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어느 봄날, 따뜻한 날씨가 점점 찾아오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서늘한 계절이다, 특히나 실내 매장의 경우 난방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실내외 기온차가 크다. 그 오월의 찬바람을 뚫고 나타난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중년의 아저씨. 짧은 스포츠머리에 머리숱이 유난히 많고 눈에 띄는 점은 새치가 하나도 없는 게 엊그제 염색한 듯한 새까만 머리였다. 지금 문득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문을 열고 들어서던 아저씨의 모습에서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이 등장하던 슬로모션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 물론 아저씨의 외모는 이정재와는 많이 다르다) 뚱뚱과 통통이 다르고 통통중에도 살로통통과 근육통통, 통뼈통통의 느낌이 서로 다르듯, 아저씨는 근육질로 만들어진 통뼈통통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내가 척 보면 척하고 알아보는 영화 속 관상가 양반은 아니지만 아저씨의 미간사이에 굳어진 주름을 보았을 때 한 성격 하시는 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리의 상'을 한 수양대군을 처음 바라본 관상가 김내경처럼 순간 멈칫했던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짧은 순간 아저씨의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스캔하는 게 느껴졌다.
"이사장은 안 나왔나?"
"아.. 네 어제 계약서 쓰고 오늘부터 제가 사진관 인수했습니다."
"아니 여기서 몇년을 있었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ㅎㅎ 그러게요. 많이 지겨우셨나봐요. 책상 서랍에 드시던 약도 하나도 안 가져가셨더라고요."
일단 전사장님을 알고 있어보였기에 기존 손님이라고 생각했고, 옷차림이 편해 보이는 게 사진을 찍으러 오신것같진 않았
"어떤 게 필요하세요?"
보통 사진관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 들어온다. 신분증 재발급이나 여권발급에 필요한 사진을 찍거나, 놀러 갔다 온 사진을 인화해 가기 위해서, 그리고 급하게 영정사진이 필요하다거나... 하지만 이분은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사진을 좀 뽑으려고 하는데...." 끝을 흐리는 아저씨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핸드폰사진인가요?"
"아니.. 그게....." 뭔가 뜸을 들이는 아저씨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전임 사장에게서 나에 대한 인수인계를 받은 게 없냐고 묻는듯한 간절한 듯 짜증 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한 번 더 아저씨를 바라보며 맑은 눈을 깜빡여주었다.
"딸랑"
순간의 정적을 깨고 사진관 문이 열렸다. 일단 대답을 망설이고 계신 아저씨에게 조금의 시간적 여유를 드리기 위해 나는 일단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을 응대했다. 주민등록증 재발급을 받기 위해서 반명함 사진이 필요하신 여성분께 안쪽 거울로 안내해 드렸다. 미스테리 오씨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하면서 정수기옆 종이컵을 꺼내어 커피믹스를 뜯었다. 촬영 후 보정을 하고 인화해서 손님께 전해드리는 20여 분간 아저씨는 커피를 마시며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포스 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온순히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는 상반된 모습을 작업모니터 위의 거울을 통해서 슬쩍 바라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로 손님을 배웅해 드리고 돌아서서 작업컴퓨터에 앉아 파일을 정리하고 있자, 아저씨가 등뒤로 다가오며 말을 꺼냈다.
"이지아 사진을 좀 찾아줘"
동네 사진관이다 보니 증명사진을 찍은 손님들의 작업한 사진을 최종적으로 컴퓨터에 저장할 때 이름을 물어 저장한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엔 '아 아내분 혹은 따님 성함이 이지아 인가보구나. 증명사진을 추가로 출력하실 일이 있으신가 보구나' 정도로 이해했다.
"이지아 님이요? 가족분이신가요?"
"아니, 왜 드라마에 나오는 그 이지아 있잖아, 이지아"
"네? 이.... 지아요? 배우 이지아요?"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지아 팬이신가?', '이지아 사진을 왜 여기에서 검색해 달라고 하시는 거지?', '이런 요구에 응해드려야 하나?' 등등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내손은 어느새 녹색창에 '이지아'를 검색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예인이다 보니 검색된 이미지를 클릭하자 배우 이지아의 수많은 사진들이 검색되었다.
"저..... 그런데 이지아 사진은 왜 찾으세요?"
"이지아 사진을 좀 골라서 공책만 한 크기로 좀 뽑아가려고"
'본능적으로 느껴졌어. 넌(아저씨) 나의 사랑(단골)이 된다는 걸' 강승윤의 '본능적으로'라는 노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공책만 한 사이즈의 사진은 8X10인치의 사진이고 사진관에서 그 사진은 장당 5천 원이었다. 검색창에 무수히 많은 이지아의 사진들이 평소보다 더욱 이뻐 보였다.
"여기 앉으세요"
사진촬영 후 보정작업을 할 때 손님이 앉아서 함께 작업상황을 모니터링할 때 앉는 의자를 모니터 앞으로 당겨와 아저씨가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앉아서 천천히 마음에 드시는 이지아 사진을 고르시라는 의미로. 아저씨는 컴퓨터화면에 나타난 수많은 이지아 사진을 하나하나 꼼꼼히 바라보고 계셨다.
"위로 좀 올려봐 봐"
내 눈에는 다 예뻐 보이는 사진들인데 아저씨는 쉽사리 사진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네이버에서도 검색해 보고 구글에서도 검색해 보고 무수한 사진이 검색되었지만 아저씨의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아저씨의 취향을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 사진 어떠세요? 예쁘게 나왔는데" 나의 적극적인 권유에도 아저씨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사진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살펴보시던 아저씨가 조건을 제시했다.
"한복을 입고 있거나 청순해 보이는 얼굴.."
그랬다. 핵심키워드가 한복이었다.... 앞서 검색된 대부부의 사진이 일반복장이었고 이지아 배우의 한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당초예상보다 사진을 고르는 게 쉽지는 않았다. 아저씨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기준으로 이지아의 사진을 찾는지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기에 계속 찾아지는 사진을 아저씨에게 보여주었다.
"이건요?" 절레절레
"요건요?" 도리도리
그렇게 수십 장의 이지아 사진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상하게 되었다. 이사진과 저사진이 무슨 차이인지는 나는 도통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추려진 10장의 사진을 8r사이즈(8x10인치)로 출력해 한 장씩 넘겨보는 아저씨의 입가엔 묘한 분위기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