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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채환 Sep 20. 2022

6. 기타

◎스마트폰, SNS 너무 많이 하지 마라.     

◎구경하지 말고, 직접 하자.     

◎정치에 대해      

◎언론에 대해     

◎혐오에 대해      

◎친구 따라 강남만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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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SNS 너무 많이 하지 마라.
  아빠는 너에 비해 구식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느덧 그렇게 된 것 같아.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20대 동료에게 “누구씨! △△△이라는 노래 알아요? 너무 좋던데.” 했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돌아오는 대답이 “헐. 그건 4년 전에 나온 노랜데요.” 하는 거야. 아빠는 처음 들었는데.ㅠㅠ. 새로운 미디어, 전자기기, 앱(App.) 같은 것들에 갈수록 관심이 줄어들고, 사용법 같은 걸 익히는 것도 자꾸 귀찮아지고 그냥 하던 방식대로 살고 싶어져. 그런 아빠다 보니 새로운 미디어에 흥미를 보이는 너에게 아빠 관점에서 그게 나쁘다 별로다 같은 싱거운 얘기 해봐야 재미없는 얘기일 테고, 너희 시대에 맞게 슬기롭고 즐겁게 이용하되 아빠 생각에 주의해야 되겠다 싶은 점 몇 가지만 이야기 할까 해.     


◆생각할 여유

 아이들에게 글자로 된 책을 읽어주거나 읽게 하는 효과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옛날 옛날에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계모가 변장을 하고 와서 독 사과를 건네주자, 백성공주가 한 입 베어 물고... 왕자님이 백마를 타고 나타나..’ 이렇게 글로만 쓰여 있으면 읽는 사람은 그림이 없으니까 백설 공주의 생김새를 머릿속에서 그려보게 되고, 일곱 난장이 각각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들어 보니 성격이 대략 어떨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고, 그에 걸맞은 얼굴을 또 떠올려 보게 될 거야. 백성공주가 독 사과를 먹고 쓰러질 때의 고통스러운 표정, 난장이들의 울음소리, 왕자님이 타고 온 백마가 숨을 몰아쉴 때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움직임 등도 상상해보게 될 거야. 이렇게 글자로만 된 것으로 어떤 것을 접하게 되면 그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생각과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만 전체적인 이미지가 완성되겠지. 하지만 이것을 그림책으로 보게 되면 그 모습을 떠올리는 수고가 없어도 되고, 동영상으로 보게 된다면 말소리와 움직임은 물론 배경음악을 듣고 분위기와 상황까지 저절로 알게 되겠지. 시각정보, 청각정보 등 감각정보가 복합화 될수록 우리의 사고가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고 그냥 일방적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하며 되는 쪽으로 변해간다고 하더라. 
  요즘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SNS로 소비하는 컨텐츠들은 동영상 또는 원문+댓글 형태가 많은 것 같아. 위에서 말한 대로 동영상은 시청이 편리하고 이해하기 쉬운 장점이 있는 반면 함께 지적한 단점도 있으니 너무 동영상만 시청하지 말고 글로 된 책도 좀 읽는 시간을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뉴스나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도 역시 내용을 우선 잘 이해한 후에는 자기 스스로 그 의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는 시간도 필요하겠어. [3.3 학습할 수 있는 능력]에서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문구를 소개했었어. ‘학이불사즉망’이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어진다.’라는 뜻이었잖니. 같은 이치로 남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놓은 글만 읽고 비판적으로 사고를 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 거야. 거기다가 요즘은 원문을 다 읽고 밑에 내려가 보면 댓글이 막 주렁주렁 달려 있잖니. 이걸 읽어보면 참 같은 글을 읽고도 사람들 생각이 이렇게 다양할 수도 있구나 생각할 때도 있고 이런 댓글은 참 참신하다 싶을 때도 있잖니. 하지만 원문을 다 읽자마자 바로 댓글까지 죽 읽으며 내려가다가 ‘오! 이 생각 괜찮네.’하면서 원문에서 다룬 현상, 사건, 생각에 대한 어떤 이의 의견까지 선택해서 그것을 나의 생각으로 정해버린다면 정말 우리의 사고과정이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어지게 될 것 같아. 또 어떤 경우는 골치 아프니 댓글들 중에 다수의견이거나, 강경한 의견, 장문의 의견으로 내 의견을 정하지 않는지도 경계할 점 일거야. 댓글 너무 많이 보지 말고, 보더라도 꼭 스스로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 본 후에 보도록 해라.

 옛 어른들이 ‘아이는 좀 심심하게 키워야 된다.’고 하셨었어. 아무리 좋아하는 장난감도 여러 번 가지고 놀다 보면 싫증이 나고 그럼 뭐 재미있는 거 없나 하고 여기 저기 둘러보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뭐라도 생각하게 된다는 거야. 무심코 나뭇가지를 쳐다보고 있다가 보면 왜 한쪽 면은 잎사귀가 풍성하게 개수가 많고 크기도 큰데 한쪽은 왜 성긴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고, 장독대 뚜껑을 열어보고 할머니는 왜 간장에다가 먹지도 못할 숯을 띄워 놓으셨는지 궁금할 수도 있는 것처럼 심심하다보면 평소에 관심이 없던 일도 한번 들여다보게 될 기회가 생긴다는 거지. 하지만 핸드폰에 심하게 빠져있는 언니오빠들은 적어도 심심할 겨를은 없어 보여. 옆에서 보면 무슨 그리 중요한 메시지가 밤새 와 있는 건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뭔가를 열심히 확인하고, 길을 걸으면서도 뭘 보고, 친구와 심지어 가족과 밥을 먹으면서도 들여다보고 있고, 자기 전까지 뭔가 메시지 같은 것을 입력하면서 히죽거리고 있잖니. 책을 읽다가도, 공부를 하다가도, TV를 보다가도 수시로 핸드폰을 확인하고. 틈만 나면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자체가 좋은지 나쁜지를 따지기 전에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우리 주변이든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어진다는 것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뿐만 아니라 그런 현상과, 변화와,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지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생각할 시간은 정말 없을 것 같아.   

 학교 공부 이외에도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왜 그럴지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생각도 정리되고, 사고력도 길러지고, 창의력도 생겨날 거라고 생각되는데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보다 보면 이런 것들을 할 절대적 시간이 없어질까 봐 아빠는 그게 걱정스러워. 더 두려운 것은 스마트폰을 즐겨보는 아동들의 경우 장난감이든, 풍선이든, 동화책이든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고 오직 스마트폰과 게임에만 관심을 보이더라고. 스마트폰만 평생 보고 살 수는 없잖니. 그게 걱정되어서 말이야.     


◆보여주기

 어떤 사람이 사진 속에 있는 꽃은 진짜 꽃답지 못하다, 진짜 꽃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읽은 적?)이 있어.(출처는 잘 기억이 안나.) 사진 속의 꽃은 늘 싱그럽고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거야. 가까이 다가가서 직접 꽃을 살펴보면 간혹 사진 같이 말쑥한 꽃들도 있겠지만 우선 약간 구리구리한 흙냄새와 거름냄새가 나기 일쑤고, 몇몇 잎사귀는 벌레 먹은 자국이 있고, 몇몇 꽃잎들은 시들어 있고, 땅에 근접한 줄기나 잎사귀에는 물을 줄때나 비가 올 때 튄 흙이 묻어 있고, 여기저기에 벌레가 붙어 있거나 벌,

파리 등이 주위를 날고 있어서 사진처럼 말끔하고 멋지지만은 않다는 거야. 그래서 사진 속의 꽃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진짜 꽃과는 거리가 있다는 요지의 말이었던 것 같아. 

 SNS에 올라와 있는 다른 사람의 삶의 모습 역시 이런 꽃 사진처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실제 모습을 그대로 담아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 부끄러운 얘기, 알리고 싶지 않은 얘기, 약점이 될 만한 얘기 보다는 행복해 보이는 모습, 사랑받는 모습, 지적 사유의 명석함이나 문학적 감수성이 묻어나는 글들을 내보이게 되기가 쉬울 것 같아. 사시사철 변함없이 탐스러운 꽃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내 집 창가에 놓인 좁은 화분에서 열심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애쓰며 자라나는 식물들의 모습을 보고 ‘얘들은 왜 이렇게 초라할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처럼, SNS 올라와 있는 타인의 엄선된 번듯한 삶을 보면서 행여라도 내 삶이 ‘후지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정말 어리석은 일일 것 같아. 우리가 아름다운 꽃의 사진을 보면서 저건 저 꽃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보기 좋은 한 때의 모습이려니 하고 기분 좋게 한번 감상하고 넘기는 것처럼, SNS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접할 때도 그냥 좋을 때 찍었나보다 하고 가볍게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빠도 하윤이 어릴 적에 SNS를 잠깐 한 적이 있었어. 하윤이랑 놀았던 얘기들을 사진과 함께 올렸더니 사람들이 예쁘다, 재밌었겠다며 댓글도 달아주고 좋아요도 눌러 주더라고. 무척 신이 나고 뭔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 구독자들이 생긴듯한 느낌이 들더라. 용기를 얻어 한 번 더 올렸는데 더욱 뜨거운 반응(아빠 생각에는)이 돌아왔고 좋아요를 헤아리고 댓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더라고. 그런데 몇 번 더 올리니까 별 반응이 없더라. 아마 내용이 재미가 없어서 일수도 있고 사람들이 바빠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왠지 모르게 속이 상하더라고. 이유와 상관없이 뭔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더라. 유쾌하지 못한 기분에 잠겨 있다가 문득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인데, 그걸 굳이 SNS에 올려서 남들 좋아하면 더 좋아하고 남들이 무관심하면 속상해할 이유는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 뒤로는 SNS를 잘 하지 않고 있어. 그리고 생각했어. 이런 거 할 시간에 하윤이랑 좀 더 노는 게 낫겠다고. 육아 프로그램을 볼 시간에 내 아이, 내 조카, 내 동생 한 번 더 안아주고 놀아주는 게 좋은 것처럼, 남의 인생 들여다볼 시간에 내 인생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프로필 사진, 배경사진도 무척 흥미로워. 에펠탑 앞에서, 유럽의 중세 건물 앞에서, 미국 유원지에서, 혹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업이 드러나게, 또 어떤 사람은 자식의 대학교 마크를 가져다가, 값비싸 보이는 음식으로, 공연장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그 연출이 참 다양해.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난 이런 사람’ 그러니까 ‘이런 데 가본 사람, 이런 거 해본 사람, 이런 거 먹어본 사람, 이런 걸 가졌거나 이룬 사람’이라고 ‘보여주고인정받고부러워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좀 들어있지 않나 싶어. 앞에 자존감에서 다루었던 ‘인정’이라는 관점에서 별로 권장할 만한 구조는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역시 한번 보고 넘기고, 스스로도 여기에 시간과 열정을 너무 쏟지 않았으면 하고 얘기해주고 싶었어.       


◆눈 맞추고 얼굴 보고 싶다.

 왼쪽 사진은 요즘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잖니. 더 많이 본 장면은 부모님은

고기를 굽거나 음식을 먹기 좋게 손질하거나 서로 대화하는데, 자식들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풍경이지. 아빠는 스마트폰이 유용하다고 생각들 때도 많지만 밉다고 생각될 때도 많이 있어. 하윤이도 크면 가정을 꾸릴 테지. 위 두 사진 중에 어떤 모습이 좋아 보이니. 엄마아빠도 노력할 테니 함께 노력해보자. 진짜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은 ↓이거 알지? ㅋㅋㅋ 


◆꼭 지금 확인해야 하나, 꼭 지금 답장해야 되나.

