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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Oct 29. 2022

'관크'가 너무해

intermission

후끈하게 끈적이는 여름밤, 뒤척여본 누군가라면 알 거다.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단잠에 빠지려는 순간 귓가에 앵앵거리는 모기의 날갯짓 소리를.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를 말이다. 낮에는 들리지도 않던 것이 어찌나 거슬리는지. 사소한 생명의 끝에서 나는 굉음. 누군가 극장에서 말 좀 하는 거 가지고 유난이다,라고 운을 떼면 나는 이 비유를 들어 설득하기를 좋아한다. 


'관크'는 객석에 앉는 '관객'과 치명타를 뜻하는 은어 '크리티컬(Critical)'을 합쳐 만들어진 단어다. 관객 크리티컬이라는 풀 네임이 너무 길어서인지, 앞자를 따 보통 관크라고 부른다. 풀어 설명하면, 한 관객이 다른 관객의 공연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공연장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관객이 있는 영화관이나 미술관에서도 종종 소환된다. 


하우스어셔의 주된 소임 중 하나가 이 관크를 막아내는 것이다. 모두가 쾌적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집을 정리하는 셈이다. 문제는 관크에 대한 이해가 천차만별이라는 데 있다. 우선 '공연장이 이리도 시끄러운데, 어떻게 옆 관객에게 내 소리가 들릴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관객이 많다. 관크의 개념을 알고 있더라도, 자신이 지금 다른 사람의 공연 관람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이 모인 공간이니 날 수밖에 없는 작은 소리도 관크로 받아들이는 사례가 존재한다. 


누가 옳고 누가 틀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문화는 물론 공연의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관크의 기준이기에 그렇다. 


극장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밀폐 구조로 설계된다. 그 안에서 생겨나는 소리와 빛이 온전히 고이는 공간이라는 이야기다. 모든 자리는 비행기의 제일 저렴한 좌석만큼이나 좁아서, 옆 사람과 가까이 앉아야 한다. 그러니 그 안에서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고, 조그마한 뒤척임도 큰 진동이 된다. 마치 한낮에는 일어나는지도 몰랐던 벌레의 활공이, 한밤에는 내 잠을 깨우는 것과 같다. 그러니 놀라지 마시라. 당황스럽겠지만(또는 누군가에겐 당연하겠지만), 아래 적을 내용은 모두 함께하는 관객을 위해 객석 안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들이다. 


가장 흔한 것부터 가 볼까. 각종 소음이다. 귓속말을 포함한 말소리와 전자기기를 끄지 않아 들리는 알람이 여기에 속한다. 귓속말이 들리냐고? 들린다. 연인 사이의 밀담은 나도 듣고 싶지 않았다. 기어이 그 내용을 알아차리고 말았지만. 공연에 대한 감상은 공연이 종료된 후 해 주면 좋겠다. 다른 관객의 생각은 필요할 때 얼마든 찾아볼 수 있으니, 말로 전달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전자기기는 전원을 종료하면 어떨까. 스스로도 모르게 맞춰둔 알람은 생각보다 자주 울린다. 


다음으로, 다양한 빛이다. 객석이 어두워서 낮은 빛도 눈에 띈다. 언젠가 무대에 올라가 본 일이 있다. 그때 불 꺼진 객석에 앉은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내겠다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어릴 적 손전등을 턱 밑에 두고 누군가를 놀라게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 사람의 얼굴만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휴대전화와 스마트워치는 모두 끄는 편이 좋다. 공연이 지루하더라도, 이를 맘에 들어하는 동료 관객과 무대에서 열심을 다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잠깐만 참으면 된다. 


마지막은 여러 냄새다. 음식을 먹거나 신발을 벗는 일은 멈춰달라. 한 사람에게 괜찮은 냄새라고 해서, 모두에게 좋지는 않다. 대부분의 객석은 음식물 반입을 철저히 제한한다. 그러니, 객석에서 음식을 먹으면 극장의 규칙도 어기고 다른 관객의 관람도 방해하게 된다. 공공장소에서 신발을 벗지 않는 것은 공중도덕이라는 거창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공간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내가 주의할 수 있는 조각에는 마음을 기울이고, 같이 쓰기에 이해해야 하는 지점은 너그러이 생각한다. 내 마음의 집과 다른 이의 마음의 집은 맞닿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며, 나와 내 옆 관객이 함께 있기에 오늘의 공연이 만들어진다는 확신을 지니며. 


인터미션이 저물어간다. 이제 피날레를 맞이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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