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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채환 Sep 20. 2022

5. 명예

 : 나의 행복을 넘어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우리는 어떤 인물을 존경하는가?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럼 무엇부터 시작할까? - 돌아보기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서 ‘나’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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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가 뭘까? 명예롭다는 건 뭘까? 정확히 잘 모르겠어서 아빠가 즐겨 쓰는 사전 찾기 방법을 다시 이용해봤어. 명예[名譽] : 세상에 널리 인정받아 얻은 좋은 평판이나 이름. 영어로는 fame, honor, reputation과 같은 말이래. 그래도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①그 사람의 활동, 사상, 제작물 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②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존경하면 명예롭게 되는 것 아닌가 싶어. 그럼 우리는 그 사람들이 한 일의 어떤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존경하는 것일까? 아마도 ‘보통 사람들로서는 하기 힘든 일’을 해내서가 아닐까 싶어. 평범한 우리들로서는 하기 힘든 일을 해낸 그들의 업적에 대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건가봐. 그럼 만약에 우리가 명예를 얻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존경을 얻고 싶다면, 일단 뭔가 남다른 일을 해야 할 것 같네. 그럼 우린 어떤 일을 하기로 선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인물을 존경하는가?

 뭐가 명예로운가를 말하기 어려우니 어떤 사람이 존경할 만한가에서 대해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고 싶어. 우리가 흔히 존경할 만한 사람하면 떠오르는 게 ‘위인’아닐까?

아빠가 어렸을 때는 학생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군지를 묻는 경우가 많았어. 물으면 대개 저는 XXX님을 존경해요 저는 OOO님을 존경해요 라고 말하는데, 이유를 물으면 위인전을 읽었는데 그 사람이 참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던 것 같아. 아빠도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었던 기억이 나. 알렉산더대왕도 읽고 세종대왕도 읽고 슈바이처박사도 읽고 그랬던 것 같아.     

 읽으면서 각각 인물들이 모두 참 보통사람은 아니다 생각했던 것 같아. 동시에 마음속 한 쪽에서는 뭔가 명확하진 않지만 이 분들이 하신 일이 좀 종류가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던 것 같아. 그러다가 하윤이한테 이 단원의 얘기를 해주려고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을 살펴보니 아빠가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은 그냥 죽 번호가 매겨져서 나열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 나온 위인전은 아래 사진처럼 뭔가 분류가 되어 있는 것도 있더라.

[한국톨스토이, 통큰인물이야기 100권, 목차]

 하윤이도 이 책들 기억하지. 어렸을 때 읽었던 모 출판사의 위인전 시리즈잖니. 사전에 찾아보니 위인은, ‘위인 偉 (위대할 위), 人 (사람 인) [한자풀이] 훌륭하고 위대한(偉) 일을 한 사람(人)’이라고 나오네. 모두 위대한 일을 한 것은 맞는데, 예전에 뭔가 계열이 다를 것 같다고 생각만 했던 것을 이번에 아빠 나름대로 한번 분류를 해봤어. 


◆직업별

 그 사람이 한 일을 분야별로 나눠보자면 훨씬 더 다양한 종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직업으로 생각해보자면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복자(정치인, 군인?) : 광개토대왕, 칭기즈칸, 알렉산더, 나폴레옹

-운동선수 : 박세리, 김연아, 타이거우즈

-탐험가 : 염홍길, 콜럼버스, 마젤란
-예술가 : 모차르트, 톨스토이, 스티븐 스필버그
-과학자 : 에디슨, 퀴리부인, 장영실, 알프레드 노벨
-인권운동가, 사회봉사가 : 슈바이처, 테레사수녀, 마틴 루터 킹     


