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정의 주인 되기
감정에 이름 붙여주고 줄줄 셀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야한다.
내 감정에 주인이 되는 법을 알고 있던가. 아니, 질문이 틀렸다. 나는 과연 내 감정을 잘 조절하고 조율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인가.
타고난 예민함으로 인해 삶에서 생기는 감정의 기복은 당연하게 따라오는 부산물로 생각했다. 여러 감정을 마주하고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예쁘고 모든 지 잘하는 언니와 끊임없는 차별을 당하고 속삭이며 쳐다보는 어른들을 부당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난 그냥 버티는 법만 익혀갔다. 보름달처럼 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또 누르면서 강한 척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면서 버티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사람들은 또다시 수군거렸다. 어디에서나 잡초처럼 잘 살 거라며 아무렇지 않게 던지거나 냉정하다고 조소를 날리기도 했다.
어느 순간인가 내 마음 한가득 억울함과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누르고 눌러 담다가 어느 순간 펑하고 터졌다. 아주 팽팽한 고무줄에 작은 날카로운 것이 닿았을 때 가볍게 핑 하고 끊어지는 고무줄처럼 이성이 끊어졌다. 끝도 없이 꾸역꾸역 밀고 나오는 그 감정들에 치여서 울고 또 울었다. 한 많은 사람처럼 가슴을 쳐가며 꺼이꺼이 울었다. 하루를 눈물로 소진하고 아스라이 감정들이 눈물에 흘러가고 나면 그때서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리가 되곤 했다. 그런 나의 끝을 본 남편과 딸들의 황당해하는 것은 그냥저냥 넘길 수 있었는데 정작 나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감정이라는 놈을 시한폭탄처럼 안고 살았다. 평소 워낙 드러내 놓지 않고 씩씩한 척, 강한 척 살아온 시간들이 다 가짜였다고 폭로하는 그 시한폭탄이 늘 조마조마했다.
삶을 버거워하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화해서 끝없이 힘든 자기감정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약이 올랐다. 내가 어떻게 버티는데 하면서 툭 내 상황을 던졌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조금씩 흘려보냈더니 '씩씩해 보였는데 너도 힘들구나.' 해주었다. 그런 감정 한 자락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을 동반해야 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지내는 것보다는 확실히 가볍다. 졸졸졸 흐르는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보다는 덜 시원했지만 어쨌든 감정의 주인으로 있는 것은 안정감이 있다.
내 감정의 주인이 되는 것은 쉬운 듯 어렵다. 감정마다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상황에 맞게 꺼내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불러주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아이들은 감정에 동요한다. 그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함께 감정에 이름 붙이는 연습과 그것을 입 밖으로 힘차게 내놓는 연습을 참 많이도 한다. 말을 잘하는 것 같아 보이는 요즘 아이들도 감정을 표현하라면 "좋다" 또는 "싫다"로 단순하게 자기감정을 말한다. 그래서 감정의 이름을 알려주고 어떨 때 어떤 감정이 들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그리고 매일 아침 한 가지 일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감정을 생각하고 말로 표현하게 한다. 한참을 연습하면 아이들은 아직도 감정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나보다 쉽게 꺼내놓는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자 감정의 이름을 부르면서 내 감정을 인식하고자 하면서도 난 아직 딸이 '엄마는 왜 또 킹 받았어요?' 하면 버럭 손이 올라간다. 그런 나에 비해 우리 아이들은 되려 수월하게 표현하는 법을 익힌다. 나보다 낫다. 어려서부터 해본다는 것은 중요하다.
감정의 이름을 붙여주고 그 감정을 끌어내 말로 표현하면 오해가 적어지고 표현 그 자체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스스로가 든든한 통제실이 될 수 있음을 우리 아이들이 경험하고 몸으로 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감정을 충분히 느끼면서 말로 표현한다면 몸과 마음이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것임을, 감정의 주인이 되어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