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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Oct 24. 2024

터키스프와 거러지탕

추수감사절이 되면 미국인들은 칠면조를 구웠다. 

어쩌다가 하필이면 칠면조를 먹게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어느 새벽 미명에 시커먼 칠면조 무리가 돌아다니는 광경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지천이었으리라. 

기숙 씨는 명절에 칠면조를 꼭 구웠다. 며칠을 염지하고 또 속을 채워 반나절을 구워야 하니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그냥 상징 같은 것이었고 값도 비싸지 않았다.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훈연한 햄도 샀다. 

칠면조 한 마리면 명절을 쇠고, 살을 찢어 샌드위치를 만들고, 뼈를 발라 터키수프를 끓이고 해서 일주일은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싫어했다. 

수프를 끓일 때쯤 되면 어른들이 명절 남은 음식으로 거러지탕을 끓여 먹던 생각이 났다. 후렴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도 알면서 꼭 거러지탕이라고 했다. 어른들이 끓여 먹던, 이라는 말은 아이들은 손도 안 댔다는 뜻이다. 

숟가락으로 떠서 입으로 가져간 기억은 없는데 희한하게도 맛은 기억이 났다. 분명하게 아는 음식들을 머릿속에서 섞어서 잡탕 찌개를 만들어도 맛을 상상할 수 있는 것. 그래서 김치와 꽁치 통조림을 끓이면 이런 맛이겠거니 상상한 대로 먹어 보면 딱 그 맛인 것. 그것이 나를 낳아서 자라게 한 내 나라의 맛일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들과 그녀가 기억하는 내 나라의 맛이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끔 기숙 씨를 외롭게 했다. 아이들은 남은 칠면조로 속을 넣은 샌드위치와 발라낸 뼈를 끓인 수프를 명절 끝 요리로 기억할까. 


조촐하게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터키와 햄을 굽고 캐서롤을 만드느라 오븐이 하루 종일 돌아갔다. 

파머스 마켓에서 만들어 파는 라즈베리 잼과 호박파이도 사 왔다. 신선한 애플 사이다를 와인 잔에 따라 테이블에 세팅하니 제법 추수감사절 분위기가 났다. 

한인 가정은 잡채나 김밥, 겉절이 같은 음식을 한 두 가지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숙 씨는 한국음식은 일절 내놓지 않았다. 명절 음식이라면 지긋지긋했다. 

명절이라고 한국에 전화도 한 통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살뜰하게 챙길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편과 이혼하면서 그의 가족과도 소식이 끊겼다. 원수된 것처럼 헤어진 것은 아니었고 소식까지 끊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마리마저 싹둑 자르듯이 연을 끊은 것은 시댁 쪽이었다. 아이들을 시켜 안부 전화를 하면 데면데면하게 받더니 나중에는 받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제 아빠와는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듯했다. 


남편은 희생이 당연한 세대와 자신이 더 중요한 세대의 중간에 서 있는 과도기의 가장이었다. 가정을 꾸리고 부양하는 일을 기꺼이 하면서도 항상 무언가 억울한 사람처럼 굴었다.

남편 용이를 만난 것은 대학의 봉사 서클에서였다. 

방학에는 농활을 가고 학기 중에는 야학을 여는 서클이었다. 기숙 씨는 야학에 참여하면서 농활대의 준비를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격렬했던 민주화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고 그래도 의식화를 외치는 운동권 학생들이 봉사와 계몽에 남은 힘을 쏟던 90년대였다. 

운동권들이 봉사서클로 모이면서 농활도 자아비판이 일어났다. 막걸리에 국수나 보리밥 참을 배부르게 대접받던 농활은 사라졌다. 학생들은 농가에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 하에 모든 숙식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했다. 봉사대는 마을 입구나 회관에 텐트를 치고 솥을 걸어 밥을 지었다. 

때문에 준비팀이 할 일이 많았다. 그들은 학생회의 지원비와 자비를 털어 플래카드를 찍고, 쌀과 국수를 사고, 재주껏 집의 냉장고를 털어와야 했다. 


용이는 준비팀 일을 함께 하던 복학생 형이었다. 그는 서클에서 유일하게 차가 있는 사람이었다. 차종이 로열살롱이어서 학우들은 그냥 살롱이라고 부르며 잘 얻어 타면서도 부르주아 자식이라고 대놓고 비아냥댔다. 막말을 하면서도 장난처럼 보이려는 노력도 안 하는 것이, 용이는 운동권이 아닌 굴러온 돌에 속하는 멤버로 알게 모르게 텃세를 당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일 플래카드 찾아야 하는데 살롱 좀 타자. 부르주아 새끼. 민중의 적이다.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내 타 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며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안 먹어도 될 욕을 먹었다. 눈치가 없는 걸까, 하고 기숙 씨는 매번 생각했다.

