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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Oct 16. 2023

같이 축구하는 사이

시골 여자 축구_5

© 해원



오랜만에 훈련장에 사람들이 많이 왔다. 날씨가 좋았고 우리 팀원들 말고도 마을 사람들이 여럿 와있었다. 신입회원까지 왔다. 대여섯 명이 뛰는 것에 익숙한 우리 팀에 오랜만에 여러 사람들이 와글와글하니 기분이 들떴다. 코치님이 포지션 훈련을 하자고 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감격스러운 일이다. 포지션 훈련을 할 수 있는 만큼의 인원이 모였다는 것에 첫 번째 감격. 패스도 제대로 못 하던 우리가 포지션을 맡아 간격을 유지하며 함께 움직이는 훈련이 가능해졌다는 것에 두 번째 감격.


세 명의 수비와 두 명의 미드필더, 양 사이드 윙어에 공격수까지의 포지션이 정해졌다. 고맙게도 놀러 온 마을 청년들과 아저씨들이 상대 팀이 되어주었다. 인원 비율은 8대 4. 사실상 우리 위주의 훈련이다. 우리는 공격하는 위치에서 각 포지션 간의 간격이 어떻게 유지되어야 좋은지, 공을 받은 포지션에 따라 다른 포지션의 사람들은 어떻게 같이 움직여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 간격과 움직임으로 앞으로만 가기보다 뒤와 옆을 활용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함께 배웠다.


얼추 포지션 훈련을 끝내고 훈련받던 포지션 그대로 미니 게임을 했다. 상대 팀으로 코치님과 어린이 친구 한 명도 가세하여 8대 6이 되었다. 두 명의 미드필더는 양옆이 아닌 위아래로 섰고 나는 아래쪽 미드필더였다. 그리고 내 뒤에는 센터백 B가 있었다. B는 우리 팀 수비수 중 가장 선임이다. 유일한 고글 소유자이며 그로 인해 가장 자신 있게 헤딩을 할 수 있고 그만큼 거침없고 단단한 수비를 자랑한다. 그런 B가 내 뒤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코치님은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공격 상황을 만들기 바라는 눈치였다. 내 뒤에 센터백인 B에게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앞으로 치고 나가라고 지시했다. B는 원래 입력과 출력이 느린 편인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빨랐다. 갑자기 B가 나보다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코치님의 코칭과 B의 움직임에 헷갈리기 시작했다.


B 양옆에 있던 수비수들은 축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부원이었고, 나와 B는 서로 비우게 되는 자리를 지켜줘야 했다. 그러다 보니 계속 달려 나가는 B의 뒷 공간을 미드필더인 내가 계속해서 채워야 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B와 나의 포지션이 바뀌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나는 계속 B에게 같은 말을 하게 됐다. “자리 지켜요, 자리!” “우리 지금 자꾸 겹쳐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니 뭔가 내가 자꾸 혼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조용히 수비 보면 되는데 내가 자꾸 욕심부리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점점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운동은 반응에 속도에 따라 능률이 달라진다. 생각이 많아지면 반응 속도가 느려지고, 능률이 떨어지게 된다. 나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뚝딱거리기 시작했다. B는 계속 튀어 나가고 나는 뚝딱거리고. 코치님의 코칭은 헷갈리고...


혼란 속에 1, 2쿼터가 끝났다. 마지막 쿼터를 남겨두고 내 걱정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그때 내 옆으로 B가 다가와 말했다. B도 나의 심각한 표정을 읽은 듯했다.


“해원이 계속 얘기하고 있는 거요. 제 성격 때문인 거 같아요. 제가 원래 남한테 지시를 잘 못해요. 제가 센터백이니까 뒤에서 사람들한테 지시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 제가 자꾸 뛰어 나가는 거 같아요.”


