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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May 08. 2024

좋은 선물

몸으로 사랑을 온전히 전한다.

  몇 달 전, 집에 걸어가는 길이었다. 멀리서부터 한 학생이 다가왔다. 누구지 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제자 녀석이 엄마와 함께 걷다가 우연히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냥 지나갔으면 못 알아보았을 정도로 많이 큰 녀석이 기특해 이름을 부르자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순간의 당황도 잠시, 기분 좋게 함께 안았다. 잠깐 안부를 묻고 힘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헤어지면서 혼자 곰곰이 생각했다. 오랜만에 본 아이가 그렇게 나를 안아준 이유를.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안아줄 수 있었을까. 장난꾸러기가 많았던 그해,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녀석들과 하교 인사가 서로 안아주는 것이었음을 새삼 떠올렸다. "안녕히 계세요." 대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매일 그렇게 헤어졌기에 오랜만에 만나도 자연스럽게 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학년에 상관없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많이 안아준다. 틈이 날 때마다 손을 잡는 것을 기본이고, 하교지도하면서 꼬옥 안아준다. 그래서인지 1학년때 만났던 꼬맹이들은 아직도 운동장 저쪽에서 날 발견하면 신나서 뛰어온다. 인사대신 꼬옥 안으면서 웃는다. "안녕"하고 지나치면 서운함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기에 아예 눈 마주치자마자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이산가족이 상봉한 듯이.

고학년 아이들과의 인사는 악수로 시작해서 하이파이브로 그리고 결국 포옹으로 발전시킨다. 어떤 사람은 그런 나에게 성민감성이 떨어진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러다 고소당한다고도 걱정한다. 예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성에 대해 민감해졌다. 여러 사건이 불거지면서 많은 교사가 아이의 손을 잡는 것도, 어깨를 두드리는 것은 물론 안는 것도 거의 하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을 모른다고 나를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누구보다 내가 성에 대해 민감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주기적으로 성교육을 하고,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고 있음을. 아이와 손을 잡기 전에, 안기 전에 충분히 아이의 동의를 구한다. 싫으면 언제든지 거부해도 괜찮고, 안는 것이 싫으면 하이파이브해도 된다고 누누이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아이도, 두 팔로 가두리를 만들어 안던 아이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안는다. 안아주는 행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포옹은 서로에게 주는 가장 간편하지만 묵직하고 진한 선물이다.


  우선, 안아줌으로 모든 감정을 해소한다.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마 말로 건네지 못한 마음은 포옹으로 전해진다. 서러움도, 서운함도, 미안함도 그 안에 녹아버리되 서로에 대한 진실한 마음만 남긴다. 특히, 이성으로 알지만 감정조절이 어려운 아이는 매번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서로를 안을 때만은 모든 감정을 다 내려놓게 된다. 심장과 심장으로 서로를 느낀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결국 씨익 웃게 한다. (비밀이지만 아이에게 조금 엄하게 대할 때는 삐친 척하며 "오늘은 안아줄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정중하게 인사하면 아이는 엄청 서러워하거나 미안해한다.)

  졸업한 녀석들이 간혹 찾아오면 아무 말없이 그냥 안겨있다가 가기도 한다. 묻고 싶은 말이 수없이 많지만, 눈에 가득 고민을 담아 온 아이가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면서 그냥 안아준다. 가끔 그러다 인생 상담을 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냥 그렇게 안겨 있다 가기도 한다.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더라도 아주 희미하게나마 위로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안아주는 것은 서로 이어져 있는 끈을 두텁게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가르치다 보면 서로 맞지 않아 혹은 지나친 잔소리로 이어져있는 끈이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그럴 때는 잠시 멈춘다. 끈을 찾아 헤매지 않고 그냥 아이를 안아준다. 잠시 멈추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게 안아주고 나면 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때로는 신뢰감으로, 때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아무리 감정이 상해도 서로를 잇고 있는 끈이 끊어지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의 잘못을 미워하되 아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님을 아이도 알고 나도 알게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안아주는 것은 아이와 나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준다. 큰 문제가 생겼을 때도, 감정이 심히 상했을 때도 말없이 다짜고짜 안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매일 안아준다는 것은 연결된 그 끈을 두텁게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끊어지지 않을 그런 끈을 만드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아이에게 어떤 선물을 주겠냐고 한다면 단연코 나는 안아주는 것을 뽑겠다. 아이 스스로 귀한 사람이자 사랑받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로는 표현되지 않을 사랑을 온몸으로 전해주는 방법이다. 아무리 미운 짓을 했던 아이도 안아주다 보면 사랑이 회복된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을 온 마음을 다해 안아주었고 내일도 그럴 것이며 또 앞으로 남은 교사생활 내내 그럴 것이다. 힘들 때 스스럼없이 안길 수 있는 품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아주 작은 힘이라도 전해질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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