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가 첫 차를 샀다.
성식이 일 후 두문불출하는 아이를 끄집어내기 위해 기숙 씨가 서둘러 벌인 일이었다. 과연 효과가 있어서 아이는 차를 사는 복잡한 과정 중에 조금씩 생기를 되찾아 갔다.
사이드미러의 깨진 부분과 찌그러진 휀다를 수리해주지 않는 조건으로 육백불을 깎고, 팻시터를 해서 모은 4천 불에다 기숙 씨가 3천 불을 보태주어 마련한 10년 된 포드 포커스였다. 유지비는 알아서 하는 조건으로 첫 달 보험료를 내주었다.
원래 그녀가 사고 싶어 했던 차는 지프체로키였다. 중고차 전시장을 드나들며 봐둔 차도 있는 듯했다. 그러나 타운하우스의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린지의 은색 포커스가 매물로 나오자 윤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차를 사겠다고 했다. 린지의 어머니인 라스부인이 타다가 딸의 열일곱 살 생일에 물려준 차였다.
린지는 보스턴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 집을 떠나기 전까지 그 차와 어디든지 함께 갔다. 그 차를 타고 학교에 갔고, 파티에 갔고, 친구들을 잔뜩 태우고 쇼핑몰에 갔다.
그녀가 떠나고 난 뒤 윤이가 그 차를 지나칠 때마다 손으로 한 번씩 쓰다듬고 가는 것을 기숙 씨는 알고 있었다.
봄방학이 되고 날이 풀리자 기숙 씨는 아이들과 짧은 여행을 떠났다. 그녀가 아이들과 대화하는 방식이었다.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그녀는 아이들을 차에 태워 길을 나섰다.
이야기를 하느라 열두 시간을 간 적도 있었다. 달리고 달려 그날 의도치 않게 도착한 곳이 나이아가라였다. 중간에라도 차를 돌려야 했건만 도중에 눈폭풍을 만나서 돌아오는 길이 여의치 않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뉴욕 북부에 예보가 있었다고 했다.
버펄로 주변을 지날 때부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계기판의 온도계가 화씨로 1도씩 뚝뚝 떨어졌다. 영하 20도까지 떨어지자 두려움이 몰려왔다. 섭씨로는 영하 30도에 가까운 기온이었다. 금방 돌아올 생각으로 아무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처음 겪는 혹한이었고 폭설이었지만 돌아가는 것보다 어디든 빨리 도착하는 편이 나았다.
열두 시간 만에 도착한 나이아가라 폭포는 놀랍게도 일부 얼어 있었다. 그 정도 규모의 폭포가 어는 기온이라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 손을 대는 것마다 쩍쩍 달라붙었다. 비현실적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 추위였다.
그 해 여름 데스밸리의 기온이 섭씨로 51도였으므로 미국 본토의 최고저 기온차는 어림잡아도 80도에 달했다. 땅덩어리가 크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광활함이었다.
이 날의 여행도 준이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쩐지 이미 대화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떠나기 전부터 기숙 씨는 절망했다.
준은 어떤 망설임이나 살피는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포했던 것이다.
“트랜스퍼를 하겠다는 거지?”.
기숙 씨가 기선을 잡는 심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 아예 대학을 다니지 않겠다고 할까 봐 미리 못을 박아두려는 의도였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준이의 성의 없는 대답에 그녀는 다시 좌절하려는 마음을 다잡고 티미의 얘기를 꺼냈다. 그게 원인일까 싶어서였다. 룸메이트인 티미는 인종차별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놓고 자유분방했다.
“티미랑 얘기는 해봤고?”
“말이 안 통해.”
“방을 바꿔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야?"
“이유를 대야하는데 뭐라 그래? 걔가 패널티를 먹을텐데. 사실 걔도 내가 불편해. 여친이 오면 서로 딴 방에 가있자는 걸 내가 거절했으니.”
“그렇게도 하는구나.”
“그래도 엄마, 이 자식은 많이 심해. 아침에 모르는 여자가 옆 침대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해 봐.”
“그게 누군데?”
“몰라. 걔 여친은 나도 아는데 얜 또 딴 애 더라고.”
“아니, 애들이 왜 수치심이 없는 거야.”
“애들이 그런 게 아니고 얘가 그래. 고향에 애인도 따로 있대. 서로 대학 다니는 동안만 다른 사람 만나기로 합의했다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아이가 받았을 스트레스가 가늠이 되고도 남았다. 그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이유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난 한국으로 가려고 해.”
준이가 기어코 그 말을 꺼냈다. 끝내 아니기를 바랐던 말이었다. 제 엄마의 마음을 아는 아이였으므로 말 끝에 짧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것이었다. 뒷자석에서 숨을 죽인채 대화를 듣고 있는 윤이는 한국으로 갈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결국 준이의 말은 영영 헤어지자는 뜻인 것이다.
전에도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었다. 그 때는 가고싶다거나, 가면 안되냐고 했었다. 그러면 엄마인 기숙 씨는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말로 대답을 유예해 놓았었다. 그런데 이제 더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그 나중에서 아이는 허락을 구하고 있지도 않았다.
“너 엄마를 원망하는구나.”
기숙 씨는 막 나가기로한 사람처럼 생각나는 대로 말을 던졌다.
“왜 그러는 건데?”
“너야말로 왜 그러는 건데?”
“솔직한 게 죄야?”
“그러니까 엄마를 원망했냐고 묻는 거잖아.”
“원망했으면? “
준도 자포자기하듯 말을 던져 놓고는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기숙 씨는 하트포드라고 쓰인 출구로 빠져나와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밤늦게 도착한 글랜데일은 정전이었다. 처음 겪는 정전 사태로 50년 만의 블랙아웃이라고 했다. 떠나 있는 몇 시간 새 짧은 태풍이 지나갔다는데 그 바람에도 나무들이 넘어가고 전신주가 끊어졌다.
가로등이 없는 주택가의 밤은 무척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깜깜한 중에도 빛이 있었다는 것을 정전이 되고야 깨달았다. 블랙아웃이 된 마을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캄캄한 길을 달려 헤드라이트의 도움으로 주차장에 차를 대자 준이는 윤이와 기숙 씨를 놔두고 어둠을 짚어 가며 이층 제 방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