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민 Oct 23. 2022

괜찮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 연극을 위한 변론

act 2 scene 3

하우스 어셔로 일하며 얻은 기술 중에 하나는, 아주 작게 말하는 것이다. 소곤소곤 속삭이면서도 선명한 발음을 유지하는 능력 말이다. 나는 두드러질 정도로 크고 높은 목소리를 갖고 태어났는데, 극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소리가 미워졌다. 공연 중 큰 소리로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는 관객을 발견하거나, 객석에서 음식을 까 먹는 사람을 찾아냈을 때 민망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에 소리 없이 다가가 더 작은 볼륨으로 주의를 주는 것이 일이었으므로 나는 아주 미세한 소리를 만들어내야 했다.


특별히 작은 말소리를 유지해야 하는 건 연극의 한중간이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연극의 서사는 마이크 없이 배우의 음성만으로 전달된다. 순전히 텍스트만으로 이 많은 관객의 세계를 뒤흔들어야 하는 데다, 이 점 때문에 진중하고 섬세한 기체를 풍기는 이야기를 많이 다룬다. 모두가 몰입할 때 만들어지는 현상이기에 연극은 작은 소리에도 쉽게 바스러진다. 하우스 어셔의 몫은 그 집을 지켜내는 일이다. 흩어지는 모래성을 조그만 소리로, 자분자분 토닥이는 것.


가늘고 고우며 연약하다는 연극의 성정은 곧바로 그 매력이 되어주었다. 사람의 기분을 읽는데 능한 나는 작은 불안도 견디지 못해 종종거리는 일이 잦았다. 가끔은 그 기질이 도움이었다. 누구에게나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존재로 둔갑할 수 있었으므로.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의 집을 지켜내는 데는 하등 좋을 것이 없었다. 벽지에 슨 작은 곰팡이에도 떨었으며 겨울바람을 이기지 못한 풀이 힘을 놓으면 애도를 멈추지 못했다. 튼튼하고 높은 마음의 집을 지어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마음을 바쳐 부러워했고, 은밀히 시기했다. 이런 내게 부서질 듯 얇게 주조되는 연극의 두께는 나만 그렇지 않다는 신호였다.


닿은 적 없지만 확실한 존재와 나 사이에, 고이는 울림.


무른 존재가 담아내는 생각은 늘 섬약한 쪽으로 흘렀다. 연극의 관심은 보통 쓸쓸한 존재들에 있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어버린 사람이나 삶의 급류가 쓸어가 버린 빈터를 지키는 누군가가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은 마음껏 슬퍼했다. 작은 시련에도 아파했고, 긴 호흡으로 울음을 토했다. 약하고 하찮고 쓸모없으며 예민한 하류들. 생산적이지 못해 괜찮지 않음으로 밀려났던 이들은 연극의 세계로 귀환했다. 무대 위로 초대받았으며, 연극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았다. 공연이 끝나면 어김없이 깨어졌지만. 잠깐이라도 괜찮은 존재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약한 연극이 가진 힘은 가장 강력했다. 급박한 삶이 쌓아 올린 철옹성에 던지는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느린 속도이지만 천천히, 그러나 틀림없이 벽을 부수고 새로운 집을 짓는 작용이었다. 작은 소리에도 지지만, 더 미세한 것으로 이기게 되는 세상. 괜찮지 않은 존재가 모여 서로의 비참함을 어루만지는 곳. 그것이 연극의 세계였다. 물리와 생각이 이어져 발생하는 떨림은, 객석과 무대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하우스 어셔가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이었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나는 연극의 집을 지키며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는 세상의 모두를 전심으로 사랑해 보겠다는 달뜬 꿈을 꾸게 되었다. 미워하는 게 사랑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귀중한 조각을 받아내기도 했다. 뭉그러진 마음으로 더 연약한 삶을 사랑하는 곳, 그렇기에 괜찮지 않음이 괜찮음이 될 수 있는 곳.


아니, 괜찮음 따위의 하찮음을 거부하는 강한 곳. 그곳의 번지는 연극일 테다.













이전 05화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누구에게는 닫혀있는 집에 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