 오붓하게 모여 앉아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순간, 먹음직스런 요리를 만들어서 맛있게 먹고 있는 순간에 별안간 띵동, x톡 등의 스마트폰 수신음 소리가 울려 퍼져. 이 소리는 받는 당사자가 어떤 상황인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울리기 때문에 때로는 원치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거야. 소리가 울리면 적지 않은 스마트폰 주인들은 기계적으로 하던 일을 중단하고 휴대폰을 집어 들고 그 내용을 확인하지.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 내려놓고 하던 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간단한 답장을 하는 경우, 뭔가 찾아서 좀 길게 대답을 해줘야 하는 경우, 혹은 통화를 하는 경우도 있을 거야. 

 예전에 아빠가 친구들과 어울려서 당구장에서 당구를 칠 때 싫어하는 친구 유형이 하나 있었어. 자기 차례에 치고 나서 남들이 치는 동안에 그걸 지켜보지 않고 계속 TV를 보거나 다른 곳에 한 눈을 파느라 제 차례가 돌아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아이들이 “야! 네 차례야.”하면 “어 그래?”하고 치고 또 다른 아이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야! 네 차례라고.”하면 “어. 알았어.”하면서 치는 식이어서 아빠 생각에는 그 친구가 당구를 치러 온 건지 시간을 때우러 온 건지 알 수가 없고 같이 치면 김이 새면서 당구도 재미가 없는 거 같더라고. 당구를 이긴다고 뭐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이번 것만 잘 치면 내가 유리해지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이렇게 이렇게 저렇게 저렇게 하면 우리팀이 이길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 그게 무엇이 되었건 ‘몰입’하는 순간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진짜 재미를 느끼게 되는 거라고 아빠는 생각하거든. 그런데 그런 친구가 끼어 있으면 좀체 집중이 안 되고 재미가 없더라고. 그런데 이 스마트폰으로 오는 연락들은 우리가 하는 일의 ‘연속성’과 ‘몰입’을 끊는 면에서 굉장히 막강한 힘이 있어.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끼어들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옆에 두고 진득하게 공부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몰입해서 책을 읽기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도 힘이 드는 것 같아. 우리가 대면해서 하는 대화도 이것에 의해 많이 방해를 받고 말이야. 

 아까 위에서 얘기했지 뭔가 수신음이 울리는 순간 즉각적, 기계적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확인하고 반응한다고. 꼭 그래야만 될까? 생명이 위독한 환자 후송에 대응해야하는 응급의료상황실, 강력 범죄로부터 시민을 보호해야 하는 경찰상황실 같은 곳이야 항상 긴장한 상태로 비상호출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만, 우리가 받는 연락 중에 그렇게 급한 것이 얼마나 될까? 아마 사람마다 하는 일의 성격,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의 수, 자녀의 연령 등에 따라 메시지의 총량과 중요한 것의 비중에 큰 차이가 있겠지만, 아빠의 경우에는 언젠가 차분히 따져보니 그다지 중요한 메시지가 많지 않고 꼭 지금 확인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더라. 그래서 가급적 퇴근 후나 주말, 특히 하윤이, 엄마랑 같이 있는 시간에는 전화가 아니면 핸드폰의 울림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사실은 친구가 별로 없어서 오는 연락이 별로 없기도 해. ㅠㅠ). 하윤이도 그냥 무심코 사용하기보다, 언젠가 받는 연락들을 찬찬히 한번 살펴보고 꼭 매번 확인해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고 중요하지 않은 대화방이나 메시지 발신처들에 대해서는 무음처리하거나 시간을 정해놓고 한 번 씩 확인하는 방법을 사용해 보는 건 어떻겠니? 최소한 핸드폰을 옆에 두고서는 공부나 책읽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만은 명심하도록 해라. 

 하윤이가 누구랑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지나가는 다른 애랑 계속 얘기하면 기분이 좋지 않겠지? 아빠는 다른 사람과 대화 하고 있는 도중에 핸드폰으로 뭔가를 중간 중간 계속 보는 행동이 그런 경우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했어. 사실은 나와 먼저 얘기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하윤이가 큰맘 먹고 아빠에게 무언가 얘기하러 와서 말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중간 중간 핸드폰으로 뭔가를 확인하면 기분이 어떻겠어. 적어도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을 거 같아. 이제 우리, 멀리 떨어져 있는 온라인상에서 그저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일보다, 지금 내 앞에 함께하고 있는 친구, 가족과 현재 나누고 있는 일에 더 충실하고 집중해 보기로 하면 어떨까?     


◆눈, 목의 건강

 작은 글씨를 읽기 위해 사물을 더 멀리하거나 안경을 벗어야 되는 엄마아빠의 고충을 알고 있지? 노안이라고 하는 증상이잖아. 그런데 젊은 사람들 중에도 스마트폰을 너무 과도하게 하는 사람들 중에서 시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거나 노안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해. 우리 속담에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어. 그만큼 우리 몸에서 소중한 기관이라는 뜻이겠지. 스마트폰의 특성상 밝은 곳에서도 쨍한 화면을 연출하기 위해 과도하게 밝은 빛이 나오는데 이걸 오래 보면 당연히 눈에 좋지 않을 것이고 어두운 곳에서 보면 더욱 좋지 않겠지. 또 걸으면서, 흔들리는 차 속에서 보면 더욱 눈을 피로하게 하는 요인이 될 거야. 보더라도 어둡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좋은 환경에서 길지 않게 사용하도록 해라. 생각보다 빨리 눈이 잘 안보이게 되어서 아빠도 처음 노안이 왔을 때 깜짝 놀랐어. 앞으로 70년 이상 써야 할 소중한 눈이니까 하윤이는 슬기롭게 아껴 써.
  목이나 목 아래가 아프다고 하는 분들 중에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을 해서 그렇게 된 분들이 적지 않아. 그래서 그렇게 하시면 목이 아프고 목뼈 건강에 좋지 않으니 좀 덜 하세요 라고 했더니 그 다음번엔 팔이 아파서 오셨기에 어떻게 되신 건지 물어보니 목이 아파서 드러누워서 핸드폰을 들고 봤더니 이번에는 팔이 아프다고 한 분도 있었어. 두 손으로 들고 메시지를 많이 보내서 손목이나 어깨가 아픈 분도 있었고. 언제 한번 스마트폰에 아무 화면도 나오지 않게 한 상태에서 평소에 사용하는 자세로 들고 있어봐. 아마 아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목이나 팔이 아픈 걸 느끼게 될 거야. 그런데 뭔가를 보다보면 그 내용과 재미에 빠져서 몸이 통증을 호소할 정도로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걸 모르게 되는 거야. 스마트폰을 한참동안 신나게 보고 있는 중에 통증을 느끼게 된다면, 그건 이미 몸에서 지금 너무 심하게 사용하고 계시니 좀 쉬어주세요 라고 아우성을 친지가 한 참 지난 후일 거야. 처음에는 근육통 형태로 시작되지만 정도가 좀 더 심해져서 어깨나 팔이 저리면 심각해지는 거니까 사용할 때도 고개를 너무 숙이지 말고 바른 자세로 길지 않게 사용하도록 해.     


◆사생활 보호와 안전

[SNS ‘사진 태그’ ‘위치정보’는 해커의 ‘먹이’]

(2021-06-13, 한겨레신문)

 ‘....특히 최근 해커들은 인공지능과 소프트웨어 도구를 이용해 소셜미디어 계정을 빠른 속도로 검색해 필요 정보를 찾아내고 프로파일링한다. 피싱 사기범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피해자가 최근 방문한 장소와 옷차림을 묘사하며 접근하면 사기에 넘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인공지능이 대상자가 ‘좋아요’과 ‘공유’를 누른 정보를 분석하면, 손쉽게 취향도 파악할 수 있다....’

https://www.hani.co.kr/arti/science/future/999171.html?_fr=mt6     


 짧은 SNS 경험을 되짚어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매우 친하고 실생활에서도 자주 만나는 사람들만을 친구로 맺어 소식을 공유했던 것 같아. 그러다가 우연히 연락이 닿거나 친구 추천기능에 의해 전에는 잘 알았으나 요즘은 자주 못 만나게 된 사람들도 친구목록에 추가되고, 그 다음은 전에도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었고 지금도 만나지 않는 사람들까지 확대되고, 나중에는 알기는 알지만 만난 적은 없는 사람으로까지 넓어지고, 좀 더 지나서는 친구 추천 기능에 의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알지는 못하지만 같은 직장이나 학교를 다녔던 사람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던 것 같아. 

 넓고 편리한 소통을 위해 SNS를 한다는 취지에는 맞지 않지만, 위 기사에서 우려하는 사생활 보호와 안전의 개념에서 생각해 볼 때는 친구추가에 어떤 기준이나 안전장치를 좀 마련하면 어떨까 싶어.      

  ■아래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안전할 것 같아.

     -실생활(off-line)에서도 자주 만나는 잘 아는 사람.

     -직접 전화번호를 주고받거나, 내 번호를 알려줘도 된다고 동의한 사람

     -만나거나, 직접 통화하면서 SNS 친구를 맺기로 동의한 사람
   ■아래 사람들은 다른 연락 없이 SNS상에서 처음 먼저 연락이 온다면, 해당 SNS가 아닌 다른 연락방법 

      즉 만나거나, 직접 전화를 하거나, 상대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해서 확인을 하고 추가를 하면 

      어떨까 싶어 

      -SNS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사람. 
      -자동 추천기능에 의해 추천된 사람
      -친구의 친구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

      -그러면서 돈을 빌려달라거나, 물건을 구매해달라는 등의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더욱 신중.

 아빠 생각에는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너무 많은 정보를 많은 사람이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SNS에 올리는 자체가 좀 께름칙한데 그래도 많이들 하니까, 하윤이도 알맞은 수준을 한번 잘 생각해봐. 알겠지?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이동수단도 부를 수 있고, 영화, 배달 등 많은 편리함을 주지만, 슬기롭게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 생각의 성장에, 자존감에, 가족관계에, 몸의 건강과 안전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말 그대로 smart하게 사용해야 해.     


◎구경하지 말고, 직접 하자.

