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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세경 Oct 27. 2024

14. 지금 울겠다

스스로 내구역이라고 생각한 곳에 실내외를 막론하고 잘 눕는 편이다. 어떤이의 등짝부터 친지네의 쇼파, 작업실 책상 위에서도 누워 있다가 수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앉아있음으로서 간을 보았다. 도서관 앞 벤치에 처음 누웠을 때가 꼭 그랬다.


집 앞(그러니까 학교) 도서관에는 이팝나무가 있는데, 직전에 살던 동네가 생각나 자주 앉아봤다. 대화도 나누고 흡연구역 옆이다 보니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과제를 하면, 간접흡연이 달달했었다. 그러다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제 눕고 싶어졌다. 다리를 쭉 펴고 가슴 위에 손을 올려둔다. 죽은 것처럼 눈을 감는다. 가루도 향기도 없는 꽃그늘을 덮고 꽃살랑이는 바람샤워를 한다. 또래들은 다 어디서 일하고 있을 텐데 한량처럼 눈을 감고 일광욕을 하는 상황에서도

‘지금 하는 것들이 소용없으면 어떡하지’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면 어떡하지’

‘이 사람이 우리 집 찾아오면 어떡하지’

‘연구주제 엎어지면 어떡하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잘 안 풀리면 어떡하지’

‘나의 지난 삶이 꼬리표가 되면 어떡하지’

‘엄마가 돈 빌려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아빠가 아프다고 연락 오면 어떡하지’

‘공모전 결과가 시원찮으면 어떡하지’

‘잠탱이 마지막날에 나를 보고 싶어 하면 어떡하지’

‘이번달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아르바이트 못 구하면 어떡하지’

‘다음학기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의 꼬리의 끝에서 찔끔 나는 눈물은 아름다운 현실에 머무르지 못함을 증명한다. 미래의 걱정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켜 주는 결과다.


인사이드 아웃은 인간의 감정을 캐릭터로 형상화해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함께 풀어내는 영화다. 올해 개봉한 인사이드 아웃 2(2004)에서는 청소년기로 접어든 라일리의 성숙에 따라 새로운 감정 중 하나로 불안(Anxiety)이 등장했다. 라일리의 시선에 따라 변화하는 기쁨, 슬픔, 분노, 공포는 상황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지만, 불안의 시선은 언제나 미래로 향한다. 기쁨이를 대장감정으로 삼고 있던 감정 본부는 불안이의 등장으로 인해 일대 혼란에 빠지고, 주도권까지 빼앗길 정도로 불안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렇다면 작중 불안이가 대장감정이 되면 어떻게 될까?


남의 옷을 입고 지내고 사는 기분, 발제할 거리가 없는데 콘퍼런스에 참여하거나 , 시험 기간에 한잔 하며 놀면서도 불안해서 흥이 살지 않는 것, 그 이유는 대장감정이 불안이기 때문이다.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부탁이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헛소리 해서 망신을 당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들이 불안에 의해 당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불안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현상 너머를 바라본다. 자신이 창작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라일리가 현재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미래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예기불안이다.


불안이라는 개념도 그 종류가 많고 넓지만 불안이처럼 미래에 대해 대비하는 것, 그것이 과한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 '예기불안'과 연결된다. 예기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심지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상황에 대해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사이드 아웃 속 불안이 역시 자신을 라일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비하는 역할이라고 소개한다. 반면 소심이는 눈에 보이는 위험에 대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에서 각기 다른 불안과 두려움에 대비하며 라일리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 불안이가 너무 쎈 경우 감정의 주인이 현재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무언가를 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 (뭔지도 모르면서) 달라질 거라는 수만 가지의 예상들은 우리를 기쁨보다는 불안을 키우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도 지레 겁먹게 만든다.


인지행동치료(CBT)의 자동사고는 특정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로 이는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만약 자동사고가 '미래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부정적인 내용이면 예기불안을 유발한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부정적인 예측은 현실화되지 않는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걱정하는 일들의 85%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중 일어난 나머지 15%의 상황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일들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극복했다는 결과가 있는 만큼,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현재를 즐기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는 대개 근거 없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자동사고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의 경험을 놓치게 만든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얼마나 많은 마음과 눈물을 쏟고 살았는지, 내 눈물의 시점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눈물도 시간(時間)이 있다. 과거에 흘리는 눈물은 우리가 지나간 시간 속의 아픔과 후회, 또는 그리움 때문일 수 있다. 과거의 상처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흘리는 눈물은 그때의 감정과 다시 연결되는 순간일 때 울 수 도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눈물은 조금 다르다.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과거와 현재와 다른 영역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안이는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러운 감정일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받는 캐릭터로 남아있다. 예기불안 오는 것은 이론적인 것을 떠나 ‘잘 살고 싶어서’ 이기 때문이다. 졸업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금전적인 걸로 아쉬운 소리가 싫고, 강아지와 오래 함께하고 싶어서, 엄마도 더 이상 쪼들리지 않고 아빠도 아프지 않았으면 해서, 수없이 행복회로를 돌리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불안은 죄가 없다. 이러한 바람이 불면 불안에는 추진력이 생기는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 2>에서는 이런 회로를 돌리는 장면이 시각화하여 등장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두고 대비했지만 라일리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불안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공황상태를 겪고 불안이는 폭주하려 빙글빙글 돌아버린 불안이를 떼어놓는 것은 다름 아닌 기쁨(joy)이다. 기쁨으로 불안한 마음을 진정해 준다.

라일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네가 정하는 게 아냐. 불안아. 이제 라일리를 놔줘.


미래가 겁나서 울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 즉 마음챙김(Mindfulness)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음챙김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불안과 스트레스를 줄여나가는 명상적 접근이다. 현재의 순간에 흘리는 눈물은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기쁨, 감동, 또는 슬픔과 직면하는 과정이다.


집에 가는 길 여름 내내 울일이 많았다. 이미 한참 울다 왔다. 힘든 일 있으면 전화하라는 이들이 있었지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힘든 마음을 이끌 있는 그곳으로 간다. 여기는 들리는 곳이 아니라 기대는 곳이 되었다. 먼 길 가기 전에, 안전지대에 눕는다. 오늘은 비가 엄청 온다고 했는데 어수선한 구름만 뭉쳐있다. 선선한 바람을 눈가를 말린다. 하늘만 바라본다. 이팝꽃이 지고 녹음만이 가득하다. 잎 틈으로 비추는 빛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포부터 더듬는다. 닿는 곳마다 지금이다. 약을 먹어도 시끄럽던 소음이 걷힌다. 몽롱했던 머릿속에서 나쁜 말을 속삭이던 것들이 잊힌다. 지금은 뭐가 그리 슬프지 않다. 살아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상태. 마음에 불이 꺼지니까 나를 괴롭게 하던 것들을 물리칠 힘이 생긴다.


마음이 편해지냐고 물어봤다. 상대방은 모를 거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맨살에 긁힌 듯이 발작했는지. 근데 나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 삶에 어떤 마음인지는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도망치지 않을 거다. 난 나만 불쌍하지 않고 자책하지 않을 거다. 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본 경험으로 인해 당신의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난다. 7월 4일


난 이제 당신때문에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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