“내 찬가? 아버지 차지.”

“새꺄, 그게 브루주아인거야. 대를 이은 부의 축적”

“부의 축적은 무슨. 회사 차가 나오는데 사적인 데 안 쓰시려고 하나 더 갖고 계신 거지.”

“자랑하냐?”

“똥차 다 된 걸 자랑은. 안 그래도 니들이 하도 험하게 타서 아버진 잘 타지도 않으신다. 다른 차 사신단다”

“하, 저 새끼 말을 할수록. 내일 잊지나 마 새꺄.”

진짜 왜 그러는지 몰랐다. 일부러 그러는 거 같진 않은데 말을 하면 할수록 손해인 입을 달고 다닌다는 걸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푼수끼가 있는 걸까. 그녀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건 말건 그는 모든 일에 그런 식으로 열심이었다. 


그녀가 용이와 가까워진 것은 대동제 엠티 때였다. 그들은 대학 축제가 먹고 마시는 행사로 전락해 버린 것을 비판하면서 대동제 대신 문학세미나 엠티를 가겠다고 총학생회에 보고하고 지원금을 받았다. 

그때 토론 작품으로 선정된 책이 장 그르니에의 <Les iles>였다. 당시에는 불문과 학생들이 옮긴 번역본을 읽었지만 이후에 <섬>으로 번역된 선집이 나와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7,80년대 학생들이 탐닉했던 실존주의가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당시의 타협적 문학으로는 장 그르니에가 적당하기는 했다. 실존에 바탕을 두면서도 정치적이지 않달까. 어쨌든 학구적인 농활 서클의 엠티 과제는 번역본을 미리 읽고 독후감을 적어 오는 것이었다. 

적당히 나누다가 술이나 마시면서 민중 노래를 불러 제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시대와 맞서 싸워 온 전사들이며 학구파인 그들의 토론은 언제나 전투적이었고 맹렬했다. 

굴러온 돌 용이 문학 독서 모임쯤으로 오해했던 것은 그럴 만했다고 이해되는 바가 없진 않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어처구니없는 실수인 건 분명했다. 


대성리 민박집에 짐을 풀고 농구를 몇 게임 뛴 다음, 꽁치 고추장찌개에 돼지 두루치기로 저녁을 지어먹고, 운동장 만한 방에 모여 하필 용이 첫 발표자로 지명되었을 때 그는 이미 맹렬한 전투의 희생양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용이의 발표는 어쩌면 그렇게 허술하고 알맹이가 없는지 몰랐다. 혹시나 그럴까 봐 조마조마했던 기숙 씨는 되잖은 발표를 듣고 나자 곪은 종기가 터진 것 같은 안도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는 끝까지 읽지도 않은 것이 분명했다. 

주제도 없는 허황된 단어의 나열에다가, 족보 없는 실존주의를 들먹이면서 실존과 허무를 혼동하더니, 급기야 이유도 불분명하게 신랄하기까지 했다. 

그가 죽음을 바라보는 저자의 니힐리즘-그는 분명히 니힐리즘이라는 단어를 썼다-에 분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을 때는 학우들은 거의 패닉에 빠져 버린 듯했다. 


그들은 시동을 걸어 놓고 출발 선에 서서 위협적으로 액셀을 밟아대는 경주차처럼 물어뜯을 말들을 쏟아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대거나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그의 발표가 끝나기를 열광적으로 기다렸다. 

깃발이 올려지고 난 후 용의 몰락은 처참했다. 

학우들은 남루하다 못해 구멍까지 숭숭 나서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의 주장을 남긴없이 발라버렸다. 

사실 기숙 씨는 용이 그 방면에 박식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 장르도 불분명한 글이 담은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 장 그르니에말고 누가 알겠는가. 

문제는 그의 태도였다. 

얼핏 들어도 읽은 부분은 딱 고양이 물루와 백정의 이야기까지였음이 틀림없었다. 반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성실하게 다 읽고 왔대도 투쟁에 이골이 난 학우들이 쏘는 포화 속을 멀쩡하게 살아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읽은 척하다가 거덜이 나서 망신까지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용이를 성토하는 일로 시작해서 해방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편이 갈라져 맹렬하게 싸우던 세미나가 더 전쟁 같은 술자리로 이어지는 동안 용이와 기숙 씨는 새벽안개가 올라오는 호숫가에 앉아 있었다. 따라 나간 것도 그녀였고 위로하는 척 고백을 한 것도 그녀였다. 

"거지같은."

그가 그녀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타이밍이네."

기숙 씨는 그의 행동이 고백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됐다. 기쁨 때문인지 아픔 때문인지 찔끔 눈물이 나왔다. 그가 아무렇지않다는 듯이 말했다.

"지들이 내 섬을 어떻게 안다고."


그날부터 두 사람은 CC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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