◆보편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인가 vs 특정 국민에게만 존경받는 인물인가

 특히 정복자로 유명한 정치인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것 같은데, 한 나라의 영토를 넓힌 인물의 경우 그 나라 국민들과 인접하지 않아 이해관계가 없는 나라의 국민들은 광활한 제국을 건설한 영웅으로 칭송할 수 있겠지만,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희생당하고 마을과 가옥이 불타면서 비참하게 정복을 당한 나라의 국민들도 과연 이 사람들을 위인으로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들어. 빈번하게 근대적인 문화와 문명 전파에 기여하고, 작게 쪼개진 국가들을 하나로 합쳐 커다란 통일국가를 만들어서 지역 간, 인종 간 분쟁을 없애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였다는 그럴싸한 명분과 미화로 포장해보지만 그것을 위해 죽어간 목숨, 사라진 문명들을 생각해보면 과연 칭송받아 마땅한 일로만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아무튼 여기에 속하는 위인들은 한쪽에서는 존경받지만 한쪽에서는 미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를 위해서 vs 남을 위해서

 남다른 일을 하게 된 동기에서도 차이가 있을 것 같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반복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이전까지 없던 위대한 발명을 해낸 과학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 덕분에 인류가 편리하게 전기, 전파, 엑스선 등을 쓰게 되어 그 과학자의 연구에 의해 큰 혜택을 보게 되었다면 과학자도 매우 기뻤을 거야. 그런데 그 과학자는 그냥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에서(물론 당연히 본인의 연구 결과로 사람들에게 큰 편리함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이타적 의도에서 연구를 하는 과학자도 많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연구에 몰입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큰 혜택을 베풀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리나라도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 시기에 스포츠나, 탐험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서 실의에 빠지고 지친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준 사례들이 있잖니. 이 분들의 경우도 당연히 국민들을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경기와 탐험에 집중하고 도전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원하던 목표에 도달하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도 긍정적인 정서적 감동을 주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인권운동가, 사회운동가, 자원봉사자, 난민지원운동가 등은 애초에 가졌던 동기 자체가 남을 돕기 위해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위에 예로든 사람들과(이타적 동기가 없었던 경우에 한해서) 구분되는 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남을 위한다는 동기가 있는 업적이 더 훌륭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차이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정신적 만족 vs 실질적 생활의 혜택

 위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라고 할까 그들로부터 우리가 받는 도움에도 차이가 있는 것 같아.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보면서 나도 원대한 꿈을 꾸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꿈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으면서 정서적인 감화를 받고 그것으로 정신적인 자양분을 삼아 삶의 의미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고 나중에 더 창의적이고 차원 높은 사고를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박세리 선수의 우승을 바라보면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삶의 의지와 인내를 기를 수 있을 것 같아. 

 한편 슈바이처 박사처럼 아프리카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게 되면 의료서비스라고는 전혀 없는 오지 주민들에게 질병의 고통을 덜어주고 사망률도 떨어지도록 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과학자가 오염된 물을 정수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한다면 식수가 부족한 나라 국민의 삶과 건강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고, 난민들의 인권을 위해 국제기구에 협력을 얻기 위해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들의 삶과 생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앞의 내용은 정신적, 정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지만 현실 생활에는 별 변화가 없는 반면, 뒤의 내용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내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vs 내 삶을 희생하면서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노벨은 그 결과로 큰 부를 얻었고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노벨상까지 만들었고, 스포츠 경기에서 큰 성과를 낸 선수는 상금과 더불어 큰 인기를 얻어 광고수입도 많이 올리기도 하는 것 같아. 과학자들도 역시 크게 인정받고 전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자신이 해보고자 했던 연구를 더 자유롭고 활발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을 거야. 이처럼 대개의 경우 자신이 큰 업적을 낸 후 자신이 기존에 해오던 일을 계속하면서 사회적인 인정과 존경, 경제적인 부유함까지 누리면서 자신의 삶을 더 안정적으로 영위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반면 인권운동가, 사회운동가들의 경우 우선 활동조건이나 환경 자체가 열악한 경우가 많을 거야. 차별받는 인종을 위해 일하면 반대자가 많을 것이고, 난민들을 위해 일할 때는 관심 갖는 사람이 없어서 이리 저리 스스로 뛰어다니면 도움을 호소해야 할 것이고, 사회기반시설이 부족한 오지 주민들을 위해 봉사를 하려고 하면 기본적인 재원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일거야. 이런 여건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사용하는 경우는 셀 수도 없을 것이고, 반대세력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일 테고, 심지어는 폭력이나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해서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면서 이 일을 해나간다고 봐야 할 것 같아. 독립운동가 같은 분들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뿐 아니라 하나뿐인 목숨까지 희생하면서 뜻한 바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결론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 삶의 일부 혹은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만 하느냐, 그렇게 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이 위인들의 삶을 평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뭔가 차이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려다 보니 부득이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되었네. 모두 우리 사회에 크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훌륭하신 분들인데, 그 분들을 보면서 만약 우리도 뭔가 괜찮은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으려고 한다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어.     


