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옥의 언니인 용주가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남동생 되는 영훈이 4학년이 되던 해 전쟁이 났다.
모친은 막 임신이 되었던 때란다.
몸이 약한 모친과 세 아이를 데리고 남하하지 못한 부친은 가솔을 이끌고 만석동의 괭이부리말로 피란하였다.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굴막을 지어놓고 굴을 따는 배를 대던 만석포구는 똥바다로 불리게 되었다.
금세 전쟁이 끝날 줄 알았던 피란민들은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하꼬방에서 집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살았다.
그 해 9월 인천이 수복되자 일가는 경동 본가로 돌아왔으나 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양친은 뼈대도 안 남은 집터에 앉아 목놓아 울었다. 아이들도 보따리를 이고 지고 서서 따라 울었다.
재기의 열의도 잠시,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다시 시작되면서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더 거세졌으며 무자비한 살상이 뒤따랐다.
고 사장은 가솔을 이끌고 다시 당숙이 있는 강화의 긴곶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인민군이 들어와 있어 남자들을 착출해 가자 늙은 당숙 부부는 젊은 조카 일가를 소렴이라는 섬에 숨게하고 인민군을 상대해 시간을 벌어 주었다.
이웃의 밀고로 미리 알고 온 인민군이 집안을 뒤져 고 사장을 찾다가 으름장으로 장작더미에 불을 놓은 것이 그만 집을 활활 태우고 말았다.
고 씨 일가는 소렴섬 꼭대기에서 당숙의 집이 타들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숨죽여 울었다. 몸이 약한 모친이 부친의 양다리를 죽을힘으로 붙들고 있었다. 이후로 늙은 당숙 부부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며칠을 숨어있다 물때를 기다려 섬을 빠져나갔다. 한겨울이었다. 소렴에서 개펄을 걸어 나와 목선을 타고 대부도로 가서 다시 육로로 화평동을 지나 화수부두에 이르는 돌고 도는 여정이었다.
지 씨 부인의 본가로 가기 위해 미리 연통을 해 둔 외삼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지 씨 부인의 본가는 태안의 천리포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화수동의 부두는 벌써 피란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난리 통에 천운으로 지 씨 남매가 해후하였다. 용옥의 외삼촌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상접한 피골의 누이를 붙들고 흐느꼈다. 용옥과 남매도 건장한 삼촌의 어디든 붙들고 안도감에 덩달아 울었다.
혼자 일가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을 고 사장의 안도감이야 아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육로를 놓치고 배편으로 남하하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고 씨 일가를 위해 세를 낸 배도 사람을 가려 받을 수 없게 됐다. 사람이 몰리니 외가에서 선주에게 준 웃돈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배를 나누어 탄 것이 외삼촌과는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세 낸 배에 자리가 없어 외삼촌이 작은 목선에 타고 길을 잡았고, 고씨 일가가 탄 배가 목선을 따랐다. 바람도 세지 않은 밤이었는데 어른들 말로는 풍도 주변에 원래 큰 여울이 여러 개 일어난다고 했다.
삼촌이 탄 배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물에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게 보였다. 지척이었다.
용옥이 탄 배가 기우뚱하며 급하게 방향을 틀었고 이번에는 부친이 울부짖는 모친의 양다리를 죽기 살기로 잡았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바람에 섞였다. 외삼촌의 비명 소리도 들은 것도 같았다.
그렇게 고씨 일가는 애절한 사람들의 목숨을 뒤로하고 남하하여 태안의 개목항에 당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