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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생경 Oct 24. 2024

7. 위로에 대하여

#1

어떤 눈물 나는 날에는 이유가 필요했다. 동족의 위로가 고픈 날이 가끔 나타난다. 뭐가 잘 안 풀리고 열심히 살아도 사는 게 어려운 날. 격려가 귀에 들어 오지 않고 못난 것만 보이다. 머리로는 큰일 아닌 거 아는데 가슴에서 겁이 난다. 세상은 내가 살아있음으로 존재한다고 하는데 저 없이도 잘 돌아가는데요. 왜 나는 이러지, 애써서 서러운 동굴을 판다. 눈물 날 거 같아요, 알아주세요, 구해주세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자기 선에서 설명이 안 되는 현상, 깊은 슬픔에 빠지기 전에 정신 차려. 되뇐다. 진정되지 않은 마음이 진정으로 위안받은 순간을 떠올려 본다.

떠오르지 않는다.


#2

고요했다. 앙리 루소의「잠자는 집시」 속 밝은 밤이었다. 사자가 온 줄도 모른 채 꿈을 꾸고있는 집시의 사막. (참고로 본 작품의 부제는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지 않는다’). 그 상황을 저지하지 않고 오롯하게 우는 것을 허용해 주는 특별한 환경, 나무라지지 않고 시선과 실수가 두렵지 않게끔 해주는 것. 서툰 토로, 고르지 못한 호흡을 기다려 주는 것, 목도함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지켜 주는 것에서 강한 공명감을 느꼈다. 너와 나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겼다. 백야에 지치지 않도록 떠들고만 싶고 지금처럼 수다쟁이가 된다. 기쁨의 눈물이 난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꾼다. 무화과가 열리고 지저귀는 파랑새 아사달과 아사녀의 아픔 따윈 없는 사랑만이 가득한 몽환의 숲에서 내 편이 있다는 사실이 치유적인 경험으로 이어진다.

모래 상자를 꾸미다가 위로를 받았다.



#3

위로(慰勞)하다는 것, 선한 동사다. 따듯한 행동으로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준다는 의미다. 사실은 이런 주저리 대신

◈슬픔에 빠진이를 구하기 위하여 적절한 위로방법의 다중 매개효과◈

서론- 위로의 필요성

이론적배경

위로 메뉴얼

결론- 위로의 위대함

으로 적어내려볼까도 싶었고 일기장을 펼쳐서 근사한 일화나 감동받은 어록하나 남기면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

위로의 흔적 (아련)…

하고 싶긴 했는데… 딱 떠오르는 문구나 그런건 없을 것 같아 말았다.

물론 들쳐보면 몇 문장 나올 테다. 하지만 혼자 보려고 쓴 글을 선한-영향력(싫어하는 말)인냥 포장해서 억지 감동 일으켜 보겠다고 꺼내오지 않으련다. 어줍잖은 위로는 말은 그대로 위험한 길(危路)로 가버린다. 그래서 요즘에는 누굴 위로 했다 전시하거나  달라고 한적도 없는 희망을 넘기려 하는 거, 오만한 짓은 지양하고자 이 장에는 위로하는 법 같은 건 등장하지 않는다.


#4

천성이 다습하다 보니 궁금해서 다가온 손짓에 물러지고 발길에 모양이 바뀌는 그런일이 다반사였다. 근데 그런 사람이 나혼자만은 아닐거 같아서, 막막한 날 물러진 마음 지탱할때 쓰라고 사랑 한두줄을 덧대주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내눈물에 잡아먹혀서 떠내려 가기전에 받았던 크고작은 구원, 요즘 품귀라는, 대유행, 모든 사람이 원하는! 다정을 나눔받은 경험을 살려 우는 사람 덜 울리던 위로에 대해 수다를 떨어보고 싶었다.


#5

머물러 주는 것은 곧 속단하지 않는 것을 전제한다. 그 사람의 세상에 방문객이 입장에서 세상을 뒤흔들 필요는 없다. 진정 위로하고자 하면 선입견을 품으면 안 된다. 때에 따라 왜 저이가 저러고 있는지 투명하게 보이는 것 같을 것이다. ‘으이구 답답아 넌 지금…’ 직면시키고 싶고 도망치지 말라고 팩트폭행을 하고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수도 있겠다.

대안을 제시해 주고 싶은 마음. 한데 그건 당신의 욕구진 않은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위로에 당신의 생각으로 채울 권한이 없다. 가슴에 손을 얹고서 선민의식이 앞섰는지 고민해 보자. 위로는 우열이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내 그릇된 우월감으로 위로란 이름의 핀잔을 주고 싶던 건 아닌지.

 ~이래서 그렇다. ~저래서 아프다. 감정은 가변적이다. 기본적으로 참이 아닌 상태, 즉 영가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아프다. 시간이 흘러도 슬픔의 양상은 언제나 다르다. 로미오와 줄리엣, 젊은 베르테르,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이 모두 다른 이유는 불행한 사랑은 각기 나름의 형태로 불행하기 때문이다.