  -특정 국가나 민족, 정치적 진영에서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면서

  -자신의 동기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남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신적 또는 실질적 혜택(사회적 약자에게는 이점을 보다 중심으로)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자신이 더 좀 많이 가진 것이 있다면 조금은  

   나눌 수 있는 마음자세로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들 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골라서 해보면 어떨까 싶어.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윤이가 무언가 해보려고 선택하겠다면 이런 방향은 어떨까 하고 한번 제안해 보는 거야.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행복이 풍부한 물자나 다양한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넘어서 타인의 행복까지 헤아리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거기에 더 가까워질 것 같아서 말이야.

 하윤이가 어려서 말을 잘 못할 때 뭘 먹고 있었는데 아빠가 “하윤아 맛있니?”하고 물으니 아빠를 물끄러미 잠깐 바라보더니 입에 손을 넣어서 먹던 것을 꺼내서 아빠한테 내민 적이 있었어. 명예로운 것이 어떤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만, 하윤이의 인생이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이 될 수 있다면 좀 더 보람될 것 같구나.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A는 어떤 넓은 평야지대의 농촌에서 태어났다고 하자. 이곳은 큰 강을 끼고 있어서 땅이 기름지고, 농사짓는 데 쓸 물도 풍부하고, 기후도 알맞아서 봄에는 모내기한 어린 벼가 뿌리 내리기 좋게 기온이 따스하고, 여름에는 충분한 비도 내리고 날씨도 무더워서 벼가 쑥쑥 자라고, 가을이면 곡식이 잘 여물게 비도 많이 오지 않고 햇볕이 따뜻해서 별 일이 없으면 매해 풍년이 드는 곳이다. 좋은 조건에서 오래 농사를 짓다보니 각종 농업기술, 해충방지 기술, 보관기술 등이 발달해 해마다 산출량이 느는 추세여서 집집마다 창고에 곡식이 넉넉히 쌓여 있어서 밥도 배불리 먹고 후손들도 배고플 걱정을 크게 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남는 곡식을 내다 팔아 필요한 옷과 물건도 사서 쓸 수 있어서 물자가 풍부하고, 아이들을 근처 도시에 있는 학교에 보내 공부도 시킬 수 있다.

