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의 다리 부상으로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신랑의 발등뼈 골절은 나의 그때를 종종 떠오르게 한다.
6~7년 전 가을 어느 때쯤 우리는 식당을 오픈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아닌, 그의 식당이다. 그렇게 바라던 '사표'를 내고 자기만의 일을 해보고 싶다던 남편. 그는 원래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요리학원을 다니고 오랜 세월 식당을 하셨던 장모님 옆에서도 배우며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그만의 가게를 오픈했다.
그 당시 우리 쌍둥이들은 돌을 막 지낸 아가들이었다. 가게 오픈을 준비하며 조금만 도와주고 발을 빼야지.. 했었던 나의 처음 계획과는 달리 점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력은 부족했고, 할 일은 많았다. 집과 가게는 한 동네에 있었지만 걸어서 오가기에는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신랑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하얀 스쿠터를 중고로 마련해서 타고 다녔고 나도 스쿠터 운전법을 배워서 집과 가게를 오갈 때 짬짬이 타고 다녔다.
개업한 지 하루 이틀 되었을까. 점심장사를 마친 후 3시~5시는 저녁 장사를 위해 준비도 하고 쉬기도 하는, 브레이크 타임이다. 그 시간에 잠시 집에 들렀다가 다시 가게로 가는 중이었다.
'으흠! 이제 어느 정도 운전에 자신 있지' 하며 하얀 스쿠터를 타고 가던 중, 바로 뒤에서 무언가 쨍그랑하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주변에 지가 나는 사람이나 자동차도 없었기에 내가 타고 있던 스쿠터에서 떨어졌겠거니 생각한 난 그대로 달리면서 무심코 뒤를 쳐다봤다. 고개를 뒤로 돌리며 바로 알았다. 중심을 잃었다는 것을. 스쿠터와 함께 그대로 넘어지면서 쭉 미끄러졌다. 간신히 일어나려고 하는데 다리며, 팔이며 너무 아파서 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나보다 몇 발자국 앞에 넘어져 있던 스쿠터를 향해 절뚝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몸이 천근만근이고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몸은 너무 아프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스쿠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지나가는 행인 두 분이 괜찮나며 스쿠터를 일으켜 세우고 도로 옆으로 옮겨주셨다.
큰 도로는 아니었지만 차들이 자주 다니는 동네 넓은 도로였다. 앞, 뒤로 차들이 오가고 있었으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상황이었는데 차들이 없었던 건 정말 다행이었다.
연락을 받은 신랑이 잠시 후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바지를 걷어보니 무릎 아래는 다 쓸려서 살갗이 벗겨지고 시커먼 피멍이다. 허벅지 쪽으로도 군데군데 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무엇보다 오른쪽 팔이 너무 아팠다. 잠시 쉬는 동안 다리는 움직임이 나아졌는데 팔은 들어 올리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내 맘대로 되지를 않았다.
정말 크게 타박상을 입은 거라고 생각했다. 개업기간이라 모두가 정신없이 바빴기에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나도 다시 다시 가게로 향했다. 오픈 초라 지인 손님들도 많았던 때여서 한쪽 팔은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하는 상태로 홀에 나가 손님을 맞고, 서빙을 하고 일을 마감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신없고 고단한 날이었다. 집에 가자마자 단잠에 빠져들기를 잠시.. 새벽 내내 팔이 아파 고통스러워 잠들 수가 없었고 괴로웠다. 날이 밝자마자 집에서 몇 정거장 떨어져 있는 대학병원 정형외과로 향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보니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어깨뼈가 부러져있었고 철심을 박아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응급조치로 어깨에 깁스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입원물품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엘리베이터 입원실 층수를 누르고 한 손엔 캐리어, 한 손은 팔에 깁스를 한 채 덩그러니 서 있는데 옆에서 할머니 두 분이 물어보신다.
"아이고, 팔이 부러졌나 봐. 그런데 혼자 왔어?"
"네.."
“아이고.. 쯧쯧…”
가게는 막 개업을 했고, 첫째는 5살, 쌍둥이들은 막 돌을 지난 때였다. 친정엄마까지 가게에 나와서 일을 거들어주시던 상황이라 가족 모두가 바쁘고 정신없던 때였다. 나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면서도 할머님의 질문에 괜한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렇게 수술실에도 혼자 들어가고 마취에서도 혼자 깨어났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신랑이 왔었다고 하는데, 이미 마취를 한 상태라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퇴원을 하고 어깨와 팔을 고정시켜주는 커다를 보조기구를 2~3달 정도 더 하고 다녀야 했다. 움직임이 자유스럽지는 못했지만 보조기구를 한 채로 가게로 나가 서빙을 하고 손님을 맞이했던 기억. 그리고 1년 후, 어깨에 심어져 있던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한번 더 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지만 옥랑이 참 열심히 살았구나… 지금이라도 토닥토닥 셀프칭찬을 해본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고, 다치고 서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련한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신랑의 발등뼈 골절이라는 사고가 생겼다. 아픈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힘들 텐데, 도덕경이 이르는 대로 ‘내버려 두라! 내버려 두라!! 내버려 두라!!!’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대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봄이 되어 겨우내 미뤄왔던 미뤄왔던 민박 정비, 우리 집 정비, 민박 뒷마당 꾸미기 등으로 계획된 일들이 있었고 조급증을 가지고 있던 나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취미생활을 하다가 다리를 다친 신랑의 모습에 지난날 어깨를 다친 내 모습이 떠오르며신랑이 얄밉기도 하고
내 마음이 뭔지 몰라 한동안 우울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시골에 와서 살게 된 목적이 뭐였지?'
다시 상기해 본다. 일상의 행복, 일상의 만족에 대한 내 마음을 잠시 잊었었다.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능력을 주시옵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옵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도덕경 어느 사람의 기도 중에서>
집 마당에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수선화가 고개를 내밀 준비를 하고 산수유의 노란 꽃이 마을을 설레게 한다. 부상도, 아픔도 모든 것이 순리 안에 있음이다. 내가 서두른다고 서둘러지지도 않고, 조급해한다고 신랑의 부상이 빨리 낫는 것도 아님이다. 그저 시간과 함께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순리에 따르는 삶. 오늘도 순리의 삶 안에서 받아들이고 누리는 지혜로움을 주시기를 조물주에게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