#6

주입식 위로, 책임없는 토닥거림에 대해 혐오하는 것은 그것을 해본 과오가 있기 때문이다. 건방진 해석. 연애도 몇 번 해보고 사회생활도 해보고 마음공부도 했더니 이젠 뭔가 알 것 같다(2024.10 : 여전히 모름)고 난 나 같은 이를 구하겠어, 스스로를 판단하는 매우 교만한 상태에서 만난 사람이 있었다. ‘우린 서로를 살릴 수 있어’ 구원서사에 과몰입하여 시작한 사랑. 받은 마음을 주고 싶어서 급하게 ‘나도 그래’ 못 알아들은 공감을 시도했다. 거짓 위로는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만큼의 폭력적인 행위인 줄을 모르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소위 말해 잘 배운 사람의 다정함에 대하여 공감하는 것을 능력으로 보고 정서지능의 영역으로 삼는 그런 군상에 합류해 보고 싶었나 보다. 미쳤던 거다.


#7

우리 테마송은 검정치마의「Everything」인 줄 알았다. 내 여름 영원,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을 바치려 했는데「좋아해 줘」였던거다. 날 좋아해 줘 아무런 조건 없이 엄마 아빠보다 더 뜨거운 말로 믿음을 내놓으라고 한다. 이 노래는 마지막 소절이 팩트다.

그래도 내가 싫어졌다면

그건 아마 너의 잘못일 거야.

우리 사랑은 비문이 되고 위로의 순간은 모순인 것이다. 조건부 사랑, 대충 배운 다정으로 인하여 우리 사랑은 쌍방 폭행으로 끝났다. 누가 가해자랄 것도 없다. 위선이라는 특수폭행을 저지른 셈이 되었다. 한때 가까웠던 사람은 그런 다정함에선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하며 떠났다.

시체꽃에 파리가 꼬인다.


#8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같은 상황이 아닌 것을 가정하며 위로하고자 할 준비와 입장이 되었을 때는 ‘어떤’ 연유인지는 상대로부터 출발하게 두었으면 한다. 그저 따라가 주었으면 한다. 울고 싶으면 울게끔 하고 뭔가 말하고 싶으면 들어주고 머리카락 울 때 좀 신경 쓰이는 거 같으면 넘겨주고 입에 들어가니까 눈물 좀 닦아 주는 정도 감정의 흐름을 살피면서 그 사람을 천천히 읽어본다. 걔가 잘못했네, 누가 그랬어, (쌍욕을 한다던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구구절절 맞장구를 치지 않아도 되고 딴짓을 멈추고 시선을 그이에게 향하고 바라봐준다.

심리학 학위가 없어도 상담 장면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을 온전히 자체로 바라볼 수 있다면, 위로는 학력 나이가 무관하게 지원 해볼 만하다. 말 없는 다정히 울적한 사람 천리 걸음만큼 버틸 힘을 주는 게 가능하다. 특히 울어본 사람들 다정한 사람들 덕에 살아갈 힘이 생겨본 이들, 자기 눈물도 벅찼는데 소금물에 다시 빠질 감당이 안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단 들어가 보면 몸이 기억할 것이다. 아 나는 사막이었지만 이 사람은 깊고 푸른 바다였구나. 그 사람의 바다에서 둥둥 떠내려가 보자. 허우적대지 말고 그 사람의 세계를 느끼자.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고, 그 고통 속에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섬세한 위로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을 탐구하고, 그 감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한 결과이다. 아파 봤으니까, 여기는 가라앉는 곳이 아닌 곳을 알고 힘을 풀 수 있다. 너의 아픔에 대해 잠겨 죽어도 좋으니, 물처럼 밀려오라고 두 팔을 벌려볼 수 있는 것 그런 상태, 달래려 하지 않는 것.


#9

위로의 진정은 이런 것에서 나온다. 참/거짓 영역의 해결책과 판단은 나중의 일이다. 판단은 당신보다 AI가 더 잘한다. 인간은 인간이 위로해 보자. 상대방의 감정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그들이 느끼는 고통을 바라보는 것에서 나온다. 불교에서의 자비(慈悲), 기독교의 사랑 같은 궤를 가져가지 않을까.

로저스(Carl Rogers)가 제시한 인간 중심이론(Person-Centered Theory)에서 인간은 자기 안에서 스스로 성장하고 변화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내면의 힘을 믿으면 누군가를 위로할 때 그 사람의 감정을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들이 스스로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끔 아픔에 대하여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그 자리에 함께 머물러 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무(無)조건적인’ 수용과 함께 느끼는 공감적 이해, 가식이나 겉치레가 아닌 순수한 진실성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달래는 만들, 돌아서면 그만이야. 아픈이여 단내난다고 남에게 기대지 말자.


#10

오히려 울고 싶으면 울게 하고 말하고 싶으면 말할 수 있도록 그 순간을 경험하며 스스로 성찰하고 내면의 갈등을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이다. 에히리프롬「사랑의 기술」에서도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사랑의 궁극적인 형태인 ‘적극적 사랑’은 나의 세계가 아닌 그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숨 참고 러브다이브를 해봤다면, 그 안에서 숨을 쉴 수 있단 것을 알았으면 깊은 이해가 시작된 것이다. 마침내 사랑으로서 기능하며 상대방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책임과 수용해 낼 수 있음을 알려준다.


#11

당신, 난데없는 글을 읽어준 것만으로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알아도 모르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 사람의 세계를 감상하고 따라가 주길 바란다. 결국 눈물을 그쳐야 하는 사람은 눈물 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살아가려는 힘과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어주시옵고 눈물을 흘리는 너를 보고 있고 너의 내면을 느끼고 있고 언제나 사랑하고 있음을 알려주시길 다정과 함께해 주시길.

아……ㄹ 러브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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