 여유로운 토요일 저녁에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TV를 켜서 자주 찾는 채널에서 하는 재미난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놓고 저녁식사를 시작한다고 해보자. 음식도 맛나고 프로그램도 얼마나 웃긴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음식과 TV를 즐기다 보니 1시간이 훌쩍 넘겨 지났고 식사도 프로그램도 끝난 상태가 되지. 배도 어느 정도 찼고 했으니까 간단히 식사한 것을 치우고 후식으로 넘어가 과일과 쿠키, 차 등을 준비해서 그 맛을 음미하며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보니 이번에는 다른 채널에서 연애 프로그램(용어가 맞는지 모르겠네. 여럿의 남녀가 나와서 서로의 호감을 확인해서 짝을 맺어가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여자 출연자는 모두가 참 단아하니 아름답고 남자 출연자는 어디서 이런 훈남들만 가려서 뽑아왔는지 화면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선남선녀가 내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어 넋을 빼놓고 보다가 프로그램이 끝나는 바람에 아쉽게도 현실로 돌아올 때 즈음이면 벌써 또 한 시간이 지나고 후식도 마친 셈이 되겠지. 이제부터는 접시들도 옆으로 살짝 밀어 놓고 본격적인 채널 여행을 시작해 보면 귀여운 아이들이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 오지로 여행을 떠나 현지에서 먹고 자고 하는 탐험 프로그램, 엄청난 양의 맛난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먹방 프로그램 등 채널을 돌리며 제대로 본 것도 아니고 그냥 잠깐 잠깐씩 말 그대로 맛보기만 했는데도 또 한 시간이 훌쩍 지나지. 이렇게 근 3시간을 넘게 TV를 보았지만 모처럼 만의 저녁시간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이런저런 골치 아픈 생각들도 다 내려놓고 무념무상으로 느긋한 시간을 보냈더니 스트레스도 좀 풀리고 매우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이런 시간을 일주일에 몇 회, 한 달에 여러 주, 수년에 걸쳐 갖는다면 어떨까? TV를 너무 많이 보면 좋지 않다는 뻔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 시간들은 다 합쳐 보면 TV 앞 몇 미터 거리에 앉아서 그 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와서 놀이도 하고, 아이도 키우고, 연애도 하고, 요리도 하고, 운동도 하고, 여행도 하고,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하는 것을 내 인생 전체 중에 몇 년을 들여서 구경만 하는데 쓰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들었어. 살면서 직접 해봐야 할 것들, 직접 부딪히고 경험해 봐야할 다양한 관계와 상황들, 그 속에서 느껴봐야 할 다양하고도 복잡 미묘한 감정 체험들을 TV 속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이 나대신 다 해주고 나는 그 앞에 앉아서 구경만 하는 처지가 되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야. 실제로 나는 해보고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남이 뭘 하는지를 황금 같은 내 인생의 수년을 들여서 구경만 하는데 쓴다는 것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

 TV 많이 보지 말라는 틀에 박힌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구경하지 말고, 직접 내가 해보자.”는 말을 하고 싶었어. 구경하는 건 여러 가지 장점이 있긴 해.    

  

   ➀잘 할 수 있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그들은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나보다 그럴싸하게 잘하거나 재미있게 할 거야. 운동하는 자세도 멋지고, 몇 분 만에 뚝딱

    요리를 만들어 내고, 수다건, 탐험이건 아주 멋들어지게 해낼 거야. 

   ➁내가 직접 해야 하는 번거로움, 수고로움이 없을 거야. 요리를 하기 위해 재료를 사러 갈

     필요도 없고, 탐험지를 알아보고 섭외할 필요도 없고, 게임에 필요한 각종 시설과 소품을 

     준비할 필요도 없고, 카메라엔 잡히지 않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육아노동, 가사노동을 내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➂실패에 대한 부담이 없을 거야. 경기나 경연을 해도 우승자를 축하해주고 탈락자를 

     측은하게 생각해주면 그만이지 우선 그게 내 일이 아니고, 요리를 망칠 일도 없고, 데이트 

     상대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거절당해도 그 민망함이 부끄러움이 내 몫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④감정적인 부담도 없을 것 같아. 좋아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뭐라고 고백해야 되나 

    가슴 졸이고 거절당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우는 아가가 어디가 불편한지를 알아내지

    못해 애를 끓일 필요도 없고, 승부의 기로에서 숨이 막히는 긴장감에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야.      


 이런 많은 장점들이 있지만 내가 그 일의 전체적인 부분을 오롯이 다 경험할 수 없다는 점, 무엇보다 내가 직접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구경’하는 입장에 머무르게 될 뿐일 거야.  

 ‘비오는 날은 부침개지.’라고 호기롭게 외치며 주방에 들어서서 양푼에다 밀가루와 부침가루를 황금비율로 섞어 넣고 신 김치를 송송 썰어 넣은 다음 김치 국물을 알맞게 넣은 후 간을 봐. 좀 짠 거 같아서 물을 붓고 다시 간을 봐. 싱거운 거 같아. 다시 밀가루와 김치를 좀 더 넣어. 너무 된 것 같아서 물을 넣어. 몇 번을 반복했더니 동네 사람을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어머어마한 양의 반죽이 내 앞에 놓여 있어. 괜찮아. 양은 좀 많아도 돼. 맛있으면 그만이니까. 자 이제 부치기만 하면 된다. 부쳐. 먹어봐. 그냥 밀가루 반죽에 소금을 넣고 부쳐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싶은 해괴한 맛이 나. 나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극구 맛을 봐. 몇 번 씹다가 욱하고 뱉어내더니 날 한심한 듯 쳐다보며 비웃어. 가족들의 따가운 눈총을 뒤통수에 받으며 그 아까운 반죽들을 다 버리게 되더라도 내가 직접 한번 해보는 거야. 
  분명히 육아프로그램에 나온 아이들은 방글방글 잘 웃고, 잘 먹고, 잠도 천사처럼 쌔근쌔근 잘 자기에 그런 줄만 알았는데, 저녁 잘 먹이고 씻기고 불 끄고 옆에 누워서 자장자장 100번을 해주고 나오려고 했더니 더 해달라고 해서 200번을 더 해주고 잠든 것 같기에 눈앞에서 손을 몇 번 흔들어보고 반응이 없기에 자는 것 같아서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 나오려는데 “아빠 어디가세요?”,“어? 아 아니 여기 모기가 있는 것 같아서.” 쓸데없는 헛손질을 공중에 두어 번 하고 다시 누워서 자장자장 300번을 더 해서 불 꺼진 껌껌한 어둠 속에서 장장 1시간 반 동안 총 600번의 자장자장을 해주고 안방에 돌아와 쓰러져 잠들고, 저 입속에 밥은 왜 저렇게 안 넘어갈까를 생각하며 1시간 동안 밥을 먹이고 회사에 가서 일하다가 소매에 붙은 말라붙은 밥알을 떼어내고 스웨터 앞섶에 붙은 멸치며 계란조각을 떼어 내며 내 옷에 참 먹을 거 많구나 생각도 해보고, 제비처럼 종알대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던 녀석이 감기에 걸려서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온몸이 열이 끓어 축 늘어져 있는 놈에게 못 먹겠다는 약을 달래서 간신히 먹이고 밤새 거즈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온몸에 발라주느라 애가 타고 가슴이 아프더라도, 아이를 낳고 긴 시간을 부대끼며 살면서 울고 웃으며 많은 시간을 보내 보자. 
  나는 지금 몇 년째 던졌다 하면 개만 나오는 사람이지만 그 긴 멸시와 천대의 세월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번에도 평소처럼 개만 나오면 상대방이 세 개 업어놓은 말을 잡아서 나는 명예를 되찾고 우리팀이 이기게 된다. ‘자 평소처럼 던지면 되는 거야. 평소처럼. 침착하게.’ 심호흡을 몇 번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던지고 싶은데 심장이 벌렁벌렁 더 심하게 뛰어서 도무지 안정이 잘 되지 않는다. ‘개만 나오면 돼, 개만. 자 하나, 둘, 셋’ 던졌다. 윷가락 두 개는 엎어져 있고 하나가 배를 보이고 있으니까 저 굴러가는 윷가락 하나가 배만 보이면 되는데 구르다가 구르다가.. 아 그만 엎어지고 만다. 도다. 우리 편 사람들이 벌레 씹은 얼굴로 레이저를 쏘며 갖은 험한 말로 날 비난한다. ‘형님은 맨날 개만 하던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첩자야 뭐야.’, ‘발로 던져도 그것보단 낫겠다. 에이 진짜.’ 상대편 사람들은 지붕이 날아가고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꺄~~~악 소리를 지르고 손바닥을 마주 부딪치면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터질 듯하던 심장박동은 온데 간 데 없고 빨리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생각뿐이다. 이긴다고 금은보화가 생기는 것 아니고 진다고 큰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닌 심심풀이 경기일 뿐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보자. 그래야 내가 직접 경험하는 심장 떨리는 재미난 경기가 되니까.

 남들이 TV에 나와서 수다 떠는 걸 구경하지 말고 내 썰렁한 개그에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도 자꾸 어울려 수다도 떨어보고, 재미난 게임 몇 번 구경했으면 친한 친구들 모아서 한번 해보고, 관심 있는 운동이라면 매번 구경만 할 게 아니라 장비도 사고 친구들도 모아서 한번 해보자. 그러면서 ‘이게 요리구나, 이게 박진감이구나, 이게 여행이구나, 이게 내가 진짜 내 삶을 살아가는 거구나.’ 하고 더 많이 느껴봤으면 좋겠어. 멋있다 흉하다, 잘 한다 못 한다, 재주가 좋다 없다를 떠나서 그냥 그게 진짜 내가 스스로 내 삶을 사는 거니까.

  ‘말 타고 꽃구경 (사물을 자세히 못 보고 설쳐 대며 대강대강 훑어봄을 이르는 말)’이라는 표현이 있어. 말 잔등에 올라타 앉아있으면 직접 다리에 힘을 주고 걷지 않아도 말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니 힘들지 않아서 좋겠지만 말의 움직임에 따라 내 몸도 흔들리고 꽃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으니 그 상태로 꽃구경을 제대로 하기는 어려울 거야. 신발에 흙이 좀 묻고 거름 냄새가 코를 좀 괴롭게 하더라도 안락한 안장에서 내려와 꽃밭 깊숙이 들어가 꽃 앞에 가까이 다가가서 본다면 예쁘고 밉고를 떠나서 진짜 꽃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더 제대로 된 꽃구경을 할 수 있을 거야. 구경만 하지 말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몸으로 부딪히면서 직접 해보는 거야.  


◎정치에 대해. (20세 이전)

◆왜 중요한가?

 옛 한의학 책에 ‘소의치병 중의치인 대의치국(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 :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고, 큰 의사는 나라를 치료한다.’ 이라는 말이 있어. 좋은 의사는 몇몇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지만, 좋은 정치인은 사회와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다양한 부조리와 병폐 등 사회적 질병을 고쳐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넓게 보아 대의(大醫)에 해당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하겠어.  

 어떤 동네병원에 좋은 의사가 있으면 그 지역의 많은 주민들의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듯이, 우리가 사는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어떻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런 적임자를 잘 가려낼 수 있을지에 대해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틈틈이 공부해 두어야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훌륭한 정치지도자를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는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고, 사회집단들 간에는 어떤 갈등이 있는지, 세대별·지역별로는 어떤 고민과 요구가 있는지 등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으며 그를 위해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     


◆일찌감치 편 가르기에 동참하면 더 이상의 배움은 없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같은 반 아이들처럼 한 무리의 아이들을 둘로 갈라서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혀 놓고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고 해. 처음에는 그냥 이전과 변함없이 생활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같은 색끼리 뭉치는 경향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서로 다른 색의 옷을 입은 친구들 간에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하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더라는 거야. 뭔가 편을 갈라놓으면 자기들끼리는 뭉치려고 하고 자기와 다른 상대를 배척하려는 경향이 생기는 모양이야.     

