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음 Oct 13. 2023

오소리의 겨울잠

1월이 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뉴저지는 이때가 가장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사람들은 모일 일을 만들지 않고 조용히 추위를 견디며 반 동면상태에 들어간 듯했다. 플로리다 같은 곳으로 겨울을 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베이커리에는 마실을 나왔다가 추위에 기겁을 했거나 사람이 그립거나 특별히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드나들었다. 

아직 봄방학 중인 준이가 낮에 베이커리 일을 도왔다. 시키지 않아도 쌓인 눈을 퍼내고 고드름도 쳐내면서 쓸모 있게 굴었다. 덕분에 기숙 씨는 벽난로 앞에 앉아서 겨울 풍경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렌데일의 다운타운은 당장 마차가 지나간대도 이상할 것이 없을만치 그림 속의 옛날 거리와 같은 풍경이었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시간은 이곳과 다르게 흘러가는지 총격사건이 세 번 터졌다. 

샌프란시스코의 공원에서 첫 사건이 일어났고 바로 다음 날 뉴욕 한복판에서 또 다른 총격사건이 있었다. 

미국 전체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에 텍사스 오스틴의 대형마트에서 연이은 사건이 발생했다. 

모두 대상이 없는 혐오 범죄였고 안타깝게도 많은 사상자가 났다. 

하필 이런 때에 글랜데일 하이스쿨에 테러 예고 전화가 오면서 조용하던 마을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생겼다.


폭탄 테러 예고는 자동응답기에 녹음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곧 테러범의 신원을 알아냈고 허위 신고임도 확인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든 일은 매뉴얼 대로 진행되었다. 

고등학교는 즉각 폐쇄됐고 전교생은 중학교 건물의 체육관으로 대피했다. 학부모들에게 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아이들은 안전하게 대피했고, 만약을 대비해 수색 중이라는 이메일이 왔다. 

기숙 씨가 달려갔을 때 학교 주변은 이미 부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학교는 그야말로 전시를 방불케 했다. 

경찰견을 앞세운 경찰과 앰뷸런스와 소방차가 왔고 주 방위군이 도착했다. 방호복을 입은 군인들이 탐지기로 학교 내부는 물론 주차장과 잔디까지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수색은 오후 세 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일곱 시간을 갇혀 있던 아이들도 겨우 풀려났다. 

테러범으로 지목된 아이는 지난해에 전학을 온 아이로 한국계 남학생이었다.


형제가 전학을 왔다고 들은 것은 작년 봄이었다. 

그들이 한국계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었다. 윤이가 동생인 에디의 안내를 맡게 되면서 2세라는 정도만 더 알게 됐을 뿐이었다. 카운슬러는 그가 한국계이며 마침 김가 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윤이에게 학교 안내를 부탁했었다. 

그러나 김가 성을 가진 에디에게 학교 안내를 해주는 일은 일어나지 못했다. 윤이가 찾아갔을 때 그 아이는 윤이 표현대로라면 그녀를 쌩까버린 것이다. 이후에 한 번을 더 찾아가서 한 번을 더 까였다. 그 대접을 받고도 또 갔다니 무던도 하다고 하자 윤이는 처음 전학 왔을 때의 얘기를 꺼냈었다.

“로빈이 생각나서 그랬어.”


로빈은 와이오밍에서 전학 왔을 때 윤이의 안내를 맡았던 아이다. 주근깨가 많은 빨간 얼굴에 키가 작고 마른 남자아이였다. 

그는 호기롭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 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듯했다. 

왜 사물함을 여는 시범까지 보이려고 했는지 알 수없으나 아이의 의지와는 달리 오래 쓰지 않은 자물쇠는 아무리 비틀어도 열리지 않았다. 힘을 너무 줘서인지 민망함 때문인지 얼굴은 점점 더 빨개졌다는데 윤이는 그런 로빈이 진심 고마웠다고 했다. 

살다 보면 일이 안 풀리는 날이 있기 마련이고 그날이 로빈에게는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광물질의 강도를 비교하는 실험에서 돌로 유리를 두드려야 할 것을 그가 나서서 유리로 돌을 내리치는 바람에 파편이 난무하는 가운데 두고두고 회자되는 실험실의 전설을 만들어 냈다. 

로빈의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회 수업으로 이어졌다. 

선생님이 준비물인 플래시를 꺼내라고 했을 때 그가 꺼낸 것은 놀랍게도 플래시 드라이버인 USB였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고 아이들이 플래시를 켜고 유물을 찾아내는 동안 그의 손에는 여전히 검정색 USB가 들려 있었다고 한다. 

얼굴이 빨갛고 키가 작던 로빈은 수염이 덥수룩한 상남자가 되었지만 윤이는 지금도 그가 자기를 피하고 있다는데 손모가지를 걸었다.

“결과는 코미디였지만 나는 걔가 고맙더라고. 나도 에디한테 뭐라도 좀 해주고 싶었어.”


그러던 어느 날 김가 형제가 문제를 일으켰다. 인도인이 운영하는 폰수리점에 형제가 유리를 깨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어떻게 일이 잘 해결되었는지 형제는 이틀 뒤 아무렇지 않게 등교했다. 

그리고 몇 달 뒤 형인 레이가 웨스트포인트에 합격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10년 만에 나온 사관생도로 마을의 경사였다. 교장인 로어슨 씨가 교실까지 직접 와서 축하를 했다고 한다. 폰수리점 사건도 동생인 에디를 말리려다 생긴 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형이 환대를 받으며 떠난 뒤 혼자 남은 에디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지만 소소한 것들이었다. 수업에 빠지거나 선생님에게 무례하거나 베이핑을 하는 것 같은, 테러 예고에 비해서는 소소하다는 얘기다. 


경찰 조사와 함께 학교에서도 위원회가 열렸고 에디의 부모가 불려 갔다. 에디의 아버지가 경찰과 학교에 아이의 진료기록을 제출했다. 기재된 진단명은 바이폴라디스오더였다. 양극성장애로 학교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에디의 주치의의 권유에 따라 부모는 대도시인 맨하튼에서 뉴저지의 작은 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고 했다. 그러나 형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던 아이는 전에 없던 심한 우울증상을 나타내고 있던 모양이었다. 

에디의 아버지는 레이가 동생 때문에 돌아올까 봐 염려하고 있었다. 그 애는 이제 자유로워져야지요, 위원회에서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에디는 사건 이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이의 처분에 대해서는 학교나 경찰에서 언급이 없었으나 에디의 가정은 글랜데일에 남았다. 

결과적으로 이사를 권유한 주치의의 판단이 옳았다. 아침에 나가보면 에디 집의 현관에 직접 만든 케이크나 파이가 놓여있곤 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도울 준비가 돼있다는 카드와 함께였다. 그중에는 기숙 씨가 만든 퍼널케이크도 있었다. 

이제 아이의 치료는 마을의 일이 된 듯했고 형제의 엄마인 지나는 늙은 여인들의 새로운 멤버가 되었다. 


토끼나 너구리 같은 작은 동물이 찾아든다면 동굴의 한켠을 내어 준다는 오소리의 겨울잠 같은 동면의 계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전 23화 마을 대장장이의 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