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긍정에너지 옥랑 Oct 25. 2022

북분리 정화조 사건

정화조 청소가 이렇게 힘들줄이야!

나는 조용한 삶을 원하는 사람이다. 특별히 수줍음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건 더욱 원하지 않고, 문제를 일으킨다든가 하는 건 더더욱 싫다. 그저 평범하고 조용하게 , ‘양양’에서 살고 싶었다. 별로 큰 바람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가족과 함께 평온하게 살고 싶었던 나의 바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날아가 버렸다. 바로 ‘정화조 사건’ 때문이다. 이 어이없는 일명 ‘북분리 전옥랑 정화조 사건’은 양양 공무원들에게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아.. 아무리 화가 났어도 민원은 넣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북분리는 굽이굽이 골짜기마다  군락의 집들이 있고 우리 집은 북분리 마을 7가구가 살고 있는 군락의 끝집이다. 큰길에서 이어지는 작은 길을 따라 올라오면 만날 수 있는 집. 덕분에  낮은 뒷산을 우리 것 인양 맘껏 뛰어다닐 수 있고, 봄이면 산나물을 뜯고 가을이면 밤을 주우러 다닐 수 있는, 시골정취를 듬뿍 느끼며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

길이 좀 좁으면 어떠하랴!

하늘의 뭉게구름과 낮은 산이 맞닿아 있는 듯한,

집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에 반했던,

소박하고 예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집.

우리는 그곳에 터를 잡았다.



20평  방하나, 커다란 거실 하나, 화장실 하나의 집은 애초에 엄마가 거주하실 계획이었다.

양양에 이사 후 친정엄마와도 따로 살 계획이었던 터라, 이 집을 계약하고 우리가 살 집을  더 알아볼 생각이었다. 여러 곳의 부동산, 이장님, 마을 어르신들께 두루 알아봤지만 나온 주택이 없었다. 매물로 나온 아파트들이  있긴 했지만 양양까지 와서 아파트에 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20평 집이 있던 터는 300평 대지라 집을 한 채 더 지을 수 있었다. 집을 짓게 되면 가지고 있던 돈에 더해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고민했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짓게 된 언덕 위 하얀 우리 집.

길이 좀 좁긴 했지만, 허가상 문제 될 게 없었고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 일이 있기 전에는….




도시나 시골이나 매년 정화조 청소를 해야 하는 건 매 한 가지, 집을 짓고 1년 정도 되었을까.. 정화조 청소를 해야 한다는 우편물이 와있었다. 귀촌 전에도 매년 해왔던 정화조 청소였기에 우편물에 나와있는 정화조업체에 전화를 했다. 처음 통화했던 업체 사장님, 두 번째 통화한 다른 업체 사장님.. 주소를 확인하시고 직접 와보시더니 정화조차가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신다. 양양에 있는 모든 정화조 업체에 전화를 했더니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정화조차가 큰 걸로 바뀌었는데 진입할 수가 없어요…’

길이 좁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도면을 떼어보면 ‘도로’로 나와있는 길이었다. 그 길 길목, 어느 구옥에 딸린 창고가 바깥쪽으로 지어졌는데 처마가 굉장히 낮았다. 정화조 차가 큰 걸로 바뀌기 전에는 문제가 없었던 그 길이 정화조차가 큰 걸로 바뀐 후 처마에 걸려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처마 낮은 집 이후로 우리 집 포함 4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들이 다 정화조 청소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업체 사장님께 듣기론 정화조 차가 큰 걸로 바뀐 후,  정화조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집이 꽤 많은데 그 집들이 우리 집처럼 다 정화조 청소를 못하고 있다고 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집 건축허가는 왜 내어줬지? 정화조 청소를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법이면 적어도 정화조 차량의 출입 여부를 확인했어야 하는 게 아닌지,

양양 시골, 구비구비 작은 길을 끼고 지어진 집들이 얼마나 많은데 집은 지어도 된다고 건축허가는 내주고 정화조 차량은 다 큰 차로 바꿔버리다니!

정화조 업체가 개인사업체라 정화조차를 큰 차로 바꾸는 것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 하면

적어도 군에서 작은 정화조 차량 한 대 정도는 구입해서  군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닌지..

우리 집 포함 4가구가 다 정화조 청소를 못하고 있던 터라  도로를 넓힐 수는 없는지, 정화조 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여러 방면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알아보았다.

도로 관련부서에서 왔다 갔지만 그분들이 내놓은 해결책을 듣고는 눈앞이 더 캄캄해졌다.

우리 집 주변에 밭이 있는데  그 밭을 사면  넓게 도로포장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엥? 우리 보고  밭을 사라고??)