 미국에서는 얼마 전부터‘두 개의 미국’이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그걸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잖게 나온다고 해. 빨간색의 공화당과 파란색의 민주당으로 사람들의 정치 지향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의 가치관, 생활양식, 전통을 중시하는 마음, 애국심 등등을 가지고 언론과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쌓여서 이제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나뉘어서 사는 미국처럼 보이는 현상을 우려하는 말이라고 해. 빨간색 주라고 해서 공화당 지지자만 사는 것도 아니고 파란색 주라고 해서 민주당 지지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섞여서 어울려 살아가고 있을 텐데도 자신과 같은 색깔의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덮어놓고 좋은 생각을 가진, 미국을 걱정하는 애국자라고 맹목‘([盲目] : 앞뒤를 가리거나 사리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적으로 신뢰하고, 자신과 다른 색깔의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반자라기보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가진, 미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장애물이라고 생각해서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언론을 통해 보도되곤 한다고 해. 우리나라에도 이런 비슷한 편 가르기가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그럼 이런 식의 맹목과 혐오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될까?

 어느 날 아빠가 야구를 보면서 ‘우리 팀 이겨라. 상대팀 져라.’ 하고 응원을 하고 있는데 문득 이게 정치를 바라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숙명의 라이벌인 야구팀 A와 B가 있다고 해보자. A팀 팬들은 B팀이 매번 승부의 길목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 성가신 존재이고, 그 팀 선수들은 개인사도 지저분하고 플레이도 더티(dirty)하고, 정말 진정한 야구를 하는 구단이라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에,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저런 팀은 없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런 B팀에게 우리 야구팀이 졌다고 해보자. 굉장히 속상하고 화가 나겠지. 그렇다고 B팀 팬과 치고 박고 싸워본들 B팀 전력이 약화되거나, B팀이 없어지거나, 우리 팀 전력이 더 강해지거나, 한국 야구가 발전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거야. 같은 이치로 각자 백날 자기 팀이 이기라고 죽어라 응원하고 상대팀을 저주해 봐야 리그의 흥행은 더 되고 고정 팬이 많아져 선수들의 인기와 구단의 인기는 더욱 공고해지고 구단의 입장수입을 올라가겠지만, 한국 프로야구 전체가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을 위하는 목적으로 운영되는지, 시즌의 진행과 각 구단의 운영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정말 야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팬들을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애쓰는 선수들이 중용되는지, 협회와 구단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팬심을 이용하거나 승부를 조작하는 경우는 없는지와 같은 한국야구가 전체적으로 더욱 발전하고 성숙해지도록 하는 문제는, 오히려 각자의 구단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좀 거두고 눈을 크게 뜨고 야구계 전체를 둘러보며 문제점을 고쳐나가고 감시할 때 더 다가갈 수 있는 목표가 아닐까 싶어.   

 엄마, 아빠의 정치 성향을 따라서, 혹은 즐겨 보는 뉴스나 SNS, 동영상채널 등에 나오는 진행자의 의견을 듣고, 너무나 분명하게 어느 한 쪽이 맞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거야. 그게 정말로 맞을 수도 있고. 하지만 분명히 경계해야 할 점들이 있어. 양쪽 당사자 중에 한쪽 얘기만 들어보면 그 말이 다 맞는 것처럼 들리고, 같은 야구팀 팬들과 얘기를 나누면 내 생각에 틀린 것이 하나 없는 것처럼 보이듯이 너무 일찍부터 한쪽 의견만 듣다보면 한쪽은 너무 당연한 얘기이고 한쪽은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려서 갈수록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되고 전체를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야. 또 편을 갈라서 하는 논쟁은 처음에는 이성적인 명분도 있고 논리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적인 비난과 혐오로 흘러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따지기에 바빠서 정작 우리 사회에 필요한 논의가 무엇인가 하는 핵심과 본질을 놓치게 만드는 우려도 있을 수 있을 거야. 또 하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의 문제야. 편을 갈라서 하는 설전을 보면 정말 일반 사람들 사이에 저런 얘기가 오가면 어떻게 될까 싶은 험한 말, 모욕적인 말도 많고, 상대를 이 사회에서 함께 공존할 수 없는 마치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인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도 많은데, 상대가 나와 다른 주장을 하더라도 사회가 용인되는 방식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진행 한다면 그것을 이유로 그 사람을 차별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원칙을 잊게 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해. 


◆시간이 많으니 쉽게 단정 짓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많이 경험해보자.

 그러니 뉴스를 보거나, 동영상 서비스를 검색하며 진짜 어느 편이 맞는 건지 알아내느라 애쓰지 말고, 대신에 지금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해 볼 수 있는 것들을 경험해보면 어떨까 싶어. 

 모둠 활동, 동아리 활동, 학생회 활동 같은 것들을 열심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하면서 사람들마다 생각이 얼마나 다르고 원하는 바는 어떻게 다른지,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뜻을 모으고 결정을 내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크고 작은 모임의 대표나 운영진이 되어 그 모임의 목적에 부합하면서 구성원들도 만족하는 방향으로 운영해 나가려면 어떤 원칙과 절차가 필요한지 등에 대해 공부해 보면 좋을 것 같아.

 봉사 활동이나 시민 참여 활동 등을 통해서 가급적 다양한 직업과 계층과 지역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그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해 들어보고 그 사람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틈나는 시간에 정치란 무엇이며 각 나라의 정치현황에는 어떤 특색이 있는가 등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읽어 보는 것도 아주 좋을 것 같고, 각종 사회 현상을 다룬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어떤 기자분이 쓴 글 중에 자신에게 오는 이메일 중에 욕설이 담긴 글 치고 더 발전적이고 도움이 되는 글은 없더라는 내용이 있었어. 편을 갈라서 시비를 따지는 비난 가까운 내용은 되도록 멀리하고,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부터 찬찬히 하나씩 공부해 간다고 생각해 보자.       


◎정치에 대해. (20세 이후)

◆바뀌기 힘들다.

 확증 편향(確證偏向, 영어: Confirmation bias)은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이다. 흔히 하는 말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와 같은 것이 바로 확증 편향이다. 인지심리학에서 확증 편향은 정보의 처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지 편향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간절히 바랄 때, 또는 어떤 사건을 접하고 감정이 앞설 때, 그리고 저 마다의 뿌리 깊은 신념을 지키고자 할 때 확증 편향을 보인다. 확증 편향은 원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모으거나,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주장할 때 편향된 방법을 동원한다.                                                                                                  [위키백과]     

 Selective exposure is a theory within the practice of psychology, often used in media and communication research, that historically refers to individuals' tendency to favor information which reinforces their pre-existing views while avoiding contradictory information. Selective exposure has also been known and defined as "congeniality bias" or "confirmation bias" in various texts throughout the years. 

(선택적 노출은 심리학 실제 분야의 한 이론으로, 미디어 및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자주 사용되며, 역사적으로 기존 견해와 모순되는 정보를 피하면서 기존 견해를 강화하는 정보를 선호하는 개인의 경향을 가리킨다. 선택적 노출은 수년 동안 다양한 텍스트에서 "동일성 편향"또는 "확증 편향"으로 알려지고 정의되어왔다.)

                                                                                                                     [Wikipedia]

 태평양전쟁의 일본군이나 피그만 침공 등의 실패에 대해 실패 당사자들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정보 상으로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수준이라는 내용이 상당수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다른 기록을 보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명확한 정보가 수두룩한 상태였다. 또한 기업가들은 최선의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기 위하여 최신의 경영 시스템을 활용하는 게 아니고, 자신이 선호하는 마케팅 전략이 옳다는 것을 증명 받고 싶어서 최신의 경영 시스템을 활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자신과 의견이 유사한 다른 논객들과 많은 교류를 나누고 모임을 하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만남을 최소화한다.

                                                                                               [나무 위키 – 확증편향. 2.설명] 

    

 정치에 대해 얘기한다고 하고선 왜 엉뚱하게 복잡한 용어 설명을 하느냐고? ㅎㅎㅎ. 아빠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리 저리 신문도 읽어보고, 책도 읽어 보고,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어 보고 해보았는데 결국에는 ‘확증편향’이라는 단어에 도달하게 되더구나. 아빠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정치에 관해서는 새로운 사건이 생겨나거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될 때, 동일한 사건과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기존 입장이 강화되는 결과에만 도달하지 그게 바뀌는 경우는 좀체 없더라고. ‘A라는 정치인이 어떤 행동을 했다.’는 동일한 사실을 보게 되었을 때, 그 정치인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는 행동이라고 하고 다양한 정보 중에 그 사람의 결백을 입증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찾아보고 기억한 후 법적으로 유죄가 선고되면 억울한 결과라고 하는 반면, 기존에 그 사람의 정치성향에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던 사람은 법적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일이며 범죄사실임을 입증하는 정보들을 줄줄이 꿰서 기억하고 있으며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가게 마련임)이라고 생각하는 식으로 위에서 설명한 확증편향의 성향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여.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대부분 바쁘기 때문에 사회, 국제, 문화, 성별 등에 대한 정치적 입장들이 쏟아져 나올 때 자기 스스로 그것에 대해 심도 있게 자료를 찾아 배경이 되는 사건이나, 역사, 이론 등에 대해 공부해서 내 입장을 정리하고 조정할 시간적·정신적 여유는 없는 반면, 그것에 대한 언론의 보도 들은 자극적(주목을 끌어 기사를 소비하도록 하기 위해), 단편적(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기사가 갈수록 더 짧아지다보니), 감정적(복잡한 사실관계에 대한 골치 아픈 이성적 설명보다 보다 직관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유도하기 위해)으로 역시 쏟아져 나오는데 그 마저도 세세히 살펴볼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신문의 제목들, 라디오의 한 토막을 보고 들은 후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부지런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출퇴근길에 틈틈이 라디오 좀 듣고 회사에서 짬짬이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사들의 제목과 기사 일부 정도를 읽으며 생활하다보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고치거나 하는 일이 생기기 힘든 게 어찌 보면 자연스런 모습인 것 같아 보여. 더욱이 인터넷과 AI기술이 발달한 요즘에는 한 사람이 어떤 정치관련 기사를 읽으면 AI(대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가치중립적이고 불편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례에 대한 보고도 많이 있단다.) 알고리즘이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파악해서 그 사람의 성향에 맞는 기사와 컨텐츠 위주로 계속 추천해 주기 때문에 기존 입장이 더 강화되는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도 있어. 

 정리해 보자면 사람들에게 원래 잘 바뀌기 힘든 경향이 있는데, 바빠서 시각을 바꾸어 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는데다가, AI 등에 의해 비슷한 내용만 보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기존 입장이 바뀌기보다 더욱 강화되기가 더 쉬운 구조인 것 같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정치 얘기를 굳이 하지 마라.

 확증편향에 의해 자기의 생각, 주장이 계속 강화되는 동안 정치적 지향이 반대가 되는 쪽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평가 역시도 점차 부정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처음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정도라고 생각하다가, 좀 지나면 정말 저게 맞다고 생각해서 저런 주장을 하는 걸까 의문이 들다가, 더 지나면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의도가 뭘까 하고 의심을 하다가, 결국에는 이성적 사고가 잘 되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좀 더 극단적으로 가는 사람의 경우는 상대를 잘못된 주장을 반복적으로 하는 정신병자, 거짓된 주장으로 일반 대중을 현혹시키고 우리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 나쁜 무리로 몰아가서 상대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고 우리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 

 상대방이 100%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내가 확신하는데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한 두 마디 들어보다가 잘못된(자기 생각에) 주장이 거듭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더 들어볼 것도 없이 당신의 생각은 틀렸다고 지적하거나, 내 생각이 맞다고 강변하거나, 그런 내 생각에 동의하도록 강요하기 십상일 것 같아. 서로가 상대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대화가 이성적인 토론으로 흘러가기보다 감정적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고 결국에는 자신을 강하게 비판(비난?)하는 상대에 의해 감정이 상하고 싸우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단다. 각자의 생각이 100% 옳다는 강한 확신이 있는 상태에서, 상대의 의견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들어보고 참고해야겠다는 목적도 아닌 상태에서 하는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그런 의미 없는 대화를 하다가 싸움까지 하게 된다면 그것처럼 안타깝고 비생산적이고 후회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싶어.

