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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Jan 08. 2024

뉘른베르크의 달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편치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매우 불편하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어떤 핑계를 늘어놓아도 당당하지 않다.


 미루 녀석이 시곗바늘을 옮기는 것을 목격한 날부터인 것 같다. 혹시 그 훨씬 전 내 방의 시간이 밖의 시긴과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때부터일 수도 있겠다. 시간이라는 것은 경우에 따라 매우 직관적일 수 있다. 시간뿐 아니라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많은 형이상학적인 것들이 실체를 갖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미루의 시계가 나타내는 시간이 그렇다. 그 시계는 할아버지 시계Grandfather's clock 라고 불리는 괘종시계다. 옛날 병원이나 도서관의 로비에 우뚝 서있던 그 왜 키다리 괘종시계 말이다. 우뚝 서있어서 할아버지 시계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시계라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미국 민요 My grandfather's clock에 등장하는 마룻바닥에 서있는 그 시계가 맞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멈춰버렸다는 그 시계다. 나는 그런 시계의 작은 버전인 테이블용 괘종시계를 가지고 있다.


 이 괘종시계는 태엽으로 움직이게 돼있다. 시계면에 작은 홀이 여러 개 혹은 하나가 있어서 열쇠를 꽂아 돌려줘야만 태엽이 감기고 시간이 흐른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괘종시계는 소리를 담당하는 홀이 따로 있다. 나는 시계종 소리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타임 인디게이터를 담당하는 쪽의 태엽만 감는다. 자, 보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멈춰버린 시계는 두 생명이 연결돼 있는 것 같은 신비감을 주지만 단순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무도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보통 키다리 시계는 8일을 주기로 태엽이 풀리니 딱 그날 멈췄다는 것으로 봐서 할아버지는 적어도 팔일은 누워계시다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 이과생이라니.라고 해도 할 수없다. 할아버지의 시간은 그가 직접 태엽을 감는 그의 시계에 맞춰 따로 흐르고 있었던 게 맞다. 또는 태엽을 감아주는 고양이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양이가 더 이상 태엽을 감지 않았다는 스토리라면 인정이다. 


 이 시계 말고도 나에게는 진짜 할아버지 시계가 하나 더 있다. 진짜, 할아버지가 차던 것을 받아 온 시계 말이다. 받아 왔다는 말은 그분이 직접 물려주신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유품을 정리하는 자리에 마침 내가 있었고, 아버지가 별 거 아닌 척, 이건 너나 하든지,라고 해서 들고 온 시계다. 묵직한 만큼 값이 꽤 나가는 시계라고 했다. 어릴 때 호시탐탐 노리다가 번번이 들켜서 불호령을 맞던 일을 아버지는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크라운을 돌려 태엽을 감아주는 은색 손목시계였다. 할아버지는 태엽을 감는 일을 밥을 준다고 표현했다. 나는 단지 시계에 밥을 줘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시간에 밥을 준다고? 그런데 그 말이 맞다. 이 태엽시계라는 것은 유기체인 것이 분명하다. 이과 출신이라도, 손에 장을 지지더라도 나는 단언한다. 이 것은 밥을 주었을 때는 힘차게 돌아가다가 허기가 지면 힘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자동차에 기름이 적어질수록 속도가 느려지는가. 휴대폰에 배터리가 줄어들수록 기능이 떨어지는가 말이다. 무릇 기계라면 끝까지 제 속도대로 일하다가 어느 순간에 장렬히 전사하는 게 맞는 이치다. 이것을 시간의 개념으로 보자면 동시성을 유지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태엽 시계는 다시 밥을 줄 때까지 내 눈앞에서 서서히 느려져 간다. 즉 자신의 생체 리듬에 맞춰 시간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시간이 직관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그것은 시계의 의도라기보다 밥을 주는 사람의 의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공포를 느낀 것은 시간을 늦추기만 할 뿐 빠르게 조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시계 다이얼은 원형이므로 처음과 끝이 없다. 그러므로 시작이라는 개념도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끝없는 순환의 선상에 있다. 그러나 나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상적이라면 나는 시간의 직선상에 있어야 했다. 흔히 말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지나간 것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그날 나는 깨달은 것이다. 나를 두고 매일 T'만큼 멀어지는 사람들을 확인한 그날부터 나는 매우 불편해졌다.


 인간이 처음 시계를 휴대하기로 작정했을 때 시계는 인간의 리듬에 맞춰 움직였다. 온도, 자성, 위치, 하다못해 작은 먼지 알갱이에도 영향을 받던 이 연약한 생명체들은 인간이 밥을 주는 대로 그들이 원하는 시간을 표시해 주며 살던 시절이 있었다. 시계와 주인이 주관적인 시간에 공존해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무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태엽을 감아줘야 움직이는 시계는 아무도 찿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수집품이 아닌 휴대용으로는 그렇다. 주인이 어떤 상황이든 시계는 저벅저벅 제 갈 길을 간다. 아주 잘 간다. 더이상 유기체도 아닌 기계일 뿐이다. 주인의 시간이 아니라 세상의 시간에 맞춰져 있고 세상은 인정사정없이 변해간다. 어떨 땐 시간보다 세상이 더 빠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태엽 시계를, 그것도 두 개나 쓰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거기다 바늘을 거꾸로 움직일 줄 아는 고양이도 있다. 


  나는 요즘 말할 수없이 심기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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