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책 읽기 ⑭ - 한강, 소년이 온다.
■ 읽게 된 계기
노벨상 발표 약 2개월 전에, 책선물을 주고받던 친구에게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함께 선물 받은 책이다. 친구에게 간단한 설명을 듣고 2페이지 정도 읽어보니 가볍게 읽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밀어두었다가, 수상 소식을 듣고 화들짝 놀라 반성하며 다시 찾아 읽게 되었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칭송하지만 읽지는 않는 책이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고전이나 노벨상 수상작의 작품성이나 가치에 대한 칭송과 추천은 많이 들어봤으나 반대의 경우는 접해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인지, 한강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루어지는 최근의 부정적 견해에 대해서는 생경한 느낌이 있다.
장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작품이 좋으면 단지 ‘잘 만들었다’ 고만 말해야지 누가 만든 작품인가를 확인하지 말라. ... 그가 장인이라는 호칭으로서가 아니라, 작품으로서 장인임을 드러나게 하라."라고 했다. 수상 전에 책을 읽었으면 내 나름대로 작품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을 텐데, 사후에 읽게 되니 이 느낌이 순수한 내 것인지 선입관이 보태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기회를 놓쳐 안타깝고 추천해 준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 감상 및 추천
▶ 우리의 '우리'는 어디까지인가?
수상 발표 초기에 한강 작가의 부친은 기자들을 만나 “노벨 문학상 발표 직후 통화할 때에는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 이야기를 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죽음들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겠느냐면서 기자회견을 안 하겠다고 하더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가족 및 동료 시민의 행동에서 자부심과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집단 책임과 관계가 있다. 둘 다 우리 자신을 어딘가에 소속된 자아로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감정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에밀]에서는 '종적 연민'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끼려면 '동족의식, 동종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왜 한강 작가는 광주시민, 제주도민은 물론이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국민들에게 까지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걸까? 왜 그들에게 까지 동족의식, 소속감을 느끼는 걸까?
한편 최근에 새로이 알게 된 단어들이 있다. '누칼협'은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의 줄임말로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니고 네가 한 선택이니 책임은 네게 있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빠노’는 “내가 알 바 아니다”를 줄인 말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태도를 말한다고 한다. 두 단어 모두 각박한 현실 속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책임, 연민의 여유가 사라진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범위는 참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 같다. 대개는 혈연, 학연, 지연, 종교, 취미 등 다양한 공통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서로 함께 '우리'가 되기도 하고 '남'이 되기도 한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형제님, 자매님'과 같이 혈연관계의 호칭으로 불리는 반열에까지 올라가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은 단지 '이교도'일뿐이다. '우리'에 대해서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무조건적인 호의와 인정이 베풀어지지만, 우리가 아닌 '남'에 대해서는 약자이든, 아동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쉽게 무관심하거나 < 비호의적이거나 < 배타적이거나 < 적대적이거나 < 자비롭지 않거나 < 잔인할 수조차 있는 광경을 많이 목격해 왔다.
내가 속한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그들이 '남'이지만, 그들이 속한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내가 '남'이다.
내가 속한 '우리'의 결속력이 강할수록, 그 모임이 배타적이지 않은지 늘 경계해야 한다는 글도 있었다.
어디까지를 '우리'로 볼 것인가에 따라 역사적 책임과 연민의 범위가 정해진다고 한다.
스스로가 포용할 수 있는 혹은 품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할지, '우리'가 쳐놓은 울타리의 높이가 어느 정도일 때 '남'도 배타적이라고 느끼지 않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기는 편 우리 편! 진 편은?
우리는 평상시 서로 적당한 거리 두고 살아가는 '한국' 국민이었다가 한일전이나,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리면 너나없이 혼연일체로 하나가 되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승리의 기쁨을 함께 만끽한다. 경기가 끝나고 열기가 사그라들고 나면 다시 각자 한국 국민으로 되돌아간다.
많은 프로 스포츠 팬들은 자기가 택한 팀들이 '승리'하기를 목청껏 응원하지만, '패배'한 선수들에 대해서는 차가운 비아냥과 함께 가차 없는 욕설을 쏟아 놓기 일쑤다.
