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동에서 접골원을 하는 김의원은 장남인 길홍 아래로 누이 하나와 아우 하나를 더 두었다.
아우 되는 길남은 소문난 한량으로 용옥이 시집온 지 이레가 되도록 집안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안 들어오는 것은 아니고 새벽 잠결에 들어왔다가 점심상을 물리도록 잠을 잤다. 해 질 녘이 되면 시모가 김의원이 모르게 쉬쉬하며 상을 차려서 작은 아들 방으로 날라다 먹였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나가고 없는 게 이레 째인 것이다.
길남이 물린 상을 식모일을 하는 순자가 받아서 먹었다. 용옥이 먹던 밥을 치우고 새 밥을 퍼주었더니 다음날시모인 김 씨가 순자가 먹는 상에 숟가락만 하나를 더 얹어 용옥을 앉혔다. 밤새 뭘 하다 왔는지 알 수 없는 길남이 이도 닦지 않고 쑤셔놓은 밥에는 국물이 흥건히 묻어있었다. 용옥이 자기 앞에 놓인 밥그릇을 보고 기겁을 하며 악 소리를 냈고 김 씨가 용옥의 머리채를 잡았다. 악 소리에 길홍이 나와 상을 들어 부엌 벽에다 냅다 던졌다. 시집온 지 이레 만이었다. 이후로 순자는 새 밥을 먹었다.
갈비가 노상 짝으로 들어가더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갈비뿐 아니라 염소 만 한 대구 한 마리와 반 쪽짜리 돼지도 갈고리채 들어왔다. 꽃을 따 쫓지짐을 하고 완자를 굴려 탕을 끓여먹고 자란 용옥은 도대체 적응이 되지 않는 먹성이었다.
김치를 담글 때는 토막 낸 대구살을 박아 넣었고, 부침개에는 돼지 비곗덩어리 여러 개를 꾹꾹 눌러 넣어서 지져 먹었다. 만두라고 빚어 놓은 것이 어른 주먹만 했는데 하룻 밤낮을 빚어 서너 광주리를 쩌 놓고는 세 남매가 오며 가며 쉼 없이 집어 먹었다.
부자라더니 먹어제끼는 부자인가 싶었다. 아가자기하게 살림살이를 놓고 살던 경동 집과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전히 순자와 따로 밥을 먹게 했으므로 용옥은 함경도식이라는 그 음식들을 먹어 볼 기회는 잘 없었다. 저녁상에서도 길남이 물린 음식들은 손도 안댔다. 깍두기와 조개젓으로 밥을 먹었는데 조개젓이 입에 맞아 많이 먹었더니 시모가 먹고 있는 상에서 젓 종지를 들고 갔고 다시는 사 오지 않았다.
길홍은 철강주식회사에 다니고부터는 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어쩌다 부부가 방안에 있을라치면 김 씨 부인이 쿵쾅거리며 복도를 건너와서 부부가 있는 방문을 확 열어젖히고 갔다. 아들과 겸상을 한다고 며느리 머리채를 잡았고 그러면 길홍은 또 밥상을 집어서 벽에다 던졌다.
길홍의 월급날마다 화평동 본가로 청요리가 배달 왔다. 길홍이 이화원에 주문을 넣어서 보낸 것이었다. 용옥이 처음 보는 요리들과 울면과 자장면이 왔다. 그게 길홍이 집에 가져다주는 월급 대신이었다. 이후로 돈은 구경을 못했다.
김의원 부부와 시누는 안방 문을 닫고 앉아서 청요리를 먹었다. 순자도 맛을 봤다. 그리고 남은 음식은 어쨌는지, 남기는 했는지 빈 그릇은 씻지도 않은 채 쓰레기까지 다 한 데 모아서 문 밖에 내놓게 했다. 시모 말로는 그릇을 씻어 주면 재수 없어한다고 했다.
길홍은 청요리는 먹었느냐고 꼭 물었다. 용옥을 그랬다고 했다.
보름에 한 번씩 길남이 만취해서 들어와 살림을 부수며 돈타령을 했다. 김 씨 부인은 일본식 적산가옥 이층 방에 따로 기거하는 김의원이 알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아들을 달랬다. 길홍은 모르는 척 잠만 잤다.
어느 날 길남이,
"야, 형수, 물 가져와아아!"
라고 하자 길홍이 나와 길남을 집어 벽에 던졌다.
용옥이 길홍의 집어던지는 버릇을 아주 뿌리를 뽑는 데는 십 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