군청 다른 부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밭을 사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요지는  ‘알아서 직접 해결해야 한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나 같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뭔가 해결방법을 같이 고민하고 찾아줘야 하는 게 그들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었다.

화도 나고, 더욱 정의감에 불타 올랐다.

‘이런 건 국민 신문고에 올려야 해!!’

주소를 적으라 한다. 정정당당히 주소를 쓰고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쭉~써내려 갔다. 국민 신문고에 민원이 접수되고, 다시 양양군청으로 이관되었다.

며칠이 지난 후, 민원에 대한 답장이 왔다.

‘겨울 휴작기 동안 쉬는 밭을 통해 정화조 차를 들여와서 정화조 작업을 해주겠다’고.

계절이 지나 겨울이 왔지만 깜깜무소식이었다. 더 이상 전화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개인적으로  정화조업체에 전화를 해보니 들려오는 답변은 전과 마찬가지로 ’ 밭을 통해도 들어오지 못한다’였다.




관점이 달랐다. 나는 이 일을 다수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봤지만 그들은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했다. 금전적인 도움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젊은 가족이 귀촌했으니 두 팔 벌리고 환영해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짜고짜 막무가내로 해결해달라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전혀 다른 낯선 환경 속에서 자리 잡고 살려고 고군분투하는 우리 같은 젊은 귀촌인들의 어려움,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너무 큰 바람이었을까?

해결 방법이 없을까.. 여기저기 이야기를 해보고 도움을 요청할 당시 믿고 의지하는 분이 군수님을 만나보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비서실을 통하면 군수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다음 날, 비서실에 전화를 해서 귀촌을 한 가족이라고 말씀드린 후 군수님과 면담을 요청했다.

“어디에 사세요~?”

“네.. 북분리에 살고, 귀촌 가족이에요.’

“혹시.. 정화조 때문에 그러세요~?”

‘앗! 정화조 이야기를 어떻게 아시지…?’

순간 당황했다.  정화조 이야기는 한 적도 없는데..

그렇다. ‘북분리 정화조’는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된 마냥, 이미 군청 내에는 내 이야기를 다 알고 있던 것이다.

‘아.. 괜히 국민신문고에 올렸나?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던 걸까?..’

나의 정의감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일을 크게 만든 건 아닌지 후회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 이리도 간사했던 것일까.. 면담 요청을 하면 다 만나준다고 했는데… 결국 난 군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제대로 이룬 바는 없는데, 소문만 쫙 난, 나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그 뒤로 군청을 가기만 해도 다들 날 보고 ‘북분리 정화조’라고 수군대는 것만 같아서 한동안 군청 가기를 기피했다. 난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속으로 외쳐가며!



어떤 곳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정화조 청소를 포기할 무렵, 우리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시던, 개인적으로 아는 분께서 다방면으로 알아보시고  도움을 주셔서 한 곳의 정화조 업체 사장님과 연결이 될 수 있었다.  그 사장님은 밭이 쉬고 있는 겨울 휴작기에  밭을 통해 정화조 차를 들여왔고 덕분에 4가구가 다 정화조 청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년 이곳의 정화조 청소를 해 주시기로 하셨다. 전화번호를 주신 분께도, 정화조 업체 사장님께도 얼마나 고마웠던지! 일 년여의 혼란 끝에 결국 일은 해결되었지만, 무척 아쉬움이 남았다. 이런 일을 관공서에서 해결해주려고 하는 노력과 행동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느 민간 사장님이 아닌, 마땅히 했어야 하는 곳에서 도와주었다면!

씁쓸함이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연고 없는 곳으로의 귀촌.  

작은 것 하나 알려주는 이 없이 직접  부딪히며 해결하는 과정이 힘들고 고될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귀촌이 후회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겨낼 만큼 ‘양양’이라는 지역이 우리 가족에게 주는 매력이 참으로 크다. 아직 우리 가족은 자리 잡는 과정 중에 있고 현재 진행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의 정서를 더 잘 알아가고, 적응을 해나가고 매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이곳의 정서를 진작에 알았더라면 ‘북분리 정화조 사건’에 대해서도 좀 더 다르게 일처리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한편 나로서는 가장 합리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싶다.

양양이 좋아 살러 오는 젊은 귀촌인들이 늘어가고 있는 지금,

 아니 양양뿐 아니라 ‘귀촌’ 자체에 대한 관심이 늘고 귀촌인이 늘어나는 지금,

그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관심 하나, 눈길 하나, 그리고 사소한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정책들. 그런 것들이 더 풍요로운 세대를 만들어가는 초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전 05화 폭설 고립? 남의 일이 아니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