 어느 날 아빠가 야구를 보면서 ‘우리 팀 이겨라. 상대팀 져라.’ 하고 응원을 하고 있는데 문득 이게 정치를 바라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숙명의 라이벌인 야구팀 A와 B가 있다고 해보자. A팀 팬들은 B팀이 매번 승부의 길목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 성가신 존재이고, 그 팀 선수들은 개인사도 지저분하고 플레이도 더티(dirty)하고, 정말 진정한 야구를 하는 구단이라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에,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저런 팀이 없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이것들도 본인들의 선택적인 노출과 기억에 의한 것이겠지만)고 해보자. 그런데 그런 B팀에게 우리 야구팀 졌다고 해보자. 굉장히 속상하고 화가 나겠지. 그렇다고 B팀 팬과 치고 박고 싸워본들 B팀 전력이 약화되거나, B팀이 없어지거나, 우리 팀 전력이 더 강해지거나, 한국 야구가 발전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거야. 같은 이치로 각자 백날 자기 팀을 죽어라 응원하고 상대팀을 저주해 봐야 리그의 흥행은 더 되고 고정 팬이 많아져 선수들의 인기와 구단의 인기는 더욱 공고해지고 구단의 입장수입을 올라가겠지만, 한국 프로야구 전체가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을 위하는 목적으로 운영되는지 시즌의 진행과 각 구단의 운영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정말 야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팬들을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애쓰는 선수들이 중용되는지, 협회와 구단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팬심을 이용하거나 승부를 조작하는 경우는 없는지와 같은 한국야구가 전체적으로 더욱 발전하고 성숙해지도록 하는 문제는 오히려 각자의 구단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좀 거두고 눈을 크게 뜨고 야구계 전체를 둘러보며 문제점을 고쳐나가고 감시할 때 더 다가갈 수 있는 목표가 아닐까 싶어. 

 웬만하면 정치 얘기는 안하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라면 대화 참여자들 간에 아래 2가지가 전제가 선행될 경우만 제한적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1)내 생각이 틀릴 수 있고, 상대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열린 자세.     

 이는 유권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 당의 정책을 지지하는 유권자라면 그 정책을 지지하는 연구결과, 신문기사나 칼럼 등을 읽으면 당연히 그러하다고 느끼는 반면, 그 정책을 비판하는 연구결과나 기사 등을 읽을 때에는 불쾌감을 느끼거나 심지어(그 연구결과 등이 올바른 방식과 근거에 기초해서 나온 편향성 없는 결과라는 전제 하에) 덮어놓고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다.

 이는 흔히 우파 유권자들이 한경오(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오마이뉴스)를 신문 회사로 여기지 않으려 하고, 좌파 유권자들이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은 죽어도 읽지 않으려 하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논조의 신문을 나란히 놓고 교차검증을 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도전적인 정보를 본능적으로 꺼린다. 그렇기에 확증편향을 이겨내고 올바른 지적 성실성(intellectual integrity)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나무 위키 – 확증편향. 2.설명]

2)누가 맞는지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발전을 위해 보다 건설적인 생각을 도출하기 위한 생각의 교류과정으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야구가 우리 인생에 한 10% 정도의 관심사를 차지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우리 라이벌 야구팀 팬이라고 해서 100% 나쁜 사람이고 나와 같은 팀 팬이라고 해서 100%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정치에 대해서도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고 다 이상한 사람 아니고 같다고 해서 다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보는 게 맞지 않겠니? 정치의 중요성이 각자에게 몇 % 정도 된다면, 딱 그 정도만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할 것 같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 뉴스를 더 찾아보는 것보다 역사책을 읽는 편이 낫다.

 어린이, 청소년 들이 많은 어떤 동네에서 기초 의원을 뽑는 선거를 한다고 해보자. A후보는 본인이 당선되면 시행하겠다는 아동 친화적이 시설, 제도, 캠페인 등이 정책으로 잘 정리되어 있고 그 정책을 시행하는데 필요한 재원 조달 계획도 세부적이고 현실적으로 잘 수립되어 있다. 게다가 인물도 훤칠하고 말솜씨도 청산유수인데다 명문대 출신이어서 사람들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B후보도 아동을 위한 정책들을 내놓았는데 어딘가 투박해 보이는데 해 본 적도 있고 할 수 있다고는 얘기는 하지만 어딘가 좀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고 캠프에도 사람이 별로 많은 것 같지 않고 재원을 어찌 조달할지도 불분명해 보인다. 약간 유행에 뒤처지는 외모에 키도 작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지방대학을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A후보가 내놓은 좋은 정책과, 물 흐르는 듯한 언변, 세련되고 열정적인 모습에 반해 대세는 A후보 쪽으로 기우는 듯 했으나, 알고 보니 A후보는 과거에 아동친화적 정책에 반하는 주장을 계속 해왔던 사람이고 전과 기록이 허위인데 사실은 아동학대 전과와 사기 전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B후보는 뭔가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먹기 전까지 약 20여 년간 소리 없이 개인적으로 부모 없는 아동들을 돕고 시민단체에서 아동관련 사업에 헌신해왔다고 한다. 만약 처음부터 사람들이 두 후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면, 현재에 두 후보가 하는 주장과 정책의 우수성을 떠나 그 사람이 하는 말의 진실성과 의지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경마 저널리즘(horse race journalism, 경마식 보도 행태) 

 경마 저널리즘이란 선거보도 형태의 하나로 후보자의 공약이나 정책에 대한 심층적 분석보다는 득표 상황만을 집중 보도하는 것을 뜻한다. 공정한 보도보다는 단순히 흥미 위주로 마치 경마를 취재하는 기사처럼 오로지 누가 앞서고 누가 뒤지는가에만 집착하여 보도하는 것이다. 후보자의 성실성, 능력, 도덕성 등 자질이나 정책 이슈 같은 유권자의 선택에 필요한 본질적 내용보다는 후보의 득표 전략이나 득표율 예측, 현재의 우열에 대한 여론조사, 유세장의 군중 수, 정파 간 갈등과 공방전, 후보자 간 합종연횡 등 흥미적 요소를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마치 객석에서 경마를 구경하는 듯한 상황에 빠져들게 한다. 

                                                                                                                 [에듀윌 시사상식]

     

 이 용어는 선거 때 쓰는 단어이긴 하지만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보자면 평상시에도 비슷한 현상을 많이 목격하게 되는 것 같아. 언론의 보도를 보면 이런 식의 흐름을 더러 보게 되는 것 같아. 국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지켜져야 할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을 위반한 중대한 사건이 터져. 처음에는 이것이 가지는 의미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실로 심각한 일이라는 기사들이 좀 나와. 그러다가 좀 지나면 사실이다 아니다 당사자 간에 공방이 오고가고 이 사건은 어떤 사람의 제보에 의해 알려졌다는 뉴스가 나와.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제보자가 사실은 과거에 인터넷에 이상한 글을 올렸던 사람이고 전과도 있는 사람이라고는 풍문이 돌아. 그래서 그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해. 그런데 그 사람이 사건 며칠 전에 유력 정치인, 재력가 누구누구를 만났다고 해. 사실은 그 점이 더 문제이기 때문에 검찰에서 수사를 해야 된다 안 된다, 사실이다 아니다를 두고 왈가왈부하고 근거 없는 사실로 명예를 훼손했다고 서로 간에 고소고발이 이어져. 각 진영을 대변하는 논객들이 다양한 논평들이 내놓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논평을 넘어선 비난과 조롱이 쏟아져 나오고 서로에 대한 비방이 난무해. 감정이 상하고 분노한 지지자들은 정확한 사실 관계는 알 바 아니고 서로 똘똘 뭉쳐서 상대 진영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 잡혀. 이젠 진상파악이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재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걸 승복할 생각도 없고, 심지어 이 일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고 본질이 무엇인지 조차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가 돼.

 매일 매일 쏟아져 나오는 ‘오늘의’ 뉴스를 열심히 챙겨 듣고 언론이 들려주는 얘기들을 성실하게 따라가다 보면, 그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시민사회에 미칠 파장, 이 사건이 발생되게 된 정치·사회적 배경, 이와 관련된 논의가 우리 현대사에서는 어떤 식으로 흘러왔으며, 그에 대해 각 정치집단은 어떤 입장을 표명해 왔는가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없고,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어찌 보면 지엽적일 수도 있고, 언론과 정치가 국민들로 하여금 관심을 가져 줬으면 하는 것들에만 과도하게 쏠려가고 몰입되게 되는 문제점이 있지 않나 싶어.

 현대사 속에서 각 정치 세력들이 중요한 사건마다 어떤 입장을 내고 어떤 행동을 보였으며, 또 거기 속한 정치인들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보를 보여 왔는지, 또 그보다 이전 역사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 또 그러한 사건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어떤 사건과 영향, 사람들의 반향이 쌓여 우리 사회가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사회학 관련 책들과 함께 공부하면 더 좋을 것 같고 말이야. 아빠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봤자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말해주는 ‘역사’를 떼어놓고 지금의 모습을 100%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야.         


◆하지만 중요하다. 

 이문열 작가의 단편소설 중에 『칼레파 타 칼라(kalepa ta kala)』라는 글이 있어, “아름다운 것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뜻의 그리스 속담인데, 고대 그리스를 무대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소설이야. 독재자를 몰아내기 위한 시민들의 혁명이 성공하여 새로운 집권층이 들어서지만 머지않아 곧 부패하고 이전보다 더한 독재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야. 많은 시민이 이렇게 피를 흘릴 정도까지 노력을 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게 노력해도 민주적인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야.

 그럼 그냥 뉴스니 TV니 관심을 끊고 그냥 살지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정치에 관심을 끊고 살면 정치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 공화당이 집권하는지 민주당이 집권하는지에 따라 자살률, 소득 양극화, 복지제도 등에 많은 차이가 나고, 우리가 국제 뉴스에서도 보듯이 쿠데타와 같은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는 국가는 그 전과 후의 국민들의 삶의 모습이 현격하게 달라지지 않니. 그래서 시민과 사회와 국가를 위하는 정치인을 뽑고 그런 정부가 구성되도록 하는 일이, 우리가 의식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 삶에 매우 광범위하고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한의학에는 ‘소의치병 중의치인 대의치국(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 :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고, 큰 의사는 나라를 치료한다.’ 이라는 말이 있어. 좋은 의사는 몇몇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지만, 좋은 정치인은 사회와 국가 전체에 만연해 있는 다양한 부조리와 병폐 등 사회의 병을 고쳐 매우 광범위한 범위에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므로 넓게 보아 대의(大醫)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보아야하겠어. 

 어떤 동네에 좋은 의사가 있으면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듯이,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잘 가려낼 수 있을지에 대해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틈틈이 공부해 두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중에 하나가 될 것 같구나.

