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네 경동 본가는 넓지 않은 두 채짜리 고택이었다.
대문을 열면 정원이 딸린 사랑채가 먼저 있고, 중문을 지나야 본채가 나오는 구조였다.
사랑채는 아홉 남매 중 장성한 아들들이 기거하고 있었고 딸들과 어린 동생들은 안채에서 부모와 함께 지냈다.
맞선을 보게 될 안채의 대청마루는 동리에서 보기 드물게 신식으로 꾸며진 응접실이었다.
전축과 텔레비전이 놓인 대청마루의 소파에 양장을 한 용옥이 앉아 있었다. 어린 것들은 다 작은 집으로 보냈으나, 안 간다고 떼를 써 남겨둔 막내 여동생이 공깃돌을 굴리고 있는 중에 신랑자리와 시모될 이가 당도했다. 같이 왔던 매파 양 씨가 먼저 돌아가고 모친들은 안방에서 따로 다과상을 받았다. 대청마루에는 길홍과 용옥이 마주 앉았다.
용옥은 처음부터 길홍이 마음에 들었다. 실물로 봐도 사진으로 본 모습 그대로 짙은 눈썹에 쌍꺼풀이 진 눈, 과묵하게 다문 입술까지 어느 한 군데 싫은 구석이 없었다.
통성명만 하고 서로 내외를 하고 있는데, 공깃돌은 놔두고 안방과 마루를 드나들며 양과자에 이빨자국을 내던 네 살짜리 어린것이 그만 텔레비전 단추를 꾹 눌러 켰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대청 지붕을 타고 울려 퍼졌다. 아이가 손잡이까지 탁탁 돌려가며 화면을 계속 바꿔대자 시모 될 이가 안방에서 고개를 빼고 내다보는 게 보였다.
"얘, 테레비를 끄거라"
용옥이 살살 달래는 목소리로 이르자 아이가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축으로 가서 다이얼을 돌려 켰다. 또 지지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얘, 그만 끄래두."
"언제 언니가 전축을 끄랬나, 테레비를 끄랬지."
"소리가 나게 두면 망가진단다."
"소리 나게 두어도 안 망가진다."
알기도 잘 아는 미운 네 살바기였다.
"셋째 언니가 애끼는 건데 알면 혼날라."
"치."
셋째 언니를 무서워하는 아이가 전축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가 엄마 품을 파고들었다.
이 작은 일 말고는 무사히 마친 맞선이다 싶었는데 저녁에 들른 양 씨의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그 댁 아드님이 훤하지요? 마음에는 드셨을라나"
모녀와 마주 앉은 매파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적극성을 보이지 않자 지 씨 부인이 말을 아꼈다.
"드나 마나. 그쪽은 뭐래나요?"
"이 댁 따님이야 얻다 내놔도 손색이 없지만서도"
"내놓긴 어딜 내놔?"
지 씨 부인이 노기 있는 목소리를 냈다. 나이 차로 보면 하대를 한대도 흉될 것은 없었으나 부인답지 않은 반말이었다.
"아이고, 내 실언을 했습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매파의 말을 끊은 부인이 자리를 파하고자 했다.
"사설은 됐고 이만 접읍시다."
어머니 어깨 뒤에 앉아 있던 용옥의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선자리에서 저런 반응이라면 거절이었다. 어머니도 그렇게 짐작한 게 틀림 없었다. 그녀는 혼담이 어그러진 사실보다 수치심으로 더 떨렸다.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의 치맛 자락을 용옥이 잡자 부인이 당황해서 딸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니, 이 애가. 썩 들어가!"
그러자 양 씨의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이 걸렸다.
"우리 용옥 처자는 마음에 들었나 보네."
지 씨 부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두 여인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한 용옥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깨도 제가 깨요. 그러니 가서 이쪽에서 싫댔다 하고, 들은 얘기나 있으면 해 보세요"
용옥의 서슬에 매파의 웃음기가 가셨다. 부인의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아니, 아드님은 맘에 들어하는 눈친데 시모될 이가 좀. 혹시 선 뵈는 중에 무슨 일은 없었소?"
양 씨는 뭐 짚이는 게 없냐는 얼굴로 용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용옥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게 없었다. 서로 잘 살필 만큼 오래 있지도 않았다.
기왕에 말이 나오자 용옥의 모친이 더 적극적이 되어 물었다.
"아, 뭐라는데요? 돌리지 말고 그냥 말을 해요."
"에라 모르겠다. 그 댁 마나님이 처자가 기가 세 보인다고 합디다."
"기가 차네. 얘가 세 마디도 안 했을 거요. 대체 뭘 보고."
갈수록 태산이었다. 모녀가 어리둥절해서 영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양 씨가 답답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인사가 다 듣고 와서는 제 입으로 말을 않고 있던 것이다.
"용옥 처자가 막냇동생을 시켜서 테레비를 돌려라, 전축을 켜라 꺼라 했다믄서요."
그제야 용옥은 아차 싶었다. 근방에 텔레비전와 전축을 두고 사는 집이 없었다. 화평동 김원장댁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시모될 이 입장에서는 초면에 처자가 뻐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틀린 혼담이었다.
용옥의 마음에 분함은 누그러졌으나 인연은 아니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