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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에너지 옥랑 Oct 15. 2022

폭설 고립? 남의 일이 아니었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흥분된다. 천진난만한 아이들, 낭만을 꿈꾸는 젊은이들, 때론 흰머리 지긋한 어르신들도 이날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꾼다.

몇 해 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아이들과 영화 한 편을 보던 사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와우! 크리스마스이브에 눈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잖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될 줄이야..!!’

흥분된 마음으로 거실의 큰 전면 유리창을 열어 잠시 내리는 눈을 확인했다. 빗줄기로 느껴질 만큼 얇은  싸리눈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살짝 물방울로 맺혀 녹았다.

다행히 많이 쌓이지는 않을 것 같아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기대감과 적당한 눈이 쌓일거라는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아이들을 재우고 다시 바라본 창밖의 눈은 어느새 싸리눈에서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고

쌓이는 속도를 보니 심상치 않았다. 순간, 뒷마당에 설치되어 있던 그늘막 생각이 났다.

 손님들이 여유롭게 자연을 즐기며 놀 수 있도록 뒷마당에 널찍하게 설치해 놓은 그늘막은  얇은 방수천으로 된 것이었기에 쌓이는 눈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른 뒷마당으로 가보니 역시나 방수 지붕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앉고 있었다. 눈이 계속 오고 있었기에 완전히 주저앉을 듯하여  얼른 방수천을 걷어냈다.

얼마 전에도 양양의 강한 바람과 비로 인해  방수천이 찢어지기도 하고 뼈대가 무너진 적이 있었다.

며칠에 걸려 고쳤던 것이라 속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시 망가진 그늘막을 보니 속상하고 아쉬웠지만 급한 불을 껐다는 것으로 위안을 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어쩜 이렇게 눈이 많이 오지..’

걱정이 되었지만 ‘뭐 별일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이내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온통 하얗고 하얀 세상.

아이들이  꺅꺅 돌고래 소리를 내고 기쁨과 행복에 겨워 눈 속에 파묻혀 뒹굴고 있었다.

‘아.. 설경.. 너무 멋지다. 살면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니..’

 영화 러브레터의 명장면, 설원 속 오겡끼데스까가 떠오르는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다.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얀색으로 물들었고 하늘의 태양에 반사되어 온 세상이 눈부시게  빛이 났다. 소나무 가지 위로 켜켜이 쌓여있는 눈이 바람에 스칠 때마다 하염없이 떨어졌고  만화영화 ‘겨울왕국’의 한 장면을 실사판으로 보는 것 같았다.

‘ 아.. 아름답고 아름답구나..’

멋진 설경을  감상하던 찰나, 나는 곧 현실을 깨달았다.

‘아.. 갇혔다, 갇혔다, 갇혔다…….!!!’


그렇다. 우리는 고립된 것이다.

폭설 주의보가 내린 다음날이면 신문이나 뉴스에서 볼 수 있었던 고립 이야기가 먼 산골짜기에 있는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낮은 산이 쭉 둘러있는 우리 마을은 골짜기마다 몇 가구씩 살고 있다. 도로포장이 잘 되어있는 큰길에서 작은 시골길이 시작되는 길을 따라 7채의 집을 지나고 나면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집, 그 집이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이다. 우리 집을 오기위해 거쳐오는  작은 시골길은 매 계절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소박하고 정겨운 길이다.

시골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던 그 길이 폭설로 고립된 오늘, 더 이상 아름다운 길이 아니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했던가. 고 동안 정겹게만 느껴지던  길이 왜 이렇게 길게만 느껴지는지.

평소에는 장점 많았던 끝 집이었는데 이날은 끝 집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워낙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강원도이기에 제설작업은 외국에서 벤치 마킹을 하러 올 정도로 잘 되어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제설작업이 큰 도로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자기 집 앞 눈은 자기가 치우지만, 시골에서 자기 집 앞이라는 스케일은 서울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군다나 우리 집 앞의 7채에 사시는 어르신들 중 길 초입에 사시는  몇몇 어르신들을 빼고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라 그 길에 쌓인 눈도 우리가 치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늘에서 해는 쨍쨍 내리쬐고 있었지만, 허벅지까지 쌓인 눈들은 쉽사리 녹지 않았다. 철물점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삽의 면적보다 4~5배는 되는 듯한 플라스틱 쓰레받기가 왜 필요한지, 왜 집집마다 이것들은 몇 개씩 가지고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고립된 상황을 재미있어하며 즐기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24일에 들어오셨던 민박 손님도 함께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날, 일단 마당에 쌓인 눈들을  플라스틱 삽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길만 내는 일도 반나절이 걸렸다. 길을 내며 한쪽으로 쌓아둔 눈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아래 사는 할머님 집까지 길을 만드는데 하루가 걸렸다.

다음날, 아들도 함께 길을 내기 시작했다.  반복적인 작업이라 속도가 붙었고 조금 더 빨리 치울 수 있는  노하우도 터득했다. 길 내기를 이틀, 드디어 큰길까지 차로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었다. 큰길에서 만난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로웠다. 차로 1~2분만 나오면 만나는 큰길인데,  어떻게 이런 다른 세상 느낌이 드는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24일에 머무르셨던 손님은 26일이 되어서야 나갈 수 있었다. 그분은 후기에 이렇게 적어주셨다.

" 잊지 못할 추억이 생긴 것 같아 너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앞으로 크리스마스 때마다 양양에 살다가 생각날 것 같아요. 시간 될 때 종종 놀러 오겠습니다.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폭설과 함께 한 크리스마스이브의 손님.  2021년 12월 24일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눈과 함께 그 손님이 떠오른다. 설원 위에 잠시 멈춰있던 우리들의 세상, 그 순간, 그 시간을 공유한  손님을 나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할 것 같다.

다시는 보지 못할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후, 동네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그거 많이 온 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더 많이 온 적도 많아!!!!”

이럴 수가. 그 말씀에 올 겨울의 눈 소식이 두려워지지만 그래도 자신 있게 다짐해 본다.

‘그깟 고립! 이번엔 제대로 즐겨줄 테다!! 아이들의 추억 저장소 한켠을

끝없는 눈으로 채워주리라’ 하고 말이다.

(p.s 하지만 이제는 작은 제설차가 우리 집 앞까지 눈을 치워준다. 이제는 눈이 쌓여 고립된다해도 눈을 힘들게 치우지 않아도 되니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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