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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Jan 29. 2024

참기름 찬 소년

 나는 지도에 관해서는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다. 학교에 들어갈 즈음 내 할아버지는 어린 손주들 몇을 앉혀두고 동네 약도를 그리게 했다. 골목 하나 가게 하나까지 자세히 그려야 했다. 그러나 다들 아파트 단지에 살다 보니 할아버지 생각 같지 않았었나 보다. 102동 옆 103동 그 앞에 103동 상가, 이런 걸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할아버지는 매우 실망스럽다는 얼굴로 동네 점방들을 자세히 알아오라는 숙제까지 내주셨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약도를 그리게 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증조부는 함경도 성진이 고향이라고 했다. 해방 후 식구를 데리고 남하하여 동인천 배다리에 자리를 잡고 사는 동안 전쟁이 났다. 더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길에 젖먹이 때문에 걸음이 자꾸 처지자 증조모는 당시 소년이던 할아버지를 혼자 먼저 가게 했다. 의용군 강제 징병이 두려웠던 것이다. 증조모는 이제 겨우 열다섯을 넘긴 큰아들의 허리춤에 참기름을 한 병 매달아 주고는, 큰길 말고 산을 타라고 신신당부를 한 후 앞서 떠나보냈다. 그러나 자신도 아직 아이인 이 피난 소년은 무리에서 떨어지자 금세 길을 잃고 산 길을 헤매다 인민군 소년을 만나게 된다. 이 인민군 소년 역시 무리에서 떨어진 까까머리 애녀석이었더란다. 겁에 질려있던 인민군 소년은 피난 소년을 보자 냅다 총부터 갈겼다. 안 맞히려고 쏜 총이 빗나가는 바람에 그만 피난 소년의 엄지 손가락을 스치고 말았다. 타는 통증에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인민군 소년의 사투리가 귀에 들어왔다. 고향인 함경도의 말씨였다.


 목숨이 경각에 놓이자 피난 소년의 입에서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고향 사투리가 술술 나오더란다. 두 소년은 어디 그루터기에 나란히 앉아서 인민군 소년의 허리춤에서 나온 미숫가루에 피난 소년의 허리춤에서 나온 참기름을 개서 먹으며 고향 얘기를 했다. 이상하게도 등에 업혀서 떠나온 고향이 잘도 기억이 났다. 기적처럼 동향 사람이었던 것이다. 장승 옆  땜통네 라매 마을 입구에 점방, 뒷산의 여우굴과 골목이 끝나는 곳에 이어지던 바닷길까지. 두 소년은 한참을 고향 얘기를 나누다 각자 갈 길로 헤어졌다. 남은 참기름은 총을 든 인민군 소년이 챙겨갔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을 살린 것은 '기억'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잘 그려둔 약도가 언젠가 손주들의 목숨도 살릴 거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연이 구구절절해도 나는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아무튼 전쟁은 끝났고 할아버지는 가족을 다시 만났으며 후에 대학도 다녔고 잘 살아오시지 않았는가. 내가 보기에 왼손의 엄지 손가락 한 마디가 뭉개진 것도 사나이로서 흉은 아니었다. 전시도 아닌데 동네 약도에 목숨을 거는 할아버지가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


 다른 얘기로, 1880년에 미 뉴저지의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전국 신학교 연맹이 창립을 하게 된다. 이들 신학생들은 프린스턴 신학교에 모여 세계 지도를 펴놓고 순수한 열정으로 세계 선교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이 열정이 청년들을 아시아 동쪽 끝의 작은 나라, 호랑이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알려져 있던 조선이라는 나라로 인도했다. 물론 조선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나라도 아니었고 호랑이는 어느 나라 호랑이든 배고프면 사람도 잡아먹는다. 어쨌든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정으로 그렇다고 알려진 미지의 땅에 죽을 각오로 건너왔을 당시 그들의 나이는 불과 이십몇 세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알게 된 것이 있다.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모아놓고 그리라고 한 것은 어쩌면 동네 약도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땜통네가 무슨 소용이고 여우굴이 무슨 상관인가. 죽고 싶지 않은 소년과 죽이고 싶지 않은 소년의 공통점이라고는 고작 말씨 하나였을지도 몰랐다. 피난 소년이 묘사하던 동네 풍경이 동인천 역 배다리의 기억이었대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골목 끝에 바다는 과연 있었을지. 두 소년이 그리던 것은 각자의 목숨줄이었을 거다. 할아버지가 원했던 바는 어린 손주들이 소년의 나이가 되었을 때 피난 소년처럼 간절하게 살고 싶어지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십 세의 나이에 청년의 열정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것은 내 생각이고, 할아버지의 생각은 속 뜻이란 게 없이 그냥 액면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손들이 장성하여 외지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꼭 참기름을 들고 가게 했기 때문이다. 믿어지는가. 단순하게 정말로 참기름을, 왜 그 소주병에 담아 빨간 마개로 눌러 닫은 그 재래 참기름을 말이다. 할아버지 말로는 누군지 하여간 껌뻑 죽는단다. 반백 년보다 훨씬 전의 그 인민군 소년 얘기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말 잘 듣는 친척들 말로는 대부분 그렇다고 한다. 세상천지에 참기름 없는 곳이 없건마는 이걸 동서양인을 막론하고 좋아라 한단다. 빨간 마개를 단 참기름병이라면 어디서나 먹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시키는 대로 들고 다녔다니 그게 더 놀랍지만 이쯤 되면 피난 소년을 살린 것은 뭣도 아니고 그냥 참기름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이러다가 약도 얘기도 할아버지 말대로일까 봐 무섭다.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나는 피난 소년의 나이도 선교사 청년들의 나이도 훌쩍 넘겼다. 그리고 여전히 동네를 그리라면 자신이 없다. 참기름 한 병을 허리에 차고 큰길 말고 산 길을 달려 사선을 넘으라고 한다면? 그런데 나는 자꾸 내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 같다. 전쟁 난리 통에 칼도 아니고 총도 아닌 참기름 한 병을 차고 산 길을 헤매거나, 총이라고 차긴 했는데 제대로 쏠 줄도 모르면서 혼자 낙오돼 산 길을 헤매거나, 다 됐고 그냥 요즘 어른인데 산길을 헤매거나 그렇다 쳐도 나는 똑같이 그러고 있는 것 같다. 무슨 소리냐 하면 등을 떠밀리고 있는 것 같다는 소리다. 조기 교육의 힘은 놀라운 건지, 아니면 할아버지의 큰 그림이었을지라도 어쨌든 지금 나는 지도 한 장을 앞에 놓고 할아버지 앞에서 처럼 쫄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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