 우리 삶에서 중요하지만 전부가 아닌 일부분에 해당하는 정치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고, 그 차이로 그 사람 전체를 미루어 평가하지도 말자. 그럴 시간에 역사책을 좀 더 읽고 좀 더 좋은 사회란 어떤 것이며 그것을 위해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공부하고 생각해 보자.       


◎언론에 대해

◆신뢰도가 높지 않다.

[단독한국 언론 신뢰도, 4년 연속 부동의 꼴찌                                            (2019-6-14, 서울신문)

 세계 주요 38개국에서 진행한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인들의 언론 신뢰도는 최하위로 나타났다. 한국 언론은 2016년 해당 조사에 처음 포함된 뒤부터 4년 연속 신뢰도 최하위라는 불명예에 빠졌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13일 공개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19’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뉴스 신뢰도는 22%로 38개국 가운데 맨 뒷자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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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614500192&wlog_tag3=daum     

한국 언론 신뢰도 상승그래도 바닥권                                                        (2021-6-23, 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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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 엔진뉴스 수집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 뉴스를 접한다.”는 한국 응답자는 72%로 46개국 중 1다. 일본(69%), 대만(56%), 체코(50%), 이탈리아(47%) 등이 뒤를 이었다. "언론사 홈페이지, 애플리케이션 등을 활용해 온라인 뉴스를 이용한다."는 한국 응답자는 5%에 불과했다. 핀란드(67%), 노르웨이(63%), 덴마크(49%), 스웨덴(48%) 등 뉴스 신뢰도가 높은 국가의 응답자는 뉴스 웹사이트와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온라인 뉴스를 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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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293     


 첫 번째 기사에 나오는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연구 결과만 가지고 우리나라 언론의 신뢰도를 100%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4년 연속 지속적으로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높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아. 두 번째 기사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뉴스 신뢰도가 높은 나라들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언론사가 아닌 검색엔진 사업자 등(네이버, 다음 등)이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특정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된(최근에 이 알고리즘의 투명성 대한 문제가 재기되고 있어) 뉴스를 보고 있다는 점에서 접하게 되는 뉴스의 노출도와 배열 방식 등이 신뢰도를 높이는 구조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아.     


◆개수는 아주 많다.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정기간행물등록관리시스템. 2021/9/24 기준]

 위 날짜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등록된 정기간행물 수만도 21,000개 가까이 된다는구나. 엄청 많지. 아빠가 하윤이 나이 만할 때는 방송도 신문도 모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군데가 되지 않아서 특별히 뭔가를 골라 볼 것도 없었던 것 같아. 하지만 지금처럼 언론사가 많을 때는 각 회사별로 제공하는 뉴스의 질과 내용에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좋은 언론사를 잘 가려서 이용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할 것 같구나.       


◆뉴스는 다 사실일까?

 예전에는 “뉴스에서 그러던데.”, 혹은 “신문에서 봤어.”라고 하면 누구나 사실인가 보다 하고 수긍했었는데 요즘은 ‘가짜뉴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뉴스에도 사실이 아닌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으니 뉴스를 접할 때마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보고 읽는 사람이 일일이 경계하고 검증해야 하는 부담까지 생겼으니 더 힘들어진 면이 있다고 보아야겠어.

 그럼 사실만 담겨 있으면 그건 전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될까? 아래에 있는 두 그림은 벌어지고 있는 전체 상황 중에서 언론이 일부만 선택해서 전달했을 때, 그것이 분명히 사실만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내용과는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 것 같아서 골라봤어. 왼쪽 그림에서는 실제와는 달리 카메라에 잡힌 내용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어 있고, 오른쪽 그림에서는 사진을 잘라 고르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가운데 있는 병사를 살리려는 것으로도 혹은 죽이려는 것으로도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

 같은 이치로 어떤 사람에 대해 보도할 때 실제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부정적인 부분만을 반복적으로 보도하면 사람들은 그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고, 반대로 좋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긍정적인 면만 반복적으로 보여 준다면 전체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거야. A가 B를 몇 년 동안 괴롭히며 수 백 대를 때렸지만 그 사실은 알리지 않고, 어느 날 B가 방어하는 과정에서 휘두른 팔에 우연히 A가 맞아 코피를 흘리는 장면만을 따서 보도한다면 B는 졸지에 폭력을 일삼는 못된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 모두 사실만을 보도함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사실과는 반대되는 보도가 될 수 있는 예들이라고 볼 수 있겠어.

 국제적인 뉴스 특히 미국 관련한 뉴스는 미국 언론이 보도한 뉴스가 그대로 국내에 전해지는 경우가 많아. 미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 이 전쟁을 일으킨 명분(미국의)과 이 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렀을 때 기대되는 효과(미국의) 등이 상세히 보도되고, 첨단 무기로 무장한 군대(미국의)가 상대국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모습, 전사자(미국의)가 발생되었다는 소식, 그 유해가 본국(미국)으로 송환되는 모습, 유가족인 오열하는 모습(미국인) 등은 자세히 다루어지지만, 상대국에서는 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군사력 수준으로 비교할 때 이것을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일방적인 살상이라고 보는 게 맞는지, 민간인은 얼마나 많이 사상되었고, 그들의 삶의 터전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그로인한 전쟁 난민은 얼마나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여. 미국의 언론이므로 미국인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당연히 그 나라의 관심과 이익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거야. 그러니까 어떤 기사를 접할 때 이게 누구의 시각에서 바라본 사건에 대한 의견인지를 감안하지 않고 보면 한쪽의 일방적인 시각을 객관적인 해석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거야.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시대

 세상은 점차 복잡해지고, 언론사 숫자가 많아지면서, 각종 매체에서 엄청난 양의 보도가 쏟아져 나오는데, 전통적으로 이용해 오던 신문과 TV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지고 *튜브, SNS 같은 새로운 매체를 사람들이 더 선호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아무튼 갈수록 진실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기도 해. 

 하지만 뉴스를 접할 때마다 지금 이 기사가 사실을 얘기하는지 의혹이나 의견에 대해 얘기하는지, 사건에 대한 개인의 시각과 주장을 단순 전달하고 마는지 사건과 관련된 역사와 사회학 이론 등을 이용하여 언론사의 시각으로 평가하고 해석해서 독자에게 판단의 틀을 마련해 주려고 노력 하는지, 사건을 부분적으로 전달하는지 가급적 독자가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노력하는지 등을 생각하며 읽어서, 독자가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언론사가 어떤 곳인지 잘 가려서 이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구나.

 전사[前史]라는 단어가 있어. ‘어떤 역사가 이루어진 원인을 설명하기 위하여 쓰이는, 그 이전의 역사.’라는 의미의 단어야. 지금 눈앞에 벌어진 사건은 그것만 보면 그냥 우연히 벌어진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과거에 먼저 일어났던 사건들까지 살펴보다 보면 그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고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는 것이지. 언론에서 전해주는 하루하루의 새로운 사건과 주장과 사회 현상들을 매일 그것만 들여다보며 열심히 따라가려고 하는 것보다,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일들이 어떤 식으로 흘러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보는 방법도 있을 테고, 유사한 사회현상에 대해 학자들이 미리 연구하고 분석해 놓은 연구들을 공부할 수도 있을 거야.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가 보자꾸나.

 미국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해. 하지만 한편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이 신문만 읽는 사람보다 교육이 더 잘돼 있다”는 말도 했다고 해. 

 아빠가 쓰는 안경처럼, 언론은 많은 것들을 그것을 통해야만 잘 볼 수 있는 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이지만, 좋은 안경을 골라서 안경알을 깨끗이 닦아서 써야만 사물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잘 살피고 가려서 슬기롭게 이용해야 해.      


◎혐오에 대해

 ‘혐오(嫌惡)’ : 싫어하고 미워함                                                                           [국어사전]

 ‘혐오(嫌惡)’: 어떠한 것을 증오, 불결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으로, 불쾌, 기피함, 싫어함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강한 감정(사람이 느끼는 것을 기준으로 함)을 의미한다.                                                                                                                                    [위키백과]

       

 사전들에는 위 내용처럼 나오는구나. 아빠 머릿속에 제일 처음 혐오스럽다는 느낌으로 기억된 것들이 뭐였었는지 더듬어 봤더니 아마도 어릴 때 접했던 뱀, 바퀴벌레, 배설물(똥), 짐승의 썩은 사체와 같은 것이었던 것 같아. 뱀과 바퀴벌레는 일단 보기에 징그럽고 물리거나 접촉했을 때 우리에게 물리적 위해를 끼치고 해로운 물질이 우리 몸에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배설물과 사체는 물리적 위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일단 더럽고 셀 수 없이 많은 병균이 득실거려서 가까이 가면 안 되고 닿아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줬던 것 같아. 

 이런 혐오라는 감정이 우리에게 왜 있을까를 한 번 생각해 봤어. 부모님이 악어와 뱀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아이에게 “영희야 뱀은 위험한 동물들이니까 만나면 무조건 멀리 피해야해.”, “철수야 짐승의 썩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 돼.”하고 다 일일이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감정이 들게 되는 것일까? 이 혐오라는 감정은 모든 동물에게 보편적일까?     

  *뱀을 잡아먹는 오소리 같은 동물도 뱀을 보고 혐오감을 느낄까?
  *똥을 먹는 개들은 혐오스럽고 역겨운데도 참고 먹는 것일까?
  *하이에나는 짐승의 썩은 고기가 혐오스러운데도 참고 먹는 것일까?     

 아닐 것 같아. 혐오라는 감정은 아마 동물 종류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자연 상태의 인간의 경우는 아마 ➀안전(물리적 위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 위생(병균 등의 감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 목적과 반하는 대상과 맞닥뜨렸을 때 ➁대상에 대한 사전 교육이 없더라도 ➂거부하고 회피하려는 반응이 자동적으로 발현되도록 유전적으로 설정된 자기 보호 장치로서의 감정이 아닐까 싶어. 

 이 ‘혐오감’은 위험하고, 유해한 것들로부터 초래될 수 있는 상해와 감염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일단 혐오의 대상으로 지정한 것에 대해 그 지정이 옳았는지 지정 후 그 대상에 대해 취하는 나의 생각이나 행동이 정당한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하는 맹목적인 태도를 갖게 하고, 그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일체의 가학적인 말과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면제해 주는 부정적인 효과도 있는 것 같아. 뱀은 그냥 먹이를 구하기 위해 혹은 목적지로 가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인간이 보기에 이 뱀이란 놈은 언제든 다시 나타나서 나나 우리 이웃을 물어 죽일지도 모를 ‘사악한’존재이므로 “이런 뱀 새끼가 어딜..” 하고 야멸차게 내뱉으며 돌덩이로 내리쳐 죽여도 되는 존재이고, 바퀴는 하등에 이로운 점이 없으면서 여기저기서 기어 나오는 지긋지긋한 놈이기 때문에 “이런 바퀴새끼”라고 내뱉으며 슬리퍼로 내리쳐 죽여도 되는 존재이고, 똥이나 사체를 보면 “더럽게 여기 왜 이런 게 있어. 아이 재수 없어.”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식으로, 일단 혐오대상으로 분류된 것에 대해서는 ‘바퀴새끼 한 마리 죽이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가 있어’ 하는 생각으로 마음껏 싫어하고 미워해도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행동이 정당한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없고, ‘뱀 같은 것들은 보는 족족 죽여 없애야지.’하는 식으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아무리 죽이고 욕해도 다른 동물을 해치거나 욕할 때와 달리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아닌가 싶어. 혐오스러운 것은 영원한 우리의 적이고, 이런 생각을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은 영원한 나의 동지이며, 해로운 적을 쳐 없애는 일은 백번 정당한 일이므로 매번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고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는 당연한 일인 것이지.