 B는 어떤 고산지대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자. 산골마을이라 평지가 없고 다 비탈이라 얼마 안 되는 비교적 경사가 심하지 않은 곳을 개간해서 계단식 논으로 만들어 농사를 짓는 곳이다. 땅이 척박하고, 물이라고 해봐야 외진 곳에 시냇물만 겨우 조금 흐르는 정도라 비가 올 때 빗물을 소중히 잘 가두었다가 아껴 써야하고, 높은 산지라 날씨가 추운 편이어서 낮은 곳에서만 벼농사를 좀 짓고 나머지는 밭농사로 고구마, 감자, 콩, 야채 등을 재배하는 편이다. 여건이 이렇다 보니 한 해 내내 새벽부터 논밭에 나가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도 다음 한 해 동안 먹을 곡식을 겨우 수확할 수 있는 정도로 빠듯하고, 행여 태풍이 오거나 가뭄이라도 들라치면 그것도 힘들어서 쌀이 떨어지고 나면 고구마나 감자 등으로 끼니를 대신해야 한다. 땅도 기름지지 않고, 기후도 좋지 않고, 농업기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어서 앞으로도 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읍내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서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학교를 다니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돕다가 어른들이 멀리 장에 가서 사온 교과서나 책들을 틈틈이 읽는 게 전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엄마아빠처럼 손바닥만큼이라도 땅을 더 일구려고 애쓰며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스탠퍼드 의대의 필립 M. 하터 박사라는 분이 지구상의 인구를 축소해서 100명이 살 수 있는 지구를 만든다면 다음과 같은 계산이 나온다고 했다는구나.     


-57명은 아시아인 / 21명은 유럽인 / 14명은 아메리카인 / 8명은 아프리카인

-52명은 남자 / 48명은 여자

-70명은 유색인종 / 30명은 백인

-70명은 비기독교인 / 30명은 기독교인

-89명은 이성애자 / 11명은 동성애자

-6명은 세계 부(富)의 59%를 차지하고, 그 6명은 모두 미국사람

-80명은 적정수준에 못 미치는 주거환경에 살고 있고

-70명은 문맹

-50명은 영양부족

-1명은 죽기 직전

-1명은 임신중

-1명은 대학교육을 받은 적이 있고

-1명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다.

                                  [경향신문 / 2002. 1. 21 / [화이트북]100명의 지구/커뮤니케이션 그림판]     


 A는 농사를 짓기에 매우 유리한 자연환경에서 태어났고, 축적된 기술도 자연스럽게 전수 받을 수 있는 조건이고, 교육을 통해 배운 새로운 지식을 활용해서 더욱 많은 생산을 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 반면 B는 태어날 때부터 매우 불리한 자연환경 속에서 태어났는데, 그것을 바꿀 기술이나 자본을 축적할 가능성도 매우 낮고, 교육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잡기조차 어려울 것으로 보여.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A 가족의 창고에는 A의 세대, 그 자손세대까지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부가 축적되어 갈 테지만, B 가족의 경우는 세대를 거듭해도 하루하루의 생활을 걱정해야하는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아.

 A가 이룰 성취와 누리게 될 풍족함과 안락함은 전적으로 A의 뛰어난 자질과 성실한 노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 B가 감내해야 할 궁핍함과 고단함은 온전히 B의 무능함과 게으름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출발점이 다른 상황에서의 나온 결과를 두고 공정한 경쟁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A가 본인생각에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B의 마을에 태어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높은 성취를 똑같이 이루어낼 수 있을까? B가 본인의 현 상태 그대로의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A의 지역에 태어난다면 과연 현재와 같이 낮은 수준의 성과밖에 내지 못할까? 같은 관점으로 세계의 80%는 적정수준에 못 미치는 주거환경에 살고, 70%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50%는 영양부족 상태인데, 세계 부의 59%를 6명의 미국인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고, 오로지 100% 본인의 능력로만 이뤄낸 것이며, 온당한 일일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일 것 같아.

