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다닌 유치원은 불교 유치원이었다. 노란 봉고차를 차고 동그란 연못을 지나 법당에서 인사를 했었나. 마루에 신발을 벗고 교실로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특이한 기억은 해우소가 있었다. 이게 맞는 기억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관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화장실(해우소)가 있는 곳이었다.
7살에 처음 유치원을 다니며 또래들과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친한 동네 친구도 없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앉아", "기다려" 등의 예절을 배운 덕에 나름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엄마가 깔끔하게 꾸며 입혀주었고, 똘똘해 보이는 외모도 한몫했다. 어릴 때부터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도전 정신도 있었다. 울음이 많았지만 무대에서 춤추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다. 하얗고 곱상한 아이를 몰래 좋아하기도 했고, 한 살 어린 동생에게 어깨를 물린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림보다 글쓰기를 더 잘했던 것 같다. 1년 동안 유치원을 개근하며 스펀지처럼 빠르게 배운 덕분에 초등학교 생활에도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겨울이 찾아오며 유치원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경험했다. '울면 안 돼'라는 노래를 불렀고, 산타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며 반짝이 풀을 처음 써봤는데, 끈적이는 풀 위에 반짝이는 가루가 얼마나 오래 굳지 않던지 기억이 난다. 요즘은 전문 산타가 있지만, 당시 유치원에서는 스님이 산타로 변장해 선물을 나눠주었다. 근사하게 꾸며놓고 신나지 않았지만, 종교 다양성을 일찍부터 준비한 절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부모님이 준비한 선물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냉장고 위에 선물이 놓여 있었는데, 손만 닿지 않을 뿐 그 형태가 너무 잘 보였다. 또 크리스마스에 대한 감수성이 없던 부모님이 유치원과 대놓고 전화로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었다. 내가 자주 우니까 좀 더 씩씩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자아이 옷을 입히고, 남자아이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주라는 내용이었다. 유치원을 다니며 가족들은 모두 내가 울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행사 당일, 올백으로 머리를 질끈 묶고 흰 목티에 검정 패딩 멜빵바지, 파란 운동화를 신었다. 산타 스님 할아버지의 덕담을 듣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순간을 담은 사진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여기에 첨부했을 것이다. 눈을 떠 받은 것은 건담 같은 로봇 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과 하늘색 케이스에 담긴 12색 크레파스였다.
이 일화를 돌이킬 때마다 자꾸 의문이 든다.
‘눈물에 성별이 있었던가?’
눈물은 나를 설명하는 성격 특성 중 하나였다. 친구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다. 발표도 잘했다. 한글도 무난했고 구구단도 잘 외울 정도로 인지적인 부분은 곧잘 따라갔다. 하지만 반에서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없어서 울고 의사놀이가 뭔지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게 어려워 울고 수업이 끝나니까 울고 치고받고 싸우다 우는 것은, 그저 자극과 통제에 민감한 것이었지 여자아이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는 그동안 사교육과 임상에서 아동들을 만나면서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공유되는 생각이나 믿음 중 하나가 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에 대해 여성적인 성별을 부여하고 파워가 약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일화에서 나는 '여자아이처럼 약해지지 않기 위해' 남자아이의 옷을 입고 남자아이의 선물을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나에게 눈물이 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을 강화하게 하고 더 씩씩하게 살아야 된다 라는 메시지를 강요했다. 내가 기질이나 발달적인 특성이 어떻고 간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취약점으로 여겨지는 것은 남성에게는 ‘남자는 잘 울지 않지’ 라며 눈물을 금기시하는 것에서 여성에게는 ‘여자는 잘 울지’라는 여린 이미지로 연결시키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눈물이 약하다는 사회적 인식은 여성의 눈물이 감정적이며 약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되며, 남성에게는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는 강한 기대가 부과된다. 여러 선행연구에서는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성 역할 모델을 관찰하며 성별에 따른 기대를 학습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Bem (1981)의 성 도식 이론에 따르면, 어린이는 성별에 따른 사회적 기대를 인지적 구조로 내면화하며, 이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특정 성 역할에 맞춰 자신을 적응시키려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성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억제하는 것이 "남자답다"라고 여겨지고, 여성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여자답다"라고 여겨진다.