 좀 더 자란 후를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이 하는 행위, 말, 생각 등이 일반 다중이 생각하는 기준에서 부정적으로 크게 동떨어졌을 때도 그것을 혐오스러운 행동이나 혐오스러운 언어라고 비난하는 걸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아. 그냥 친구 사이에서도 너무 이상한 차림, 표정, 언어 등에 대해 혐오스럽다는 말을 쓰기도 했던 것 같아. 최근 들어서는 ‘극혐’이란 단어도 두루 많이 쓰이는 것 같더구나. “아 나 그 노래, 그 음식, 그 동영상 극혐이야.”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위에서 말한 혐오와 형태상으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고 그 대상이 되는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은 공통적이지만, 크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

 최근에는 혐오가 사회적으로 많이 이슈화 되고 문제점으로도 많이 지적되고 있는 것 같아.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 성별이 다른 사람, 성적 지향이 다른 사람, 종교가 다른 사람, 학력수준·소득수준이 다른 사람 등 자기와 어떤 점에 대해서 다른 누군가가, 뭔가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조금이라도 아는 사이라면 할 수 없는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험한 말로 비난하고 조롱하는 일이 많이 있고, 심지어는 그것을 빌미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본인이 옳고 상대는 그른데 그런 상대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자기가 생각하는 사회의 정의와 공정을 저해한다고 생각해서, 나와 다른 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욕하고, 조롱하고, 집단적으로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정한 법에 의해 명백한 범죄자로 판결된 사람도 아닌데 내 생각으로 재단해서, 한 사회에서 같이 살고 있는 구성원을 존중해 줄 가치가 없고 인권을 보호해 줄 가치도 없는 그런 존재로 대해도 되는 걸까? 어쩌면 그렇게 잔인하고 난폭할 수가 있을까? 

 아빠 생각에는 아마도 이 사람들은 어떤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너무 오래되고 강화되다보니 이제 그 감정이 보통의 미움을 넘어 강한 혐오가 되어서, 이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을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암적인 존재, 아무 이로움도 없이 해악만 생산하는 해충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일단 뭔가를 혐오의 대상으로 정하고 나면 그러한 나의 생각이 정당한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맹목이 생기고 자기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 심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제쳐두고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우리가 어렸을 때 혐오했던 뱀과 바퀴벌레와 똑같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에게 보였던 혐오적인 감정과 행동을 똑같이 쏟아내는 것으로 보여. 

 인간이 자신의 안전과 위생을 위해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져야 하는 혐오라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 안 되는 것인데 말이야. 특히 아무리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깊게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물리적 가해행위 즉 상대에 대한 그 어떤 형태의 폭력적 행동도 절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기사가 있더구나.     

 

[혐오 이기는 것은 논리 아닌 접촉이다.]                                                   (21.5.14 한겨레신문)

 <혐오 없는 삶>의 지은이인 독일 저널리스트 바스티안 베르브너(주간지 <디 차이트> 편집장)는 “온건주의자, 합리주의자, 균형주의자의 목소리가 힘을 잃고, 새된 소리로 외치는 자, 혐오주의자, 급진주의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묘한 차이들은 양자택일과 아군과 적군의 구별 속에 묻혀 버린다.”고 현실을 진단한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적대하는 사람들 간의 ‘접촉’이다.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한다.” 1950년대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여러 연구와 실험을 통해 일찌감치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접촉가설’이라고 이름 붙였다. “적대자들 사이의 접촉은 편견을 줄여 주고, 더 평화로운 관계로 이끈다.”는 이 가정은 이후 이론으로 굳어졌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95191.html     


 이 글을 읽고 생각해보니 아빠에게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던 것 같아. 평소에 지나가다 만나면 아주 반갑게 인사해주시고 마주 서서 서로의 안부도 묻고 하윤이의 성장에도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고 우리가 무거운 짐을 가지고 어디로 걸어가고 있을 때 차로 우리 짐을 실어다 주시기도 하면서 우리와 아주 가깝게 지내던 두 내외분이 계셨는데, 어느 날 알고 보니 아빠 생각과는 많이 다른 어떤 집회에 참여하시는 분들이셨던 거야. 아빠는 그때 꽤 충격을 받았어. 그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닐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빠가 그 분들이 해당 집회에 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 분들은 아주 따뜻하고 자상한 이웃이셨거든. 만약에 아빠가 그 분들의 됨됨이와 마음씨를 알기 전에 그분들의 그런 특성을 먼저 알았더라면 그분들에 대해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혼란스러웠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생각하게 되었어. 어떤 사람의 정치적 견해가, 종교적 신념이, 성적 지향이, 성별이 그 사람의 전체가 아닌데, 우리가 어떤 만남이나 매체(언론, SNS 등)에 노출된 그 사람의 특정 부분을 본 후 그 부분에 대한 내 평가를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치가 우리 삶에서 10% 정도의 중요도를 차지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 나와 정치적인 면에서 매우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삶에서 10%에 해당되는 분야에서만 나와 생각이 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 놈은 100% 미친놈’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더라고. 위 글에서도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한다.’고 했듯이 실제로 접촉할 수 있다면 더 많이 알수록 혐오의 가능성이 낮아질 테니까 그렇게 노력해 보고, 접촉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항상 ‘10%, 혹 20%의 분야에서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아.

 아까 위에서 혐오하는 대상에게는 ‘아는 사이라면 할 수 없는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험한 말’을 한다고 했지. 이게 가능한 이유는 그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암적인 존재, 아무 이로움도 없이 해악만 생산하는 해충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도 있지만 더불어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완전한 타인’이라는 생각 때문일 거야. 잘 따져보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으로 몇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일수도 있지만 그냥 모르는 채 하고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으로 남겨두어야 함부로 하기 편하기 때문에 애써 무관한 남으로 남겨두는 것 같아.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그들도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야할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들인데 이념과, 성별과, 종교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것이 공동체 발전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혐오를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단다. 정치인, 유명인, *튜버, 댓글작성자 등 다양하게 볼 수 있어. 언뜻 보면 이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위해, 누군가 꼭 해야만 할 말을, 이해 상대방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리 높여 외치는 의로운 투사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부득이한 처지나 맥락상의 한계에는 눈을 닫고 특정 집단의 이념과 이익을 일방적으로 대변함으로써 그들의 환호와 맹목적인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 같아 보여. 겉으로는 자기 측 진영의 맨 앞에 서있는 선봉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아마도 돈과 인기와 세력과 영향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사람들로 보여. 이들에 의해 공동체는 반으로 나뉘어 ‘우리’와 ‘적’으로 갈라지게 되고, 우리 편은 무조건 옳고 좋은 사람이고 상대편은 무조건 그르고 나쁘다는 맹목적 시각이 강화되고 혐오대상에게 가하는 폭력적인 언행에 대한 죄책감은 면제되어서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식을 강화하는 부정적인 역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그 집단 내에서는 이런 사람의 발언을 듣는 것이 속이 시원해지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이런 사람들의 독설과 조롱이 여과 없이 지면을 채우는 데 이런 글들도 가려 읽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구나.  

 무언가를 함부로 혐오하지 말고, 우리 친구들에게도 그러지 말자고 권하면서 살자.

“홍길동씨가 말씀하신 ~~ 의견은 ○○관점과 ■■관점에서 비춰볼 때 다수 시민의 행복증진과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부적절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홍길동이가 ~~라고 했다죠. 미친놈.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이건 완전히 개소립니다. 길동이놈은 우리의 이익을 훔쳐가는 악랄한 도둑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뜨뜻미지근한 논리적 비판보다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 같은 비난(?)을 더 찾아듣는 내 선호가, 혹시 내 안에 혐오를 키우는 것은 아닌지 항상 경계해야 할 일이야. 

 내 마음껏 미워하고 함부로 대하면서 맘대로 혐오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있을까?      


◎친구 따라 강남만 갈 것인가.
 “이 가게가, 이 거리가 요즘 뜨는 핫플레이스에요.”, “야~ 이거 진짜 핫아이템인데 이걸 모른다구요?”, “인싸가 되려면 *이스북, *그램, *튜브는 기본이죠.”, “○○○ 드라마, △△ 영화 정도는 봐 줘야 대화가 되죠.” 용어가 좀 바뀌고 표현이 좀 달라졌을 뿐이지, 아빠가 20~30대 때도 많이 하고 들어왔던 말인 것 같아. 그 때는 아마 ‘유행(핫한 것)’에 뒤처지면 ‘신세대(핵인싸)’가 아니라고 표현했던가? 아무튼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새로이 유행되는 문화와 상품을 빨리 수용하고 향유하는 사람이 시대를 선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해졌던 것 같아.

 기분 탓인지 모르겠다만 아빠는 최근 들어서 이런 일들을 좀 더 자주 목격하게 되는 것 같아. 흥행 보증수표라는 A, B, C 세 배우가 주연한 영화가 개봉했는데 관객 수 1000만을 예상한다고 하며 마치 무슨 경기중계를 하듯 관객 수가 올라가는 상황을 언론이 앞 다투어 보도하고, 외국 어느 대중 가수를 다룬 영화, 외국에서 큰 상을 탄 영화들에 대해서도 평론가들의 분석과 찬사가 쏟아졌었지. 서울 어느 거리가 볼 거리도 많고 근사한 음식점이 많다더라, 지방 어느 도시가 요즘 뜬다더라 해서 그 도시, 그 거리에 대한 SNS 소식, 기사들도 많이 나오고. 또 쌉싸름한 맛이 나는 중화풍의 어느 음식이 유행이라더라, 어떤 게임이, 어떤 프로그램이, 어떤 X튜브 채널이, 방송에 나오는 어떤 사람이 뜨고 있다고 얘기가 돌아. 그와 동시에 그런 것들에 대한 소개와 평론과 기사들이 함께 쏟아져 나오고, 더불어 그걸 보기 위해 또는 먹기 위해 줄지어선 사람들의 긴 행렬, 해당 채널을 구독하거나, 해당 상품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숫자가 대중들에게 전해져. 그럼 왠지 나만 안 하고 있는 건가, 나만 뒤처지는 건가 하는 조바심이 나는 듯도 하면서 나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 나도 늦기 전에 어서 저 거대한 흐름에 동참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거지. 근데 언제부턴가 아빠는 이게 요즘 뜨는 거라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 하는 거라고 하면, 언론에서 많이 다루고 있는 것이라면 왠지 하기가 싫어지는 거야. 왜 그런 청개구리 같은 마음이 들었을까 생각해 봤어.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이 있어. 사전에는 ‘자신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이 하는 대로 덩달아 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강남에 가기로 마음을 먹은 A라는 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A가 친구 K에게 강남에 가면 기가 막힌 것들이 많다고 얘길 하는데 K입장에서도 들어보니 괜찮을 것 같아. 그래서 A랑 같이 강남에 가봤더니 글쎄 명불허전(名不虛傳 : 명성이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라 이름이 날 만한 까닭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라더니 역시 괜찮은 거야. 그래서 K는 아주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왔어. 그 다음 날은 B가 요즘 뜨는 XX음식을 못 먹어본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라며 핀잔을 주기에 같이 가서 먹어봤더니 안 먹었더라면 후회했을 법한 환상적인 맛이어서 또 만족하고 돌아왔어. 그 다음 날은 C가 X플릭스에서 하는 □□드라마가 정~~말 재미있다고 해서 집에 와서 어떤 건지 줄거리나 알아보자 하는 마음에서 틀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빠져들어 6회 전 분량을 정주행하고 나서 지금까지 본 드라마 중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작품성이 높은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을 느꼈다고 해보자. 