 굉장히 오래된 논쟁거리인데 누구는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의 부를 축적하고 있는데, 누구는 영양부족과 기아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겨운 상태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도 같은 관점의 물음일거야. 긴 세월동안 각 나라에서 여러 시도가 있어왔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 과연 법과 제도로 모두가 만족할 만한 공정에 다다를 수 있을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공정이라는 개념에 합의하고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 같아.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자신의 정신적 행복을 위해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입장에서는 유쾌하지 않은 표현일 수 있을 것 같아. 법과 제도로 국가와 사회가 공정과 분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If I were in your shoes...”라는 영어 표현이 있잖니. "내가 네 상황이라면.../내가 네 입장이라면..."하는 말이잖아. 또 사자성어 중에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당사자들 간에서 서로의 처지,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단다. 만약에 자신이 뭔가 남보다 많은 수확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자신의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 ‘내가 다른 환경에 태어났더라면 지금의 나가 될 수 있었을까?’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후에, 자신이 처한 환경에 감사하고 자신이 이룬 성과에 앞에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100명이 사는 지구’에서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굉장히 운이 좋은 축에 속하는 것 같아. 천장이 있는 집도 있고 집에 컴퓨터도 있으니까 말이야. 만약에 한 국가 내에서든 국가 간에든 상대적으로 운 좋게 더 많은 것을 생산할 가능성이 높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누군가는,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덜 열심히 일해도 충분히 먹고 남을 만큼을 생산할 수 있어서 평생 큰 어려움 없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여기에 만족하며 힘들게 일하는 대신에 남보다 좀 한가롭게 인생을 살 수도 있겠지만, 조금 생각을 달리 해서 이로운 조건하에서 여유롭게 사는 것도 좋지만, 운 좋게 받은 이 좋은 여건을 십분 활용해서 좀 더 열심히 노력해서 더 많은 생산을 하고 그것을 어려운 여건에 있는 사람과 나누기로 마음먹는다면 세상과 사회를 위해 보다 크고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해보니 같은 시간을 해도 남들보다 내가 더 잘하는구나, 운동을 해보니 내가 남보다 더 소질이 있구나, 문학에서, 예술에서, 사회활동에서 내가 좀 더 좋은 여건에 있고 남보다 빨리 익히고 잘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그 재능을 이용해서 자기가 거둔 더 많은 유익함을 주변에 있는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값진 선택권을 받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노느니 염불(불경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한다.’는 속담이 있어. 여유 있는 시간에 하릴없이 그냥 쉬는 것보다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며 말씀을 소리 내어 외우다 보면 그 가르침을 더 깨닫게 되어 하나라도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일 거야. 남보다 좀 더 여유가 있는 상황을 이용해서 하는 일로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일까지 할 수 있다면 정말로 기쁘고 보람되지 않겠니.       


◎그럼 무엇부터 시작할까? - 돌아보기부터

 “애들 학원 보낼 돈이 없어서 못 보내는 사람이 있다고요? 정말이에요?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런 사람이 있는 줄 몰랐네요.” 최근에 엄마가 만난 어떤 분이 했다는 말이야. 어쩌다 모르게 되었을까? 이분만 모르는 걸까? 다른 어떤 문제의 경우 우리도 다른 사람의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야가 있지는 않을까?

