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옥의 부친 되는 고사장은 가좌동 일대의 개근노에서 소금 농사를 짓는 어른이었다. 개근노는 행정상 개건너라는 정식 명칭이 있었으나 다들 개근노라고 하면 알아 들었다. 개건너는 개울을 건넌다는 의미로 가좌동의 갯골 건너를 말하는 것이었다.
염전은 인천에 집성촌을 이룬 고 씨 일가의 가업으로 고사장 형제들이 건지골과 가재울에까지 소금밭을 일구었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사업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개펄에 금을 긋고 물을 막아 엎치락 뒤치락하며 소금을 말리는 방식으로는 큰 생산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전 후에 많은 염전이 이북으로 편입되면서 소금이 모자라게 되자 정부가 전매를 하고 나섰다. 당연히 소금밭이 늘어났다. 소출이 늘어 전매가 어려워지고 소금 사업은 민영화가 됐다. 그때부터 고 씨 일가는 가히 만석꾼이라 할 만한 염전 부자가 되었다.
용옥의 양친은 태생이 부지런하고 근검한 사람들이었다.
고사장은 염전을 운영하는 일 말고는 별 다른 취미를 삼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철 따라 꿩 사냥을 나가는 일이 그나마 낙이라면 낙인 어른이었다.
태안이 본가인 지 씨 부인은 간간한 것을 좋아해서 새우젓에 깨를 뿌려 밥반찬으로 내놨고 갯벌에 물이 나가면 바지락을 캐서 직접 젓을 담기도 했다. 봄이 지나 황새기에 소금을 뿌려 두었다가 살을 발라 먹기도 하고 젓으로도 썼다.
명절에는 새우살을 다져 식빵 사이에 끼워 멘보샤를 만들어 먹는 것이 호사에 속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만큼은 근검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하게 대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고 딸이고 행실을 구속하지도 않았다. 특히 위로 삼 남매는 매사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했다.
고사장에게 있어 삼 남매는 그냥 자식이 아니었다. 전쟁을 함께 치러 낸 전우였으며 생명을 빚진 은인이었다. 고사장에게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서로에게 생명을 빚져서 살아남는 것, 그게 전쟁이었다. 비록 어린 자식이라도 그랬다.
어린 용옥과 양친은 소렴섬 꼭대기에 숨어서 북한군이 강화 당숙집에 불을 놓아 활활 태우는 것을 함께 보았고, 서해를 건너 피란하던 중 앞서 가던 배가 풍도 근방에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수장되는 것을 같이 목격하였다. 원래 그 집에 있어야 했거나 그 배에 있어야 했던 목숨들이었다.
고씨 일가를 도망시키느라 때를 놓진 당숙 식구가 그 집에 있었고, 뱃길을 안다던 용옥의 외삼촌이 앞 선 배를 타고 길을 잡았었다.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들어와 총칼로 죽인 남자들은 아무개의 아비 거나 아재 거나 하는 동리 사람이었다. 어떨 때는 아무개의 아비나 아재가 총칼을 들고 들어오기도 했다. 신식학교를 다니던 싸리재 아재의 아들이 친우의 가족을 죽이는 것도 봤다.
사람들은 인공기와 태극기를 다 그릴 줄 알았다. 급하면 호청이라도 뜯어 기를 그려 달아서라도 살아내야 하는 세월이었다.
피란길에는 아이들조차도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때쯤에는 용옥과 남매도 죽음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때 용옥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그렇게 살아낸 어린것들이었다. 전쟁을 치러내고 숱한 위험을 겪으면서 몰라도 될 나이에 죽음을 알아버린 아이들이었다. 그런 용옥과 남매를 부친인 고사장은 동역자로 대하면서 키웠다. 특히 둘째 딸인 용옥은 더 미더우면서도 애틋하게 대했다.
아비들이 어린 딸에게라도 의지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풍전등화의 천구백오십 년이었다.
그 해에 고 씨 일가는 전란을 피해 터전을 버리고 지 씨 부인의 본가를 찾아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