 세 가지 모두 ‘핫(hot)한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닐 것이기에, 누구나 좋아할 수 있도록 잘 고안한 후 공들여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이면 만족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거야. 그것을 이용하는 동안 즐거웠을 것이고 또 그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고 만족스러운 경험이었을 테고 말이야. 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그 체험의 과정을 한번 들여다보면 어떨까 싶어. 그 일들에 대해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인가누가 좋다고 하니까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대개는 ‘남이 좋다고 하는 것을 내 생각에도 괜찮을 거 같아서 해본 일들’인 경우가 많을 거 같아. 살면서 남이 좋다고 하는 여러 가지 중에 정말로 괜찮은 것들을 잘 가려서 할 수 있는 능력만 있어도 작지 않은 성취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이것도 매우 중요한 능력으로 볼 수도 있을 거야. 아빠가 우려하는 것은 ‘남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찾아다니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게 될까봐, 혹은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의 경험 중에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까봐 걱정스런 마음이 든다는 점이야. 좋으면 그만이지 내가 선택했는지 남이 알려줬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냐구?     


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뭘까?

 요즘은 정말 맛있는 거(음식), 볼만한 거(영화, 드라마, 웹툰 등 다양한 영상물), 가볼만한 곳(외국, 거리, 관광지), 해볼 만한 일(온라인 게임, 레저, 캠핑, 놀이기구, SNS 등) 등이 무궁무진하게 넘쳐나는 세상인 거 같아. 지금 세상의 시각에서 보면 엄마, 아빠의 인생은 하윤이가 살아온 삶에 비하자면 조금은 더 단조롭고 심심한 세상이었을 거야. 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인생은 엄마, 아빠의 인생보다도 조금 더 많이 단조롭고 심심한 세상이었을 것 같고. ‘6. 기타 ◎생각할 여유’에서 심심해야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고 했었지? 엄마, 아빠 때는 TV도 저녁때만 나오고 별로 할 것도 없어서 심심할 때도 더러 있었어. 그렇다고 그 시간에 다 진지하게 나와 나의 미래에 대해서 머리를 질끈 묶고 골똘히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걸어 다니면서까지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시청할 정도로 아무런 외부자극이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삶은 아니었던 것 같아. 아무튼 그런 시간을 살아 온 아빠, 엄마의 또래 사람들 중에도 아직까지도 자기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진짜 해보고 싶은 게 뭔지’를 잘 모르고 여태까지 지내온 방식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아.

 하윤이 또래 친구들의 삶은 어떠니.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서는 6살부터 2자리 곱셈을 시킨다고 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을 시작해 학원에서 중학교 과정을 미리 공부하고, 중학교 때도 수학, 영어, 과학, 논술로 이 학원 저 학원을 다니고, 고등학교 때가 되면 내신에, 수행평가에, 학원에, 수능 준비에 밥 먹을 시간도 충분치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사는 것 같아.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를 하고, 학원을 다니다 ‘잠깐 짬나는 시간에 핸드폰으로 게임이라도 하고 SNS라도 하면서 좀 쉬어야죠.’ 라고 말한다면 딱히 그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 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생이 되면 그 동안의 빡빡한 생활에서 벗어난 해방감에 ‘재밌어보였는데 해보지 못하고 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을 하느라고 또 정신없이 바쁜 것 같아. 

 힘든 일과 또는 삶의 시간 사이에 좀 쉬는 건데 그걸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해볼 시간 없이, ‘좀 더 많은 수입, 좀 더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해서 할 수밖에 없는 일들(생계와 수익)과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일’들(휴식과 오락)로만 모든 시간이 채워지는 것은 아닌가 안타까워서 말이야. 엄마, 아빠보다 더 생각할 시간 여유가 없는 하윤이와 친구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생각할 시간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➁ 우리는 서로 많이 다를까?
  [아일랜드]라는 영화가 있었어. 부자들이 어떤 생명과학기술 회사에 돈을 투자해서 오지에 수용소를 만들어 자신과 똑같은 복제인간들을 사육했다가 자신이 병에 걸렸을 때 해당 장기를 이식받도록 하는 내용이었어. 정작 사육되고 있는 복제인간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게 관리가 되었고, 거의 어른의 몸에 가깝게 배양되어 삶을 시작하기 때문에 유년기에 해봤을 법한 경험들, 즉 부모와 캠핑을 간다거나, 아빠한테 자전거를 배운다거나, 여름에 가족들이 바닷가에 놀러간다거나 하는 기억 들을 적당히 조합해 뇌에 주입해서 마치 자신이 어릴 때부터 보통의 인간으로 살아온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내용이 나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줄로 알지만 사실은 별반 차이 없는 비슷한 추억의 조합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말이야.  

 ‘제주도 푸른 밤’이라는 노래에 ‘신혼부부 밀려와 똑같은 사진 찍기 구경하며~’라는 가사가 나와. 실제로 아빠보다 한 10살 이상 많으신 분들 때에는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많이 가셨었고 여행사의 안내에 따라 단체로 이름난 장소들을 돌며 여행을 했는데, 풍경이 좋은 장소에 차를 세우고 사진사가 사진이 잘 나올 만한 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나면 신혼부부들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만 바꾸어 연속해서 사진을 찍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해. 사진 촬영과 구경을 마치고 나면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해서 또 줄지어 사진을 찍고 말이야. 시대적 제한, 관광산업과 각종 산업 발전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테지만, 여행사를 통해 여행을 다녀온 각각의 부부들이 ‘우린 정말 색다른, 남다른 경험을 했다.’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핫한 것’은 우리에게 색다른, 남다른 체험이 될까? 많은 다른 사람과 공유되어 똑같지 않은 나만의 고유한 체험이 될 수 있을까? 아무도 하지 않았거나, 몇 명이 하지 않았을 때 시도했다면 색다른 체험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곧 그것이 핫한 것이 되는 순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타고 난 자기만의 특성에 더해 자라오면서 각자 보고, 듣고, 체험을 해 가면서 그것에 대해 자기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쌓이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생겨난 자기만의 독특한 가치체계, 행동양식을 개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 

 핫한 것들을 쫓아다니면서 남들과는 다른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 느낌과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될지 의문스러워서 그래.        


➂ ‘핫한 것’을 능동적으로 소비할 수 있을까?

 다람쥐 집에서 놀고 있는 다람쥐를 본 적이 있을 거야. 쳇바퀴도 있고, 오르고 내릴 수 있는 사다리 같은 것도 있고, 먹이통, 물통, 몇 가지의 장난감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겠지. 천적과 만날 일이 없어서 안심되어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보기엔 그 안에서 노는 게 뭔가 썩 다채롭고 새로워 보이지는 않을 거야. 키우는 사람이 뭔가 새로운 놀잇감을 넣어주지 않는 이상 주체적으로 새로운 것을 즐길 수도 없을 것이고 제한된 선택 안에서의 반복된 삶 같기도 하고 말이야.

 아빠는 어느 날 문득 우리가 사는 사회도 크기만 다르다 뿐이지 어떤 면에서는 이 다람쥐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TV에서 새로운 가수, 신인 아이돌이 혜성처럼 등장했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 난리가 났는데, 이 사람들은 대형기획사에서 오랫동안 연습생으로 훈련받고 이번에 나오게 된 것으로 각 기획사별로 그런 연습생들이 엄청 많이 준비과정을 거쳐 데뷔를 기다리고 있고, 그런 출신들만이 공중파 방송사와 음악전문 채널 등에 출연 섭외가 잘 이루어지고 화려한 조명 아래 첫 선을 보이고 폭발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지 않니. 1000만 예감, 대박예감이라며 새로 만든 영화가 출시되고 언론에서 SNS에서 난리가 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 줄지어서 영화를 보고 본 사람들도 모두 재미있다고 해서 흥행에 더욱 불이 붙어. 하지만 영화제작사와 영화배급사와 영화관 사이의 특수 관계를 통해 전체 영화관 스크린 수의 80~90%에서 흥행중인(흥행되도록 밀고 있는?) 영화만을 독점적, 획일적으로 상영하고 있는 중이어서 만약 다른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었더라면 다리품 좀 팔아야 했을 상황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고. SNS에 블로그에 혹은 포털에 맛집이라고 많은 댓글이 달리고 높은 별점을 받은 가게만 검색해서 찾아가게 되니, 점점 갈수록 온라인상에서 이름난 집에만 손님이 쏠리게 되는 현상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게 되지 않니.

 겉보기에는 능동적으로 내가 고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소수의 공급자에 의해특정한 공급망을 통해 공급된제한된 보기에 대한어찌보면 강요된 선택을 ‘주체적·능동적 선택’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점은 없는가 생각해보게 돼. 정말 엄청난 것이라고 이제 까지 이런 것은 없었다고 언론에서 한참을 부추겼는데, 좀 지나보면 그렇게 사람들이 환호하던 대상은 온데간데없고 유사한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치하고 사람들은 또다시 그것에 열광하는 그런 구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 아빠는 이런 게 하기 싫어졌던 모양이야. 

 그러는 사이에 그저 그러한 외모에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긴 세월 거리 공연을 해온 자기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길거리 가수의 노래는 갈수록 들을 수 없게 되고, 우리가 한번은 꼭 생각해봐야할 중요한 사회 문제를 끊임없이 파헤쳐 오랜 취재를 통해 만든 다큐멘터리 독립 영화, 저예산 영화와 같은 다양한 시각은 갈수록 만날 수 없게 되고, 컴퓨터·SNS를 다룰 줄 모르는 솜씨 좋은 시골 부부의 가정식 향토음식과 같은 숨겨진 맛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욱 줄어들고 그래서 그런 집들은 계속 사라져가게 될 것 같아. 
  대신에 대중문화 상품, 맛집, 거리들이 갈수록 더 큰 인기를 누리고 폭발적인 호응을 얻게 되는 것을,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똑같이 그것을 소비하는 것을 우리가 과연 기뻐하기만 할 일인가 한번 생각해 보게 돼.
  우리 모두가 똑같이 식사 때가 되면 요리전문가 xx선생의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거리에서 쇼핑을 하고, 저녁이 되면 △△드라마를 보고, ☆스타그램에 그 일상들을 올리고 살 수만은 없지 않겠니.

 어찌 보면 즐겁게 영화 한 편 보고, 맛집에서 맛있게 한 끼 먹으며 기분 좋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될 일을 심각하게 부정적으로만 본 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럴 수도 있어.

 개성(個性)은 사전에 ‘다른 사람이나 개체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이라고 나와. 내가 하고 있는 다양한 소비의 조합이 나의 개성은 아닐 텐데, 그럼 나의 개성은 무엇일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 그런 경험들로 내 삶을 아로새기면(또렷하고 솜씨 좋게 파서 새기다) 좀 더 나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나만의 경험으로 나답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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