 하윤이 초등학교 때만 해도 주변에 굉장히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아.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친구, 음악을 하려고 예술중학교를 준비하던 친구, 미술, 바둑, 무용 등등 다양하게 많았지. 아빠 때도 그랬던 것 같아. 아빠가 자라온 기억을 더듬어보면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예술계로 가는 친구들이 빠져나가고 고등학교로 가면서 실업계를 지원한 친구들이 빠져나가고, 인문계 고교 내에서도  문과 이과로 나뉘고 20살이 넘어가면서 대학에 진학하는 친구, 진학하지 않는 친구가 또 나뉘게 되었던 것 같아. 20대 초반만 해도 학교에 다니는지 직장에 다니는지 학교가 다른지를 구분 않고 좀 만남이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과 주로 어울리다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회사 사람들과 일과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퇴근하고도 그 사람들과 회사 얘기를 주로 하며 어울리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게 되다보니 정말 가깝고 친하던 친구가 아니면 잘 못 만나게 됐던 거 같아.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정말 친하던 친구도 자주 못 만나게 되고 회사는 어쩔 수 없이 나가야 되니까 회사사람하고는 계속 만나게 되었던 것 같아. 그렇게 살다가 아이가 좀 크면 유치원, 학교 친구들의 학부모들과의 교류가 제일 많아지고 그 다음이 직장 동료들과 많이 시간을 보내고, 알고 지내던 정도의 친구들은 이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어지고 심지어 아주 친한 친구들마저도 일 년에 한두 번 만나기가 쉽지 않게 되더라.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현재 아빠가 자주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거리상으로 상당히 가까운 곳에 살고 있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으며, 경제 수준도 비슷하고, 학력수준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직업도 크게 다르지 않고, 유사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만을 주로 만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다 보니 그 사람들과 공유하는 관심사 외의 세상사에 대해서는 신문 사회면 등에 나는 기사를 접할 때를 제외하고는 알기가 어렵고 관심을 가지게 될 계기도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것 같아.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유사한 관심사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살아가다 보니 뭐랄까 보이진 않지만 하나의 작은 ‘섬’에 살거나 ‘벽’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그냥 하나의 ‘자기들만의 세상’ 안에서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아빠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또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이 속한 세상에서도 공통적인 관심사가 되는 육아, 교육, 경제(재테크), 정치 등의 정보들에 대해 활발한 교류가 오고 갈 수는 있겠지만 그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얘기는 많지 않을 거야. 그래서 각 개인이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그 세상 밖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각각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각 세대·계층별로 어떤 고민과 어려움이 있는지, 나는 이 사회 전체에서 대략 어떤 정도의 경제사회적 위치를 점하며 어떤 환경에 살고 있는 사람인지, 그것이 상대적으로 좀 여유가 있는 삶인지 고단한 삶인지도 알기 어려울 거야. 아마도 사회 전체에서 자신의 위치보다 자신이 속한 ‘또 하나의 세상’ 내에서의 상대적 위치만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 더 나은 위치를 점하기 위해 모두가 각자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윤이도 크면 아마 그런 작은 세상 중 하나에 속하게 될 거야. 아마도 하윤이와 환경도 비슷하고, 마음도 잘 맞고, SNS 친구로서 따뜻한 글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가정이 행복하길 기원해주고, 정서적 안정감의 토대가 되는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며 살게 될 가능성이 높을 거야. 자연스러운 일이고 결코 그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야. 하지만 만약 하윤이가 좀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며 살아가고 싶다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도 어떤 일을 해보고 싶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그 담장 너머를 바라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아. 내 앞에 앉아서 내 눈을 바라보며 다정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보이지 않는 담장 너머로 시선을 돌려 ‘돌아보기’를 해서, 우선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구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처지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구나.’를 깨닫는 일부터 말이야. 그런 후에는 그 담장 너머 이웃들과 사회를 위해 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개구리에게는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요긴한 것들과 자신과 닮은 친구들까지 있어 우물 안이 최고의 공간이고 바깥세상 사정은 가끔 새들이 알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듯이, 편안한 곳에서 친근한 이들과 충분한 휴식과 충전을 한 후에는 바깥으로 난 계단을 딛고 올라서서 ‘돌아보기’를 해야만 이 세상의 다른 이웃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서 ‘나’가 되었을까?

