 편하게 말해보라고 말이다.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했는가.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 지금 무엇이 맞는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선뜻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판단을 선생님에게 맡겼다. 저녁에 돌아와 받아온 약을 먹을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나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방전상태의 피곤과 무력감이 허약한 신체 때문이 아니라 어떠한 정신적인 우울감에서 오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지금과 같은 방전과 충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원인을 다방면으로 찾고자 했을 뿐인데, '있어 왔을 수도 있는 우울감'에 대한 치료가 그것을 해결해 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단 몇십 초 만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오고 간 후, 나는 가장 강력하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가기로 했다. 난 지금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효과가 있든 없든, 이렇게 나의 인생을 불행하게만 흘려보낼 수는 없으니깐. 그렇게 나는 약을 삼켰다.


    나의 인생이 항상 밀물일 때와 같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썰물일 때의 그 기분과 에너지는 느끼고 싶지 않아라는 마음으로.





이전 01화 이젠 너를 보내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