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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Nov 27. 2023

결국 콘벤셔널리즘

 원래 나는 세명사가 되기로 했었다. 세신사, 세차사처럼 그릇을 닦는 전문가 말이다. 왜 좀 있어 보이려면 한자를 갖다 쓰는지, 노인이라고 안 하고 늙은이라고 했다가는 호통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이상한 조합의 한자어를 빼버리면 훨씬 더 있어 보이는 문장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그냥 설거지 전문가로 하기로 했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나 같은 아이는 자라는 내내 역할이 애매했다. 엄밀히 말하면 잘하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들이 전부 '잘하는 목록'에 없을 뿐이다. 밥줄 기술이나 노즈스톨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나의 역할은 일명 설거지로 불리는 것들이었다. 로켓을 만드는 조에서는 페트병을 구해다 씻는 일을 했고 학급 발표회 때는 스텝으로 무대를 정리했다. 고1 때 장래 희망을 정하는 시기에 나는 내가 해왔고 잘하는 그 일을 하기로 맘먹었다. 설거지 말이다. 음식을 하는 전문가가 있고, 상을 차리는 전문가가 있고, 하다 못해 먹는 전문가도 있는데 왜 그릇을 씻는 일은 아무나 하는가 말이다. 설거지에도 전문가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장래희망란에 담임선생님 수준에 맞춰 '洗皿師'라고 적고 친절하게 '설거지 전문가'라고 설명까지 덧붙여 내자 교무실로 호출이 왔다. 선생님들이 기쁜 얼굴로 기특하다는 듯이 등을 두드려 주며 지나갔다. 매우 창의적이며 틈새를 공략한 직업이라고 했다. 칭찬이 쏟아지자 나 자신도 어리둥절했다. 설거지를 잘해보겠다는 게 이렇게나 칭찬을 받을 일이었던가. 장래 희망으로 공학자나 운동선수 같은 직업군을 얘기하는 시대가 지나간 것은 분명했다. 아이돌이나 유투버의 꿈도 클리셰가 되었다. 선생님들은 뭔가 창의적인 것을 꿈꾸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해놓고 눈알을 굴리는 걸로 봐선 그분들도 그게 뭔지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침 내가, 대충 세상에 없는 것은 하나 말하고 창의라는 게 뭔지 아는 척을 하며 잠깐만 견디면 격려와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시대 덕을 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곧 설거지 전문가는 문과인지 이과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위원회가 열렸다. 반 구분은 문, 이과와 예체능만 있었기 때문에 어디든 소속이 돼야 했다. 주방 세제의 성분과 등급, 작용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이과의 영역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라우릴글로코사이드니 크로마토그래피 같은 전문 용어가 등장했다. 말이 그럴듯해서 나는 이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과의 반발도 만만치가 않았다. 크리스토퍼 몰리의 작품을 인용하며 그릇을 씻는 성스러운 작업의 창조성을 들어 절대적으로 문과라는 주장이었다. 몰리의 성스러움은 모르겠으나 수투를 안 해도 된다고 상기시킨 259등의 말에 문과로 거의 기울었을 때 뜻하지 않게 예체능의 영역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무언가를 닦는다는 것은 학문이 아닌 행위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싸움은 인터넷을 타고 전국으로 번질 뻔했다. 랜선을 통해 돌아다니는 논란거리를 주워다 뉴스처럼 보도하는 요즘 뉴스를 통해 기사화된 것이다. 설거지가 문과인지 이과인지 아니면 예체능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등판해서 아무 말 잔치가 벌어지려는 찰나 교육계에 변혁이 일어났다. 교육부에서 한국 교육사 100년 만에 문이과를 통합한다고 발표해 버린 것이다.  


 학교에서는 더 이상 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곧 있을 문이과 통합이라는 지침에 갈피를 잡지 못한 선생님들이 우왕좌왕하며 새 교육 방안을 짜느라 고심했다. 기다리다 지친 내가 다시 교무실을 찾아가서 선생님께 물었다. 저, 설거지 전문가가 되려고 하는데요, 문이과 중 어디로 써야 할까요? 그러자 선생님이 요즘처럼 시끄러운 시대에 너까지 그런 걸 꼭 해야겠냐며 취업이나 하게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과를 골라서 대학이나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충고에 따라 취업률 백프로라는 전문 기술 대학에 진학했다.


 내가 마루를 만난 것은 취업보다 취업률 백 프로 계산법에 몰두하던 대학을 졸업하던 해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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