걱정 풍선의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아, 이건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의 문제일 수 있겠구나.’ B의 움직임을 이해하게 됐다. B의 플레이는 조금 느리고 주변 사람들의 말에 크게 휘둘리지 않으며 미묘한 자기만의 타이밍이 있다. 그게 운이 좋으면 상대의 타이밍을 뺏고 운이 나쁘면 같은 팀의 타이밍을 뺏는다. 그래서 종종 엇갈릴 때가 있지만 클리어링을 하거나 패스할 때 깔끔하고 정확하며 힘이 좋다. 나는 그런 B의 군더더기 없는 플레이가 좋다. 느리고 조용해도 할 말은 다 하는 B의 성격과 닮았다. ‘축구에도 성격이 나온다.’ 같이 축구하는 또 다른 B와 자주 하는 얘기다. 축구를 하면서도 생각이 많고 같이 하는 사람들을 자꾸 의식하는 것도 내 성격과 닮은 플레이다. B가 이어 말했다.


“그 부분을 내가 한번 노력해 볼게요.”


그렇게 들어간 3쿼터에서 B는 내 뒤에서 필요한 부분을 지시했다. “해원! 저쪽 막아줘야 해요!” “지금 나간 공은 MA가 던지고 해원은 앞으로 나가요!” 소리치는 B와 B의 말대로 움직이던 나는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B의 패스 타이밍처럼 미묘하게 웃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B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오늘 경기를 하며 느꼈던 마음을 전하고 싶기도 하고 앞으로 B와 더욱 잘 맞춰 나가고 싶어서다.


오늘 B에게 너무 요구만 했던 것 같아 조금 미안했어요. 미드필더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싶은 마음과 욕심이 있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ㅋㅋ B와 저의 포지션이 다른데 자꾸 겹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근데 3쿼터 들어가면서 B가 성격상 지시하는 게 어려워서 자꾸 뛰쳐나가게 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이해가 가고 또 같이 변화해 가는 모습이 감동이었어요. 같이 오래 훈련하다 보니 이런 재미도 있네요! 우리 내년에는 꼭 같이 대회 나가요! 글구 담주에는 꼭 총각김치 가져갈게요~!


B 역시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필요하면 요구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의식한 상태에서 겹치진 않거든요. 그래서 해원이 겹친다고 했을 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상황인지가 궁금했어요. 어떤 때 내가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겹치고 있는지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황이 된다면 경기 중에 알려주면 젤 좋구요. 여튼 잘해보고자 그런 것이라 생각해서 상처를 받거나 하진 않았어요. 앞으로도 재밌게 축구했으면 좋겠네요. 잘 쉬고 담 주에 봐요~


나는 다시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이 문자 역시 우리의 앞날을 위해서다. 우린 앞으로도 오래오래 같이 뛸 테니까.


좋아요! 지금 생각해 보니 실제로 겹쳤다고 느낀 건 초반이었고 뒤로 갈수록은 포지션이 변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좀 혼란스러웠어요. 저는 미드필더였으니까 중앙을 지키고 조율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수비수인 B가 저보다 앞으로 나가니까 제가 뒤를 지켜야 하는 순간이 많다고 느꼈거든요.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코치님이 자꾸 B에게 앞으로 나가라고 하고 저랑 맞추면 된다고 하니까 거기서 또 2차 혼란이 오고ㅋㅋㅋ 그랬던 거 같아요. 아무튼 저의 부족함도 컸다는 생각도 들고 B가 말한 것처럼 경기 중에 더 적극적으로 조율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다시 B의 답장이 도착했다.


저도 이렇게 포지션 하는 건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던 거 같아요. 때때로 확신이 안 들 때도 있었고요. 여튼 그래서 생긴 일들이겠지요? 앞으로 조금씩 더 맞춰나가면 되겠지요?! 앞으로도 이야기 많이 해 주세요. 시합할 때는 대부분 정신이 없는 상태 라서요. 그럼 잘 쉬고 담주에 봐여~~


장문의 문자 네 통으로 대화는 마무리됐다. 나는 또 감격했다. 우리가 이렇게 포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과 서로의 플레이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그리고 항상 일주일 뒤에 만나 함께 축구하는 사이라는 것에. 축구가 재미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생겨났다. 매주 같이 뛰는 친구들을 알아가는 재미다. 성격이 나오는 축구 때문에 우리는 같이 뛰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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