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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Dec 18. 2023

쿼런틴 2022

 나는 밖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등이 굽은 사람이 되었다. 손을 어찌할 바를 몰라 항시 폰을 쥐고 들여다본다. 시선 처리까지 해결되니 일석이조다. 그렇게 군중 속에서도 여전히 혼자 있는 사람이 되었다. 보폭은 좁아졌으나 걸음은 빠르다. 캡을 눌러쓰고 그 위에 후드를 한 겹 더 뒤집어쓴 내 밖의 모습이다.


 빛은 질량이 없다. 그런데 파동뿐 아니라 입자성도 가지고 있다. 내 얘기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얘기를 저명한 학자가 인용한 것을 내가 인용한 것이니 믿어도 좋다. 그러니까 햇빛이 내리쬐는 것은 수많은 야구공이 날아오는 것처럼 수많은 빛의 에너지 덩어리들이 물체를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태양은 빛으로 우리를 두들겨 패고 있었던 것이다. 태양의 크기만큼 그 세기가 어머어마했을 것이다. 퀀텀의 세계라는 책을 쓴 카이스트의 저명한 교수님은 양자물리학과 양자컴퓨터 같은 퀀텀의 세계를 말하고 있었으나 나는 첫 챕터에 나오는 빛의 입자성 부분에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그거였어. 나는 빛의 입자성에 취약한 사람이었던 거다. 


 대부분의 것이 설명되기 시작했다. 나갔다 들어오면 왜 흠씬 두드려 맞은 사람처럼 아프고 고단했는지. 짐작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태양이 나를 무수한 입자로 때리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납득할 만한 가설인가. 나는 이 가설의 다른 증인도 알고 있다. 알베르 까뮈다. 아랍인을 쏴 죽인 뫼르소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하게 한 장면이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태양이 싫다고 했던 가수 비도 사실은 그랬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다른 얘기를 좀 하자면 나는 속담의 기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어쩌면 그렇게 타당한지. 거기다가 위트까지 있다. 위트와 타당성의 백미를 꼽자면 당연,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다. 위트는 물론 역설까지 있다. 그러나 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조소적이라 나는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속담을 만든 사람은 시작할 힘조차 없는 상황까지는 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소소하게나마 내 인생의 원동력이 되어왔다고 본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서. 억지로 옷을 입고 신발을 신어서. 태양을 피하고 싶은 온갖 핑곗거리로부터 나를 끄집어내서 억지로 바깥세상을 살아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는 소리다. 


 나는 스스로를 '공식적인 룸펜 세대'로 부른다. 노골적이지만 합당하다. 마침 졸업하던 해에 딱 격리가 시작됐고, 딱 사회 경제가 마비되었으며, 딱 고용이 멈췄다.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이겨내며 억지를 사촌 삼아 근근이  살아왔건만 거대한 구실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제는 빛의 입자성이라는 당위성도 찾아냈다. 나의 합당한 쿼런틴은 아직 끝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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