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2 scene 2
공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지인에게 물은 적이 있다. 공연의 어떤 점이 싫어? 돌아온 답변이 재미있었다. 지루하다거나 좁고 복잡한 극장이 싫다는 식의 이유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시작되는 노래가 어색하다고 했다. 마음이 무너지거나 눈물이 날 것 같을 때 여지없이 들려오는 선율. 바이올린이 짤랑거리고 피아노가 날아다니면 물밀듯 현실이 자각된다고 했다. 자신이라면 으레 술을 진창 마신 다음 아이스크림을 퍼먹거나,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뽑아낼 거라나. 속이 상하는 날 아무도 없는 방에서 스멀거리는 독백은? 그것도 궁색하다지.
공연이 시작하면 하우스어셔는 그날의 포지션에 따라 움직인다. 어떤 사람은 객석 밖에서, 다른 이는 객석 안에서 근무를 이어간다. 객석 안쪽에 배치받은 하우스어셔는 '모니터링' 담당이다. 예상하는 그 일이 맞다. 객석 안을 감시하는 일이다. 특이사항은 없는지, 공연은 잘 흘러가고 있는지를 살피면 된다. 다른 관객에 불편을 끼치는 관객이 있다면 조용히 다가가 주의하라고 한다. 중간 퇴장을 원하는 관객을 돕고, 무대에 이상이 생겨 공연이 멈추면 관객을 안내한다.
모니터링은 주로 접이식 철제의자를 깔고 객석 끄트머리에 앉아 한다. 판매하지 않는 좌석을 잠깐 점유하는 것이기에 시야 방해가 많다. 무대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만 아스라이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모니터링석에 앉으면, 나의 집중은 자연히 소리 쪽으로 기울곤 했다. 관객이 내는 소리, 공조기가 부지런히 제 일을 하는 소리, 그리고 배우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에 마음이 움직였다. 노랫말에는 다양한 일상이 담겼다. 가끔은 일상의 무료함이, 언젠가는 인생을 걸어도 좋을 만큼 황홀한 사랑이, 때때로 불타는 분노가, 드물게 삶을 무너뜨리는 슬픔이 있었다.
나는 노래가 좋았다. 표현이 서툰 내게, 몸집을 부풀린 채 터지고야 마는 감정의 극단이 되어주었으니까. 섬려한 멜로디를 타고 날아오르는 말들은 괜찮다는 속삭임을 남겼다. 슬플 땐 슬프다, 기쁠 땐 기쁘다 말해도 문제될 거 없다고.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보통의 순간을 고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납작한 사랑을 영원한 여름으로, 까만 눈동자를 천국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글 속에 있다. 그리고 내가 연극과 뮤지컬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일의 고유함을 기어이 찾아내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나 용인되던 감정의 도약이 사람의 몸을 입은 채 활보한다. 평범한 높낮이의 말에 지치면, 악기와 함께 말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무대 위 노래를 통해 나는 삶의 겹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그 누구의 삶도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모든 인생에는 뛰어나거나 색다른 깊이가 있고, 노래는 그 깊이를 기리는 수행인 거였다.
나는 얼마 전부터 노래를 배운다. 뮤지컬 속 음악을 다루는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친절한데다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재능이 있는 나의 선생님은 이런 말로 가르친 적이 있다. 표현하는 사람은 자기 감정에 젖어있으면 안 된다고. 도리어 직관적으로 느끼고, 그걸 말하기 시작하는 거라고.
나에게는 그것이 이렇게 들렸다. 무대 위의 모든 인물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다고. 보이는 대로 행동하고, 감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무대의 규칙이라고. 아픔이나 행복을 줄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해피엔딩이 기다리는 삶을 살아낼 거라고.
무대 위 과장된 표정과 말이 어색하다는 B에게 이제야 고백한다.
나는 슬플 때 노래를 불러. 내 몸이 담을 수 있는 최대의 호흡과 불편한 마음만큼 찡그린 표정을 더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