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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Jan 01. 2024

붉은 죽음의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나는 내 발로 걸어가 녀석을 사 왔다. 값을 치르고 물건처럼 진짜로 샀다는 소리다. 처음부터 고양이를 돈으로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내 한 몸 어떻게든 먹여서 살아있게끔 하는 일에도 아무 계획이 없던 때였다. 하물며 남이 마련해 준 방에, 역시 먹여야 사는 다른 생명체를 들이는 일에 계획이 있었겠는가. 그때 나는 온기가 필요했고 마침 녀석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꾀죄죄한 데다 그나마 듬성듬성한 털마저 사방으로 뻗쳐있는 볼품없는 새끼 고양이가 사실은 비싼 품종묘이며 언감생심 길고양이로는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귀한 몸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이 대주는 내 밥값을 털어서 녀석을 데려오게 된 이유는 그 품종의 이름 때문이었다. 안으면 헝겊 인형처럼 측 늘어져서 몸을 맡긴다는, 정말 딱 그 이유 하나였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때 온기가 필요했으니까.


 '축 늘어져 몸을 맡긴다'는 말을 안기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로 오해한 것은 순전히 내 잘못이다.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딱 집어서 고양이라기보다, 먼저 다와가 몸을 기대고 체온을 나눠 줄, 사람이 아니면서 산책은 시키지 않아도 되고 수다스럽지 않은 데다 조르지 않고 법석을 떨지 않으며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는 동거자를 마침 원했을 뿐이다. 다시 또 말하지만 그때 온기가 절실하게 필요했으므로. 그런데 이 고양이는 딱 이름만큼이었다. 축 늘어지기도 하고 몸을 맡기기도 하기는 하는데 그건 어쩌다 목격돼서 천신만고 끝에 잡아 안았을 때 얘기다. 그마저도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없다. 


 사실 녀석의 조상이 유럽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겸상을 해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긴 하다. 유럽인들이 고양이와 화해를 한 것은 300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화해라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거지 고양이들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중세 유럽에서 마귀라는 오명을 쓴 그들을 상대로 행해진 미친 살육을 고양이들도 과연 잊었을까. 고양이 미루에게 사람인 내가 번번이 까이는 것은 녀석이 유럽묘의 후손이기 때문이라는 데 손모가지를 걸 수도 있다.


 인과응보로서 당연하게도 역병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양이의 등에 불 붙인 화약을 매달아 적진으로 쫓아 보냈던 인간의 광기는 그들을 말살하기 직전까지 갔던 것 같다. 고양이가 사라진 세상에 쥐가 들끓었고 쥐 세상이 되자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이러한 인간의 잔혹성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애드가 앨런 포가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에서 검은 고양이는 눈이 도려내지고 목이 달리고 불태워지고 찍히고 벽에 발라진다. 중세 유럽처럼 그랬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다른 작품인 <붉은 죽음의 가면>에 등장하는 프로스페로 대공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내가 아는 두번째로 자발적 격리에 들어간 인물이다. 그러나 윈터 키의 에이미와는 정반대로 극단적인 이기심을 가졌다. 붉은 죽음이 창궐하자 그는 귀족들과 함께 담으로 둘러싸인 사원으로 들어가 철문을 녹여 막아버린다. 밖에서는 백성들이 죽어가지만 사원 안은 온갖 유흥거리와 먹을 것과 역병을 조롱하는 교만이 넘쳐난다. 그러나 시체처럼 괴이한 가면을 쓴 적사병은 이미 도둑처럼 슬며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포우의 작품은 동물을 학대하는 묘사로 인해 지금에 와서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는 작품을 통해 고양이에게 사죄하며 화해를 청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남을 학대 하는 것, 이기적인 것, 교만한 것, 이런 것들이 전부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약함이 핑계가 될 수는 없지만 그것 때문에 파멸하는 인간의 말로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방법으로 사죄한다. 자신을 가두는 것은 결국 두렵기 때문인 것이 맞다. 두려울수록 괴팍해진다. 이것 또한 자신을 가두는 방식인 것도 맞다. 프로스페로가 그랬고 스쿠루지가 그랬다. 


 그렇다면 나는 일 점 오 룸 내 방 안에서 지금 안전한가. 가두고 스스로 괴팍한 노인네처럼 살아서 지금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있는가. 그게 무엇이든 이미 들어와 있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귀찮아진다. 신수가 훤한 고양이가 복수하듯 시니컬하게 사람을 따돌리며 활개 치는 이 방 안에서 어쨌든 미루와 나는 아직까지는 안전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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