또한, Brody & Hall (2008)은 어린 시절의 사회화 과정을 통해 남성과 여성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여성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고 심지어 장려되지만, 남성은 감정을 억누르고 강인함을 유지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어린 시절부터 점점 강화되며, 남성에게 감정을 억제하고 "강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고, 여성에게는 감정 표현을 연약하지만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감정 표현은 연약하지만 받아들여지며, 남성의 눈물은 강함을 증명해야 하는 압박 속에서 금기시된다. 이러한 사회화는 감정 표현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결국 "여자아이들은 감정적이다"라는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
Chaplin (2015)의 연구에 따르면, 감정을 자주 표현하는 여성은 사회적으로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평가받기 쉽고, 그로 인해 여성의 눈물은 종종 감정의 과잉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은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강요된 사회적 기대에서 비롯되어 나타났고, 성장하면서 이 기대가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이것이 내가 자라면서 "쟤는 여려", "멘탈이 약해"라는 평가를 받게 된 배경이다.
눈물은 젠더의 경계를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감정이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눈물을 다르게 바라보던 시각에 대해 부정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어린 시절 사나이는 세상에 태어날 때 1번, 부모죽음 앞에서 흘리며 2번(부모님이 한날한시에 죽지 않으면?, 주양육자가 다르면? 눈물허용수가 이상해진다), 나라가 망했을 때 3번만 운다 라는 표현을 들으며 자란 세대로서 남성의 눈물은 금지되고, 여성의 눈물은 특성을 극대화하고 여린 이미지로 허용되는 것을 보았다.
돌이켜보면 울보 눈에는 울보만 보인다고 종종 남자아이들이 울음을 참아내는 모습을 보았다.
성별에 따른 감정 억압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감정적 건강과 연결되어 있다. 남성들은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기대 때문에 내면의 문제를 제때 표현하지 못하고, 이는 종종 정신 건강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여성은 감정적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할 때조차 그 진정성이 의심받거나 과소평가된다. 이러한 성별 고정관념은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에서 감정의 표현을 왜곡하고, 상호 이해와 공감의 문화를 저해한다.
몇십 년이 흘렀다. 남성도 눈물을 보이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지만, 여전히 미디어에 간간히 등장하는 서럽게 우는 남성에게 '예쁘게 운다'는 평가에서 보듯 사회적 기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 역시 그동안 울음을 억제했던 남성이 우는 모습이 주는 신선함과 낯섦에서 비롯된 매력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는 여전히 남성의 눈물이 드문 일로 간주되기 때문에 생기는 반응일 수 있다. 즉, 남성의 눈물에 대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배경에는 여전히 성별에 따른 눈물의 규제와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남성이 울 때, 그 순간은 특별하고 놀라운 일처럼 여겨진다. 남성의 눈물은 드물기에 더욱 무게감 있고 강렬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남성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 마치 금기의 선을 넘어서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눈물은 남성들이 그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억누르는 결과를 낳는다. 눈물이란 감정표현일 뿐인데, 왜 남성에게는 그토록 큰 장벽이 되어야 했을까.
울음이란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로 흘리는 눈물은 '약자'나 '감정표현이 과한', '여자 같다'라는 낙인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고, 나처럼 ‘나는 왜 울보인 걸까 흑흑’ 하는 자괴감을 만들어 내게 하고 울음의 가치와 의미를 저해한다.
눈물은 인간이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남성도, 여성도, 그 누구도 눈물을 억제하지 않고 온전히 흘릴 수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곳에서는 성별적 구분을 떠나 인간다운 감정의 표출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그저 울고 싶다.
난 내 눈물에 암수를 나눈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