 우리 유치원, 우리 반 친구들, 우리 모둠, 우리 학교.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이가 어리고 학생인 시절일수록 ‘우리’라는 말을 많이 썼던 것 같아. 도덕, 윤리, 사회, 역사 과목 등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웃과 사회와 국가의 일원으로서 공동체를 생각하고 기여도 해야 한다고 배웠던 것 같고. 그런데 아빠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를 조금 먹고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돌아보니, 어느새 (나보다는 우리로 표현하는 언어관습에 의해 쓰는 우리를 제외하면) 내가 중시하는 ‘우리’라는 것은 ‘우리 가족’, ‘우리 회사’를 제외하고 별로 꼽을만한 것이 없어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많던 ‘우리’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하윤아 공부 다 했으면 스탠드 불 꺼야지.”, “옷 다 갈아입었으면 불 끄고 나와야지 이놈아.” 아빠가 하윤이한테 가끔 하는 잔소리지. 그런데 문득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빠한테 불 끄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이 났어. 아빠가 하윤이처럼 불을 끄지 않은 채로 두고 다른 일을 하고 다니면 할아버지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불을 끄고 다시셨는데, 그럼 아빠는 언제부터 불을 켜는 사람에서 끄는 사람이 된 것일까? 가만 생각해보니 아마도 아빠가 ‘스스로 전기요금을 직접 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아. 전기 요금을 낸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아마도 자신이 머무를 공간과 일정한 재산이 형성되었다는 말일 것 같아. 아빠의 개인재산이 생기면서 저 등을 켜 놓음으로서 생기는 비용이 내 돈에서 빠져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생기고 그러자 그 전과는 달리 그걸 아깝다고 느끼면서 행동과 생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던 모양이야. 

 학교를 다닐 때는 다들 그만그만한 용돈을 받으면서 아르바이트해서 조금 더 번 친구가 조금 더 쓰고 하면서 오순도순 친구들과 어울리며 비슷비슷하게 지냈던 것 같아.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서로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직장을 가지게 되면서 월급을 받아 처음으로 돈을 벌게 되었지. 처음에는 그것도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 차이가 나게 되더구나. 결혼을 한 친구, 하지 않은 친구, 아이를 낳은 친구, 낳지 않은 친구, 집을 장만한 친구 하지 않은 친구, 부동산과 금융상품을 이용한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는 친구 아닌 친구 등으로 사는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게 됐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이 생기면서 식구가 한명 늘 때마다 조금 더 큰 집이 필요하게 되고, 만만치 않은 사교육비를 부담하기 위한 비용, 대학 학비, 자녀의 결혼 자금, 결혼하고 살 집을 얻을 자금, 은퇴 자금 등 생각하면 할수록 돈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갈수록 그것을 충당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하는 시간, 그것을 실행에 옮겨서 수익을 벌어들이는 데 할애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게 되는 것 같아 보였어. 아마도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었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만나서 하게 되는 얘기가 예전에 나누었던 꿈이나 삶의 가치, 올바른 사회상 같은 소위 뜬구름 잡는(?) 대화 주제들은 사라지고 직장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뒷담화로 간단하게 몸을 푼 후에는 바로 어느 학원이 좋다더라, 어느 주식이 대박이라더라 하는 교육과 재테크 성공담 및 강의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화의 패턴이 자리를 잡게 되더라. 이런 대화를 거듭할수록, 등교 마감시감이 임박한 줄도 모르고 철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여기저기 뛰기 시작하는 학생들의 다급함에 정신을 차리고 그 무리에 뒤늦게 동참해 정신없이 내달리게 되는 지각생처럼, 이미 남보다 너무나도 늦어버린 듯한 ‘부를 향한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어 너나 할 것 없이 정신없이 내달리게 되는  것 같더구나.

 자식이 유치원에 들어가 단체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 유치원의 잘못된 운영에 대해 분명하고 강격한 시정요구를 하고 싶지만 ‘혹시 우리 아이에게 불이익이 돌아오지는 않을까’걱정하는 마음에서 자꾸 누가 먼저 나서주지 않을까 곁눈질을 하면서 변죽만 울리게 되고, 학교의 처사가 명백히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 나서면 선생님들한테 찍혀서 아이가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말하기를 주저하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을 거야.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부당함에 맞서기위한 대열의 제일 앞에 서서 해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것은 주저하게 될 수 있을 것이고. 자식에 관한 것이든 본인에 관한 것이든 그 행동에 의해 야기될 불이익과 그로인해 우리 가정의 안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체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부조리한 일, 불합리한 일들에 눈을 감고 외면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거야.

