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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Oct 15. 2024

월담혼사

 인연이 아닌 게 아니었는지 며칠 후 길홍은 고씨네 경동 집 담을 넘었다. 

말 그대로 월담을 한 것이다. 넘었다기보다 뚝 떨어졌다고 봐야 했다. 사랑채에서 놔서 키우는 삽사리 쫑이 죽기 살기로 짖어대는 소리에 식구들이 나가봤을 때 길홍은 담벼락 아래 똬리를 튼 모양으로 구겨져 있었다. 몸만 겨우 가눌 만큼 취기가 있는 상태였다. 

저녁을 막 물린 시간에 기별은커녕 도둑처럼 담을 넘은 손님이지만 피차 선까지 본 마당에 모른 체할 수는 없어서 용옥의 남동생 몇이 고대로 들어서 사랑에 옮겨놓았다.


길홍은 자세를 수습한다고 이리 쿵 저리 쿵하며 용을 쓰더니 어찌어찌 꿇은 무릎으로 용옥을 찾았다. 선자리에서 봤던 점잖은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모양새였다. 

정작 용옥은 코빼기도 안 비추고 있는데, 길홍은 양친과 팔 남매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청혼을 하였다. 사실 혀가 꼬일 대로 꼬여있어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으나 선을 본 처자의 집에 월담을 해서 무릎을 꿇고 한 소리가 청혼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라는 게 식구들의 중론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용옥의 맏아우가 그 밤에 길홍을 들쳐업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인천 제고 동문으로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라고 했다. 


 사흘 후 양 씨를 통해 정식으로 청혼이 왔다. 어린 동생들이 흉을 볼만큼 보고 그만 시들해졌을 때쯤 기다렸다는 듯이 딱 맞춰 온 청혼이었다.

"그러게 내가 뭐랍니까? 김의원 댁 마나님도 괜히 그러시는 거지 될 혼사였다니까요?"

"되기는 누구 맘대로."

"당사자가 중요하지요. 길홍 군하고 이 댁 아가씨가 서로 호감을 가진 게 뻔한데."

양 씨가 아주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지 씨부인으로서는 취기에 월담까지 한 길홍의 경솔함이 못 미더웠지만 이미 동인천 바닥에 짜르르하게 소문이 돈 일이라 엎어져도 망신살은 피할 수 없는 혼담이었다. 무엇보다 매파의 말대로 딸 용옥 역시 호감인 게 분명했다. 

이후에도 길홍은 벗을 만난다는 핑계로 용옥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그렇게 성혼이 되었다.  


용옥과 길홍은 석 달 동안 연애를 했다. 정혼이 된 짝인 만큼 당당하게 만났다. 두 사람은 영풍루에서 청요리를 먹었도, 애관극장에서 최무룡이 나오는 영화를 봤다. 배다리 중앙다방에서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를 마시며 엘비스프레슬리가 부르는 라파로마를 들었다. 두 사람의 행적은 근방 뿐아니라 하인천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적잖은 말거리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용옥의 모친은 혼인 날을 잡고, 가구를 맞추고, 침모들을 모아 금침을 짜느라 눈코 뜰새 없었다. 

두 사람은 3월 호시절에 신신예식장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리고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순조로운 결혼이었다. 


다만 양 씨의 호언과는 달리 서울이 아닌 본가인 화평동 적산가옥의 건넌방에 신혼방이 차려졌다. 다다미방을 구들로 개조한 한 칸짜리 방이었다. 장인에게 맡겨서 짠 자개장이 들어오지 못해서 도로 내갔다. 침대도 고사하고 경대를 놓으니 이불 한 채가 겨우 깔려서 경대에 딸린 의자도 뺐다.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복도를 사이에 두고 시모가 쓰는 안방과 마주 보는 위치였다. 시모는 안방문을 노상 열어둬서 두 방을 가리는 것이라고는 얇은 창호 미닫이 문 하나가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길홍은 그 해 졸업을 하자마자 고시고 뭐고 다 그만두고 하경하여 철강회사에 취업을 해 인천 본가에 눌러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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