학창 시절 체육대회를 돌이켜 보면 이긴 팀은 승리의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괴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지만, 진 팀은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누가 금메달을 따거나 우승을 하면 긴 시간을 들여 찬찬히 그(들)의 전 일생을 조망하고 그 업적을 찬양하며, 한국 선수가 진출한 외국 스포츠팀에 대해서는 거의 국내프로팀과 다름없는 친근감을 느끼고, 한국계 외국인 누군가가 국회의원이라도 당선되는 날이면 그 사람의 할아버지가 혹은 외할머니가 한국계였다는 사실까지 빠짐없이 파악해 보도한다. 그러면 우리는 한민족의 우수성에 깊은 자부심을 느끼고, 우리가 같은 동포 같은 핏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와의 일체감을 경험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위안부 할머니의 손녀라고, 징용에 끌려갔다 온 할아버지의 손자라고, 광주민주화항쟁의 피해자라고, 세월호 희생자의 가족이라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친척이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들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승리를 좋아하고 패배를 싫어한다. 이기는 편은 우리 편이지만, 지는 사람, 공격받은 사람, 피해를 당한 사람과는 쉽사리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팀이 상대 야구팀에 패하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누가 봐도 열세인 주장이나 세력에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것, 막강한 계엄군에 맞서 보잘것없는 구식 총 몇 자루밖에 없는 시민군 편에 서는 것, 군사대국 러시아에 맞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편을 드는 것, 강력한 포식자 무리에 둘러 쌓인 연약한 초식동물의 한 개체로 서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약한 것에 대한 비선호, 피해자에 대한 기피는 약육강식의 시대로부터 유래한 생존을 위한 진화적 학습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반나치 운동가 마르틴 니묄러의 <전쟁고백서>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독일에 처음 나치가 등장했을 때..
처음에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나는 가톨릭이나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내 이웃들이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뭔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 친구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가족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 이야기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이기고 있는 때는 우리 편이 많겠지만, 내가 지고 있을 때, 고통받을 때, 피해당할 때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은 누구일까?
▶ 소년이 온다 vs 쇼츠
[소년이 온다]를 받고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읽기 시작했다. 몇 줄을 채 읽기도 전에 '아 광주 얘기구나'. 2페이지 정도 읽었는데 내용이 암울하고 무거웠다. 약간 '피곤한' 느낌이 들어 책을 내려놓았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신문 앱을 켠다. 직장에서 본 것 외에 새로운 뉴스는 없다. x튜브를 켠다. 평소 즐겨보던 웃긴 쇼츠를 튼다. 이건 참 볼 때마다 재밌다. 화면을 밀어 올리다 보면 어렵지 않게 또 다른 재미난 내용이 나온다. 한참을 그러고 '쉬다가' 옷도 갈아입고 할 일을 했다. 여러 주가 지난 후 노벨상 발표가 났다. '책을 어디다 뒀었지?' 쌓인 책들 사이에서 다시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막상 읽으니까 관련 내용들도 이것저것 떠오르고 몰입이 되면서 몇 차례 눈물이 나서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기도 했다. 잔인하고 비장한 역사를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쓴 길고 슬픈 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벨상 수상작이라는 걸 모른 채 읽었어도 내가 이렇게 감명을 받았을까? 더 궁금한 것은 선물 받은 책이니 언젠가 읽기는 읽었겠지만 수상발표가 없었다면 난 이 책을 언제 읽게 되었을까? 난 왜 이 책을 읽기 힘들어 밀어 두었을까? 쇼츠는 힘들지 않은데 왜 이 책은 힘들까?
왜 조금 읽고서 '피곤한' 느낌이 들고 피하고 싶었을까? 책을 읽다 눈물을 흘렸듯이 그들의 상황으로 몰입하게 되어 그들이 느꼈을 억울함, 고통, 절망, 복수심을 나도 같이 느끼게 된다면 괴로워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힘드니까.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은 괴롭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구나. 그래서 내가 바로 책을 읽지 못했구나. 반면에 쇼츠를 보는 일은 핸드폰을 들고 앱을 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수고가 필요 없다. 거기에는 골치 아픈 윤리적 가치판단도, 도덕적 당위도, 시민사회의 정의와 구성원으로서의 의무 등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 거의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지친 우리가 더 힘들지 않도록 '쉴 수' 있게 해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업무와 판에 박힌 오락 사이를 다람쥐처럼 오가는 생활에 적응하며 산다."
[몰입의 즐거움] 중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운전하면서, 거리를 걸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선을 휴대폰에 고정시키고 드라마를, 영화를, 예능을, x튜브를, 인스타를 본다. 퇴근하고 나면 누구나 지친 심신에 휴식과 보상을 주고 싶지 골치 아픈 사회면 기사를 읽고 싶지는 않다.