 결국 ‘우리’와 공동체를 생각하던 학창시절과 달리, 각자가 이룬 가정을 더욱 ‘안정’되게 만들기 위해 ‘경제력 확보’와  ‘위험 회피’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가정에 해가 될지도 모를 일체의 ‘위험’에 되도록 관여하지 않고, ‘더 많은’ 사실 ‘남보다 더 많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해 앞만보고 달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같은 지점에서 출발해서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경마처럼 같은 선상에 선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열심히 달리고 있는 각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남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한눈팔지 않고 앞만 보도록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나의 목적지를 위해 숨차게 달리는 각각의 ‘나’만이 존재하는 상태가 되어있는 것 같은 느낌말이야.

 처음부터 얼마나 날랜 말 위에 타고 있었는지,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고, 얼마나 열심히 달려 왔느냐에 따라 경마에서의 순위가 갈리듯이, 어른들도 숨 가쁘게 달려온 경쟁의 결과에 따라 사회경제적으로 앞서나간 정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세상(경마 경기)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달라지게 되는 것 같아 보여. 그래서 각자의 상황에 따라 사회를 바라보는 입장이 이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내가 이긴 경기의 규칙이 과연 공정했을까 의문을 갖기 힘들 듯이

 내가 진 경기가 100% 공정했을 거라고 한 점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고,     

*나의 풍족함과 성공이 내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좋은 여건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듯이

 나의 궁핍함과 고단함이 열악한 여건에 의한 영향은 전혀 없고 순전히 내 능력 탓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수 

 있고       

*내가 편안하게 잘 살아가는 이 사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 힘들 듯이

 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 사회가 정상적이고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힘들 것 같아.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할 것 같아. 특히 요즘은 너무 어린 나이부터 누가 더 빨리 많이 선행을 앞서가는지 다투고, 학원에서도 레벨을 나누어 수업을 듣고, 많은 시험을 보고 그 성적을 공개해서 서로를 비교하게 만들고, 내신 시험 한 문제에 울고 웃고, 대학입시도 치열하고, 취업하기도 힘들고 하다 보니, 확실히 아빠가 자랄 때 보다 전체적으로 경쟁의 강도도 더 치열하고 경쟁을 버텨내야 하는 시간도 더 긴 시대인 것 같아. 그럴수록 내 앞에 해결해야할 과제, 달성해야 할 목표를 두고 잠재적 경쟁상대일 수도 있는 내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며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마에 임한 모든 선수가 각자 ‘나’의 승리를 위해 더 많은 돈을 들여 더 비싸고 빠른 말을 사고, 선수 스스로도 먹을 것을 줄여 몸을 더 가볍게 하고, 잠을 줄여 연습량을 늘이고, 결승선까지 숨을 참고 아무리 열심히 달려 봐야 절대로 모두가 1등을 할 수 있는 결과는 나올 수는 없다는 점이야. 잘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런 노력의 일부를 나누어 모든 선수가 안전하게 경기를 마칠 수 있도록 트랙과 울타리 등 안전장치를 손보고, 과도한 체중감량과 훈련으로 선수가 영양실조에 빠지는 등 건강을 잃지 않도록 하는 제한 규정을 마련하고, 선수와 소속사의 재정 상태에 관계없이 원하는 훈련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훈련센터를 마련하고, 모든 경기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원칙을 마련하는 것처럼 구성원 모두가 몸담고 있는 환경과 제도 전체를 손보는 편이 ‘우리’ 모든 선수들의 행복 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데 한계가 있는 만큼, ‘우리’를 생각해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사회가 되면 ‘나’의 삶도 더 좋아지지 부분이 있지 않을까?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어.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구성원 간에 인심 좋은 배려를 기대하기 힘든 만큼, 아빠가 경마처럼 느낀 이 방식에는 적지 않은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여. ‘나’와 ‘우리’를 위해 어떤 좋은 방법이 있을지 같이 한번 생각해 보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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