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음 Dec 04. 2023

타임 패러독스

 미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양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운다고 말하는 그들의 의사 표현 수단인 목소리를 쓰지 않는 것이다. 오래 관찰한 바로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한다. 위급할 때 야옹 같기도 하고 미유 같기도 한 소리를 지를 줄 아느 것으로 봐서 그렇다. 그냥 말을 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뿐 아니라 하악질도 하지 않는다. 녀석은 으르렁거리는 방법을 택했다. 왜 고양이처럼 하지 않고 강아지처럼 으르렁대는지는 나를 만나기 전의 이력을 봐야 알겠지만 미루 역시 내가 왜 다른 인간처럼 출근하지 않는지 그 이력이 궁금한 눈치였으므로 서로 묻지 않기로 했다. 꾹꾹이나 쭙쭙이 같은 유아적인 행동은 내가 옹알이를 하는 것만큼이나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밈으로 이해한다. 인간과 함께 살게 되면서 미루의 가계가 유전의 형질로 선택한 문화적 유전자 말이다. 그들의 판단으로는 인간과의 의사소통이라는 게 대를 이어 남길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좋은 유대관계였을 수도 있고 아예 사람은 말이 안 통하는 족속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미루는 모래를 꼼꼼히 덮을 줄 알고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아찔한 낙하를 즐기며 물건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선반 위를 거닐 줄 안다. 기화되든지 액화되든지 어쨌든 상변화를 일으키며 어디로 스며들거나 흐르거나 해서 가슴을 철렁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종의 여러 습성 중 녀석이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미루는 야옹 소리를 내거나 하악질은 하지 않겠으나 익스트림한 활동을 즐기며 물처럼 흘러는 다니겠노라고 결심한 고양이다. 이런 선택의 문제도 모방되어 대를 이어 복제된다면 유전자가 되지 않았을까. 따라서 미루가 상자갑만 보면 크건 작건 기를 쓰고 들어가 네모가 되는 것은 고양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좋아서다. 비닐봉다리를 뒤집어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미루는 대신 매우 통찰력 있는 눈동자를 가졌다. 사물은 몰라도 나 정도는 너끈히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오만함을 담은 눈이다. 그 눈으로사람인 내가 상자에 들어가는 이유 역시 자신과 같기를 원한다는 듯이 바라본다. 자신은 고양이이며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알고는 있지만). 우리 사이에 이미 선택적 친화력이 생겼다고 믿는 것이 분명하고 사실 그렇다. 그러나 녀석이 생각하는 선택적 친화력이란 다분히 고양이 편향적이다. 내가 인간 편향적으로 동물의 유전형질만 변화되었다고 믿는 것처럼 녀석은 자신이 친화력의 우위를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이 상자에 들어가는 이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녀석이 간과한 것은 사람이 상자에 들어간다고 해서 네모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루가 조정하는 시간에는 패러독스는 없다.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언젠가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바꿔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 말이다. 선상의 어디쯤에서 꼬이거나 뒤틀린 것이 지금의 현실이지 않을까, 더 나아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바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일 때도 있다. 꼬리를 물다가, 현재가 미래를 바꿀 수 있지, 하는 깨달음이 와서 헛웃음이 나온다. 뭘 과거까지 가. 그 생각을 할 때쯤 되면 다 귀찮아진다. 


 울지 않는 고양이가 낮은 으르릉 소리를 내며 시공을 흘러 다니는 동안 인간인 나는 시간의 역설에 빠져 있다. 정확히 반으로 나뉜 현실의 공간은 크게 불편할 것이 없다. 눈에 보이는 곳 대부분은 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미루의 영역은 주로 어디 위이거나 밑이거나 내가 침법 할 수 없는 곳들이다. 제 영역은 철벽을 두른 녀석이 내 공간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지만 나도 개의치 않는다. 시간 학자들이 타임 패러독스라고 부르는 것, 나는 회한이라고 부르는 그것에 빠져 있는 동안 녀석은 통찰력 있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 02화 결국 콘벤셔널리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