힘든 현실, 내가 외면하고 눈감아도 엄연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함, 부조리, 비정의를 마주하기를 점점 꺼려하고, 가볍고, 유쾌하고, 골치 아플 일 없는 콘텐츠만 심적 동요 없이 보고 사는 것은 아닌가 문득문득 걱정이 될 때가 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나와 우리는 어떻게 변하가게 될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 식욕, 치욕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 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소년이 온다] 중
어머니를 땅에 묻고 무덤 옆에 세워진 간이 천막에 앉았다. 먹고 자는 것이 기꺼울 리 없는 이틀을 보내고 7월 땡볕에 땀을 흘리고 나니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 이온 음료를 마시고 있는데, 더운밥과 육개장이 내 앞으로 밀려 놓였다. 많은 어른들이 산사람은 먹어야 한다고 숟가락을 들라고 강권하셔서 육개장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았다. 맛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육개장이 맛있을 수가 있구나. 난 사람새끼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독한 감기에 걸린 채 억지로 밥 먹는 아이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밥을 먹은 기억이 있다.
▶ 소년이 온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소년이 온다] 중
시민군의 개인적 파멸을 보면서, 계엄세력이 의도했던 건 단순히 진압이나 자백을 넘어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 혹은 그 DNA 자체를 거세시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재판에서 사형에서부터 무기징역형,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은 모든 사람들을 이듬해 성탄절까지 대부분 특사로 석방해 준 이유는 대화합을 위한 군부의 쿨한 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라는 문장에서 보듯이 시민군들을 사회와 격리시켜 감옥에 가두어 두는 것보다, 서서히 파멸되어 폐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긴 시간동안 바로 옆에서 모두가 지켜볼 수 있게 사람들 사이에 '시범케이스'로 '전시'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오랜 기간동안 다시는 저항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교육' 효과가 있었을 것 같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
[소년이 온다] 중
작가는 1980년 5월에 짓밟힌 광주와 똑같은 폭력과 억압이 아직도 재현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폭력만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또 다른 '동호'와 '영재'가 짓밟히고 살해되는 것이다. 과거와 같이 짓밟히고, 상처받고, 살해되겠지만 또 다른 '동호'와 '영재' 역시도 기어코 되태어나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피 흘리고 저항하고 죽어갈 것이다. 작가는 반복되지만 결코 후퇴하지 않을 역사에 대한 믿음, 시민들의 양심에 대한 신념,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언제든 다시 살아올 그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책 제목에 담은 것이 아닐까 싶다.
'소년이 온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영화
▶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 국가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복지 국가 등 다양한 국가론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혼동하기 쉬운 국가와 정권의 차이,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애국심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등의 내용도 담겨 있다. 국가란 과연 국민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내가 바라는 국가의 모습은 어떤 형태인가에 대해 공부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라 생각한다.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 위 책이 좋은 국가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책은 어떤 형태라면 모두가(더 많은 사람이?) 만족할 만한,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리주의, 자유주의 등 사회 정의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소개되어 있다. 역시 내가 꿈꾸는 좋은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공정하다는 착각]도 이어서 읽으면 더욱 좋다.
▶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 - [소년이 온다]와 비교하며 보기에 좋다고 생각된다. 책은 시민(군) vs 계엄군의 구도로 희생된 시민(군)의 신념과 파탄난 정신과 삶에 대해 다루었다면, 영화는 반란군 vs 진압군의 구도로 진압군 주요 인물들의 충정과 의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두 세력 간의 승패와 사활 중심으로 그려진 영화가 담아내지 못한 부분이 무엇이었고, 두 작품이 일반 시민들에게는 주는 의미는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하며 생각해 보기 좋을 것 같다.
▶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 제주 4.3을 다룬 책이다. 국가권력 형성기의 국가 폭력에 의해 초래된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그로 인해 남겨진 상흔들을 추적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소년이 온다]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고발의 성격보다는, 다시 치유될 수 없이 파괴된 인생과 영혼에 대한 오랜 세월을 꿰뚫는 관찰과 따뜻하고도 슬픈 공감과 동정으로 더 강한 역사적 울림을 가슴에 남기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에리히 프롬의 [인간의 마음] '3. 죽음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사랑' 장을 다시 펴보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 [채식주의자], 한강 - 빨리 다음 장을 넘기고 싶을 만큼 잘 읽힌다. 총 3편 중 중간 부분에 다소 자극적인 성적 설정 및 묘사가 나오지만, 그것이 마지막 편에서야 소개되는 어린시절에 받은 학대와 사회적 역할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지속적인 자기 억제로 인한 영혼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해변의 카프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 등에 등장했던 성적 표현들과 수위에 비해 볼 때, [채식주의자]에 가해지는 비난이 공평하고 온당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2/3 부분까지는 먼저 읽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느낌이었는데,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연민과 위로의 시선을 결말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세심하고, 독특하고, 통찰력이 돋보이고, 어떻게 저런 표현을 생각했을까 싶은 시적이고도 아름다운 문장들을 많이 만나서 정서적으로 포만감을 느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