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자의 잡생각
맹지(盲地)
: 도로와 맞닿은 부분이 전혀 없는 토지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땅이다.
과거 조경회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전국 여기저기 토지를 사서,
나무를 키우고 납품하시곤 했었다.
언젠가 큰 공사를 수주하셨으나
(당시 가족끼리 기쁨의 파티를 했던 것 같다.)
때마침 IMF가 발생하여,
대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이미 진행했던 공사비 지급을 위해
다른 지역의 토지를 모두 정리하셨고,
이 땅 하나만 남게 되었다.
육아 휴직 기간,
주식투자도 나름 성공하여
생활이 여유로워졌겠다,
내 집도 장만하는 운도 발생했겠다,
꼬마빌딩이지만 건물을 매매한 경험도 있겠다,
손만 대면 다 이루어질 것 같은 자신감에
아버지가 수 십 년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토지를
한 번 매도해 보겠다고 나섰다.
당시 부동산 관련 책도 제법 읽은 나로서는
이 일 역시 나의 지식과 운이면
쉽게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맹지 분석]
- 큰 도로가 가까이 있음
- 토지에 길을 내기 위해선 최소 2명 정도의 땅을
지나쳐야 함
- 도로를 사이로 맞은편은 공장지역이고,
이쪽 토지는 모두 농지
- 길 건너편과 이쪽의 토지 가격은 4-5배 정도의
가격차이가 남
맹지를 팔기 위해선
길을 내야 하고,
최소 2명의 땅 주인의 협조가 필요하다.
난 오랫동안 기획일을 한 장점을 살려
멋진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다.
큰 도로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만 생기면,
맞은편 공장촌과 같이
토지가가 올라갈 수 있다는 장점을 설명하고,
길을 내기 위한 설계비용, 승인비용, 공사비까지
우리가 모두 감당을 할 터이니
함께 하자는 내용이다.
이후,
아버지의 땅과 큰 도로 사이의
토지 주인들을 수소문하여
연락처를 알아내고 연락을 했다.
만나야 할 토지 주인은 A와 B이다.
[A와의 면담]
나이가 80을 넘은 할아버지이시다.
멋진 사업계획서를 들고 가,
도로를 냈을 경우의 장점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한다.
(기획뿐만 아니라, 영업 경험도 있는 나이다.)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한참을 들으신다.
‘그래, 거의 다 설득되셨어.
이번에도 쉽게 일이 풀릴 거야.’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다 들은 A께서 말씀하신다.
“아.. 근디, 난 관심이 없구먼.
저~기 다른 쪽 땅 가진 B 하고
먼저 이야기해 봐야 하는 거 아닌 감?”
“아.. 네. 그럼 그분 만나 이야기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일단 B를 설득하고, A를 다시 만나야 할 것 같다.
[B와의 면담]
역시 나이가 80을 넘은 할아버지이시다.
난 또 열심히 설명을 하고,
B는 열심히 들으신다.
“근디.. 뭐하려고 팔라고 혀~ 귀찮은디..”
“아뇨, 아뇨, 어르신.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도로가 들어오면 토지가가 4-5배는 뛸 수 있고,
공사비 일체는 저희가 다 지불할 거고…”
“그걸 어떻게 믿어? 엉?
토지만 다 헤집어 놓고, 엉?
비용은 나중에 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어디서 사기를 칠라고 해?”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이시다.
이후,
두 분을 몇 번을 만나 이야기했는데
한 분이 관심 없어하시면,
다른 한 분은 화를 내며, 본인 이야기만 하시고,
또 어떤 때는 서로가 반대가 되기도 하고,
결말이 나지 않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무한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 버린 듯하다.
육아휴직 기간,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큰 벽에 막힌 느낌이다.
‘평생을 살며,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분들이 한 둘이 아니었어.’
좌절감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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