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

청년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by 보름달
“용맹정진하라.”
80세의 붓다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한 유언이다. 그가 승단을 발전시키라거나 나의 유지를 잘 받들라거나 했다면, 그것은 노쇠한 것이다.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이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에서 멈춘 셈이니까. 하지만 붓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진리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가는 존재로 규정했다. 한 종교의 교조가 아니라, 구도자이며 스승이자 도반으로. 하여 그는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도 청년이었고, 이후 여래와 세존으로 불린 중년에도, 나아가 죽음 앞에서도 청년이었다.


고미숙 선생님의 새 책이 나왔고 우연한 기회에 줌을 통해 한 시간 정도 그분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희끗한 머리와 목소리에서 연세가 느껴졌는데 동시에 파릇파릇한 힘이 느껴졌다. 툭툭 던지는 문장에서 그분의 목소리에서 청년의 팔에서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한 힘줄과 같은 건강함이 느껴졌다. 고미숙 선생님은 청년이었다. 결코 멈추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힘차게 뛰는 심장을 갖고 계셨고 내가 만나보았던 어떤 젊은 사람보다 깨어있고 열려있는 마음을 지닌 듯했다. 목소리의 꼬장꼬장함과 시원시원함으로 압도되기 시작하여 깊이 있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시는데 옛날과 오늘날을 관통하여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점과 그 원인까지 담겨 있었다. 감탄스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그날의 강의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미세하게 뛰던 내 심장이 요동을 쳤고 꼰대가 되어버릴 수 있던 위험한 상황에 내가 날 던져놓았다는 아찔함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우리는 언제 멈출까.

예전에 존경하던 선배 선생님은 퇴근 후에 한 시간 넘게 논문을 읽으신다면서 나에게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분도 청년이다. 사실 그때는 속으로 숨 쉴 틈도 없다고요 하면서 투덜거리기도 했다. 학교에서 뛰어다니는 것도 힘들고 집에 가서 집안일하고 또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힘들었다. 공부는커녕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도 버거웠다. 나는 멈춘 것인지 나아가고 있는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 별 일없이 살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다만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도 소모하고 소진되어 안이 텅 비는 느낌이 들어 늘 공부를 갈구했다. 열심히 연수를 찾아 듣고 새로운 교육방법에 대해 공부하면서 적용해보면서 그 텅 빈 공간을 채우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던 시기였지만 그때 나는 고여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차고 넘치지도 않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보며 나아가지도 못했지만 한 방울 한 방울씩 계속 내보내고 새롭게 받아들이는 작은 옹달샘이었다. 그래서 신선했다. 노력보다는 젊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교육경력이 10년 차가 될 때, 가르치는 것이 재미가 없어진 적이 있다. 이미 잘하고 있다는 생각도 있었고, 나만큼 열정과 시간을 갈아 넣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오만함도 있었다. 예민하고 급한 성격은 아이들에 대한 파악도 빠르게 할 수 있게 했고 그에 따라 다르게 가르쳐나갈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더 자만했다. 교실에서의 아이 모습은 그 아이의 일부임을 알면서도 내가 제대로 보고 있다고 판단하고 평가했다. 나는 나의 벽에 갇혔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고 그냥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름 괜찮은 교사라는 생각에 사방을 둘러쌓은 그 벽이 되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속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나이에 따라 순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냥 걷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주저앉아 시간만 까먹는 몸과 마음은 늙고 있었다. 나의 늙음은 곧 주변의 다른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집착을 보였고,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입에 달고 있는 추함으로 냄새가 났다. 익숙해졌을 때, 잘한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설정한 인위적인 목표에 도달했을 때, 나는 멈추었다.


벗들과의 결별, 그것은 분명 새로운 그물이었다. 스승을 떠날 때와는 또 달랐다. 황망하고 허전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선정의 길이 끊기자 고행의 길로 나아갔고, 그 길 또한 끊어졌다. 이제 선정도 고행도 아닌 또 다른 길로 찾아야 한다. 다만 그뿐이다. 그렇다. 그는 이미 바람이었다. 어떤 그물도 가둘 수 없는!

나는 능숙함과 안일함의 그물을 걸어놓았다. 나를 멈추게 하고 주변 사람들이(특히 제자들과 딸들) 내 그물을 뚫거나 거둬버리고 지나갈까 봐 더 촘촘히 그물을 짰다. 바람마저 가두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물은 늘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는 스스로 만들어 걸어놓은 것도 있었다.


멈춘 적이 없는 것처럼 나아가야 한다.

옛날이야기를 들먹이며 '나 때는 말이야~' 한다고, '왕년에는~' 한다고 꼰대는 아니다. 다만 더 나아가는 법을 잊은 채 옛 일에 잠겨 자신의 경험치를 최고처럼 이야기하고 자기의 틀에 갇혀있는 것이 꼰대다. 그들은 '요즘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하는 일을 어설프다고 하고, 건방지다고 하며,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며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거울을 보지 않기에 자신은 얼마나 늙어있는지, 고집쟁이 꼰대가 되어있는지 모르기에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다. 물론 젊은 꼰대들도 많다. 본인이 하는 것은 다 옳다고 믿으며 마음과 귀를 닫고 자아도취에 빠지는 이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꼰대다. 꼰대는 말과 행동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보인다. 적나라하게 밑바닥까지 보여서 옆에서 대신 부끄러워한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멈춘 적이 없는 것처럼 나아가면 된다. 녹슨 머리에 몸에 기름칠을 하고 시동을 걸고 나아가면 된다. 취미로 하던 독서를 치열하게 함으로 공부하고, 젊은이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한다. 한 번에 팡하고 고인 물을 내보내기는 힘들지만 작은 틈새를 만들어서 내보다 보면 신선한 물이 스며들어올 것이다. 자신이 멈추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어렵고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어렵지만 꼰대가 되기 싫다면 어쩌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이를 위해 아이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

멈추는 순간, 나는 아이에게 그물이 될 수 있다. 내가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이에게 그물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나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오래 살아가야 하는 아이의 꿈을 꺽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발목을 잡지 않고 싶다. 그들의 경쾌하고 빠른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하면 어떠한가. 그냥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그렇게 가다 보면 나란히 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나란히 가지 못한다 해도 내가 뒤에서 함께 가고 있고 그 등을 바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 힘이 되리라 믿는다. 다리 길이와 건강의 차이로 보폭은 다를 수 있겠지만 함께 나아간다는 자체로만으로도 훌륭하다. 가끔 멈추고 귀를 닫는 나에게 우리 딸은 툭 던진다.


"방금 엄마, 꼰대였어요."


버럭 하면서도 온 몸을 흔들어본다. 나를 깨어있게 하는 말과 행동, 그게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상관없이 반사하지 않고 잘 듣고 돌아보는 것이 멈추지 않는 비결이기도 하다. 깨어서 걷자. 나를 위해, 내 곁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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