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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Jan 15. 2024

룸펜, 한량, 런던의 포그씨

 나는 다른 한량을 하나 더 알고 있다. 그는 논란의 여지없이 한량이기는 하나 룸펜은 아니다. 룸펜은 독일어로 '잉여인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전에는 주로 집구석에서 놀고먹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엄마가 아버지한테 룸펜이냐고 소리칠 때는 하도 말이 입에 착 붙어서 난 그게 순 우리말인 줄 알았다. 나를 그렇게 부른 사람도 엄마였다. 아버지한테처럼 비난조로 한 것은 아니고 지나가는 말로 룸펜짓도 유전이냐고 한 게 다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지금은 주로 일을 할 의지가 없는 고학력의 실업인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들을 고등룸펜이라고 한단다.


 그러니까 룸펜은 아닌데 한량은 맞는 내가 아는 그 다른 사람은 영국 런던에 산다는 필리어스 포그다. 신문 기사 하나만 믿고 지도 한 장 없이 80일 간의 세계 일주를 떠난 그 포그씨 말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의 하루 일과에 감탄을 금치 못헸었다. 그는 한량짓의 만렙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싹이 보였는지 그 사람처럼 사는 게 인생의 목표라고 떠들고 다닐 지경이었다. 한량의 꽃은 돈이 많다는 데 있다. 게다가 그 돈이 어디서 나는지도 몰라야 한다. 그 말은 놀고 먹되 아까운 마음은 들지 않아야 진정한 한량이라고 할 수 있다는 소리다. 내가 보기에 영국 런던에 산다는 포그씨가 딱 그래 보였다.


 그가 얼마나 놀고 먹는 사람이었는지 은행강도로 오해를 받았을 정도다. 진정한 한량답게 배포 역시 장난이 아니다. 배포라고는 하지만 객기에 더 가깝다. 여행 경로라 봤자 허술하기 짝이 없다. 돈에 대한 개념도 없다. 압권은 세계 여행을 한다는 사람이 여러 나라의 다른 표준시에 대해서는 개념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달랑 하나 믿었던 기사에 대한 검증도 없었다. 완공되었다던 인도 철도조차 아직 미완이었던 것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게다가 상당한 돈이 걸린 내기가 아닌가.

 

 진정한 한량인 그가 관심 없어하는 돈 얘기를 그냥 룸펜인 나는 하고 싶다. 그가 내기에 건 돈은 2만 파운드다. 80일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잃게 되는 돈이다. 전 재산의 반이란다. 그리고 남은 2만 파운드는 여행 경비다. 어떤 사람이 친절하게도 계산해둔 바에 의하면 2만 파운드는 현재 시세로 40억이 넘는 액수라고 한다. 40억 짜리 내기인 셈이다. 하긴 40억이 여행 경비라면 나라도 아무 계획없이 가긴 할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세계 일주도 아니다. 그 시대의 세계관을 생각하면 용인될 정도의 제목이기는 하다. 그러나 작가인 쥘 베른이 프랑스인인 것을 감안하면 인도 철도 루트를 'Le Tour du mond 세계일주'라고 표현한 것은 조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영국의 식민 지배 수단이었던 이 철도는 인도에 대한 차별과 착취의 대명사가 아닌가. 영국 런던에 사는 포그씨의 내기에 임하는 태로로 볼 때 대영제국민의 자부심이 지나치지 않았나하는 오해가 들기도 한다. 믿었던 철도가 미완이었다는 전개가 어딘지 좀 풍자적이다. 그의 이름이 포그Fogg인 것도 우연같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지도 얘기다. 김대건 신부가 조선 지도를 제작한 일이 있다고 한다. 직접 다니면서 제작한 지도가 아니라 기존에 있는 지도를 참고해 새로 만든 조선전도다. 이 지도는 선교사들을 위한 목적있는 지도다. 조선 조정의 박해로 선교사들의 육로 입국이 어려워지자 해로를 통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안의 섬과 바위등을 자세히 표시 해 두었다고 한다. 그의 경험을 토대로 입국시 주의사항도 기록했다. 놀라운 일은 1800년대에 외국인 신부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에 독도가 '우산'으로 명확히 적혀 있다는 점이다. 로마자로 말이다. 다른 사본에는 동해 역시 라틴어로 '동해'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지도의 기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게 궁금하다. 아무리 한량이라지만 전 재산을 걸고 떠나는 여행에 지도 한 장 들고 가지 않았다는  영국 런던에 사는 필리어스 포그의 기백은 정말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전 재산의 반은 경비로 날렸고, 무식이 용기라고 어찌어찌 요행으로 내기는 이겼어도 퍼주고 나니 남는 것도 없다. 그러고는 한다는 소리가 아름다운 아내를 만났으니 됐단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내 말고는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뭐 그런 게 아니라도 여행 자체로 해볼만하지 않겠냐고 하며 끝을 맺는데... 예, 당신을 진정한 한량으로 인정합니다. 


 진정한 한량인 그가 관심없어 하는 지도를 그냥 룸펜인 나는 한 장 주문 했다. 만 이천 원에 세계지도와 유럽 지도를 같이 주는 빈켈 벽지도다. 뭐 어디에 쓸 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라고 대답하고 싶다. 포그의 기백에 대한 반작용같은 것이라고 해두자. 내가 진짜로 궁금한 것은 따로 있다. 지도를 산 이유의 일부이기도 하다. 인도의 철도가 완성되어 80일 만에 세계 일주가 가능해졌다는 기사를 썼다는 기자에 관해서다. 이 어이없는 내기의 시작점인 그 기자 말이다. 그는 기사에 여행 루트와 체류 국가는 물론 물론 소요 시간 같은 것들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직접 가 본 것이 아닌 이상 그는 그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고 눈이 빠져라 지도를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그가 진정한 승리자라고 본다. 내기에 진 사람들은 돈을 잃었고, 이긴 포그씨마저 제 입으로 얻은 것은 없다고 했다. 기자로서 그런 화제성을 불러왔으니 그만한 승리자가 또 있겠느냐는 얘기다. 하, 거기다 맞는 정보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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