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있나요?'
나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없다고 답하고 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도 그 어떤 말도 공기 중에 뱉을 수가 없었다. 매년 한 번씩 아니, 그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또 다른 내가 된 순간에 읽고 싶다. 그러한 책이다. 또 다른 내가 되었을 때 마주하고 싶은 책.
몇 년 뒤의 펼침이 될지 함부로 예측할 수 없지만 나의 가치관이 변하는 순간마다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싶다. 변하는 순간을 잡기 위해선 나의 생각들을 꾸준히 기록해야겠구나
와 같은 생각들이 둥둥 수면 위로 떠올랐다.
책 속에는 하밀 할아버지, 로자 아주머니, 주인공인 모모가 등장하고 그 외의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들도 희미하게나마 서술되어 있다. 젊은 시절 매춘부로 생활고를 이어가던 로자 아주머니는 모모를 포함하여 고아인 아이들을 보살피며 삶을 영위해나간다. (단기 혹은 장기로 아이의 부모로부터 작은 생활비를 받으며 보살펴주는 경우도 있고 생활비가 끊겨도 그저 보살펴주는 경우도 있다) 약간의 스포와 함께 설명해보자면, 실은 모모는 10살이 아니었다. 로자 아주머니가 모모를 아끼는 나머지, 모모가 자신의 나이를 알면 혹여나 떠날까봐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모모의 아버지는 후에 찾아오지만 (모모의 어머니를 죽인 장본인이다) 모모는 로자아주머니의 편에서 이야기를 하고 꽤나 냉담하게 그를 대한다. 이 후 로자아주머니의 생의 마감과 함께, 새로운 가정에서의 모모의 출발로 소설을 끝이 난다.
1. 자기, 그리고 그 앞의 생
고등학생 때 수행평가로 제출한 작문 제목이 ‘행복이란 무엇인가'였다.어느 덧 대학교를 졸업한 나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더욱 중심을 가하는 삶을 살고 있다. 행복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통찰이 필요조건이다. 반대로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도 행복에 대한 고찰도 마찬가지이고.
태어남부터가 생이다. 가만히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생이고 불완전하며 무의미하고 논리로써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이 생이다. 타인이 경험하고 있는 생들을 눈을 감을 때까지도 온전히 경험할 수 없되 나의 앞의 생만큼은 사무치게 경험할 수 있는 것, 그게 생의 필연적인 특징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생과 사랑은 떨어트려 생각할 수 없는 필연적으로 묶여있는, 어쩌면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는 그런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책 속 로자 아주머니는 자신의 삶이 불우하다고 늘 생각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늙은 자신의 커다랗고 낡은 몸덩어리를 끌고서까지도 매춘을 한다. 자기 자신이 불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실로 불우한 자일지라도 삶의 욕구가 전제되어 있고, 삶의 목적이 있다면 자기 앞의 생의 형태가 어떨지라도 살아내는 힘을 가져가는구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지하실로 내려가 (이웃에겐 멀리 떠났다고 거짓말하는 모모) 악취가 나는 자신의 몸에 향수를 뿌려달라고 모모에게 요구한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놓았다가 붙잡았다가 하는 이런 묘사들이 불쾌할 때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상하게 희열과 웃음을 유발하는 •• 감정들이 복잡한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복합적인 감정 중에 가장 큰 부피를 차지 하고 있던 감정은 애처로움이었다. 그들의 생의 형태가 너무나도 애처롭다. 특히 로자아주머니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모의 대사들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책은 개인이 마주하고 있는 삶의 단편적인 면들이 상이하고, 생은 이분법적인 단어들 중 하나로 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더불나 자기 앞에 놓여진 그것을 애지중지하며 살아갈지 흘려보내며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갈지. 그 태도 또한 보여주는 책이다.
2. 사랑과 생
‘사랑을 미워할 때까지’.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단어 뒤로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내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출판한 에세이의 제목이기도 하다. 사랑을 우리가 미워하지 않는 이상,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멈출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적은 문구였다. 여전히 그렇다. 나에게는 사랑을 하는 것이 곧 생의 정의이다. 사랑을 아주 증오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실로 이 책 속에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드러나 있다.
하밀할아버지의 문장들이 이상하게 내 마음에 오래 남아있다.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과 그 추억만큼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던 그 말들이 무색하게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치매로 인해 자신의 이름마저 헷갈려한다.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데 어찌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을 기억하겠는가.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하며 살아가지만 실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품고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완전하게 품고 가지 못함도 사랑의 일부라는 것을 •• 느꼈다.
모모의 사랑은 고귀하다. 세상 속에서는 천하게 여겨지고 가끔은 역겨운 존재로, 늙은 존재로 여겨지는 로자아주머니를 사랑하는 모모. 자신을 보살펴주는 그 한 여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금은 늙은 할머니고 치매까지 걸려서 벽에 소변을 보는 그녀를 사랑하는 모모의 마음이 고귀하지 않는가? 모모는 세상의 그 어떤 시선에도 불구하고 로자 아주마니가 가진 사랑과 마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고 그 사랑을 갚아주려고 노력하는 사랑의 형태를 보인다. 아름답다.
그 외에도 로자아주머니와 모모 아버지의 사랑의 형태도 다양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형태가 다양한만큼 사랑의 대상의 존재유무도 사랑의 형태에 영향을 미칠 텐데.•• 모모는 사랑없이 사람은 살 수 없고 사랑의 대상 목적이 있어야함을 깨달았던 걸까?
사랑의 형태는 정의내릴 수 없다. 사랑을 멈추며 살아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생의 정의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