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란 무엇일까
사람이란 개체 사이엔 천왕성과 지구의 거리가 존재한다. 너무나도 먼 존재이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지구는 지구고 천왕성은 천왕성이다. 절대로 같은 부분이 존재할 수 없다. 같아 보이더라도 다르다. 같은 면도날을 가지고 면도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생각해 보자. 성별은 남자, 질레트 면도기를 가지고 있다. 턱수염의 모양도 같다. 그렇다면 둘은 같다고 볼 수 있을까? 시점에 따라 어딘가는 YES고 다른 곳은 NO일 것이다. 나는 NO의 한 측면에 앉아있다.
첫 번째 사람은 천왕성에 산다. 거울에 비친 턱 아래 곧게 자란 수염을 발견했다. 쓰다 남은 비누로 거품을 대충 만들어서 수염에 묻혀버린다. 그러곤 무심하게 -쓰윽 싸악- 밀어버릴 것이다. 신중함 없이 한 면도이기에 턱과 인중에는 미세한 상처로 쓰라리고 아플 것이다. 아마 그마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끝이다.
두 번째 사람은 지구에 있다. 거울에 수염을 발견한다. 수염이 난 곳도 역시 피부다. 수염이 잘 밀릴 수 있도록 따듯한 수건이나 물로 적당한 시간을 투자해 적셔준다. 이후 쉐이빙크림을 사용해 수염의 역방향으로 부드럽게 발라준다. 면도날을 사용할 때에도 너무 눌러서 사용하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면도를 한다. 면도가 다 끝난 후 자극된 피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찬물로 피부를 눌러준다. 마무리로 로션을 바르며 마사지하듯 만져줄 것이다.
이제 다시 물어보겠다. 같은 수염모양과 같은 면도기를 가진 두 남성이 면도를 위해 거울 앞에 서 있다. 두 사람은 같을까? 나의 개념은 이러하다. 같은 조건 같은 상황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모두가 다르다. 티끌하나도 같지 않다. 서로 다른 개체들을 동일시하여 하나로 치부하면 안 된다. 즉 성인이라고 모두가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성인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반면 전혀 그런 역할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 사람은 역전될 수 있다. 그만큼이나 '통상적으로', '일반적으로' 같은 동일시되는 말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듯 덮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라는 사회 안에서 생물학적으로 인증된 성인이다. 그리고 현재 성인이 아닌 사람도 결국 인증을 받는다. 사실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시간이 흘러 나이라는 것이 먹었을 뿐이다. 마치 과실이 무르익어 땅에 떨어진 사과에 '너는 이제 성인이라는 것이야.'라고 칭함 받은 것 같다. 딱 그 정도다. 처음 엄마와 같이 구청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수령했을 때 나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가볍게는 음주에 관한 합법적 인증서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런 생물학적 성인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국가의 제도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성인이라는 표현에 적합했을 수도 있다.(가령 예수나 부처의 역사적 사실을 보자면.) 반대로 나이가 들어간다고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면 왜 성인이라는 인증마크가 필요했을까. 아니 필요할까. 잘 모르겠다. 나는 성인이란 단순한 나이적 개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성인은 어떤 것일까. 어떤 존재이길래 이렇게 복잡한 것일까. 아마 이런 궁금증에 대한 나의 사정을 제대로 들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알고 싶다.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보자. 성인이라는 것은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다름을 의식적으로 가 아닌 가슴 깊이 어디에선가 알고 있는 것에 가까운 사람이지 않을까.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것이 올바른가.’를 적용하고 다시 피드백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객관화가 잘되어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객관화 역시 어폐가 있다. 결국 자기 객관화도 주관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하는 객관화는 결국 주관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판단할 수 없다.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해도 그것은 그런 것이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생각이 길어지면 생각은 옹골지고 강화된다. 그래서 자기 객관화는 치명적인 양날의 검이기에 마구 휘둘러서는 또 안된다는 것이다.-
살아보니 상황에 대한 무엇인가 성인의 느낌을 주는 사람들은 존재했었다. 나보다 어리지만 더 단단하게 일해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경탄하는 경우도 많이 경험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다른 경우에는 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좋게 말하면 그것은 순수성이 이었을 것이고 안 좋게 말하면 그냥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가까워지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회개한 다곤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볼 수는 없을까. 왜 그런 것을 얘기해 주는 사람들은 없을까. 그걸 미리 알고 적용할 수 있다면 진정한 성인의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런 사회가 어려운 것은 자신의 취약점을 계속해서 만나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객관화를 하다 보니 자신이 미약했던 것이다. 진실된 객관화가 실현성이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스스로의 취약점을 어디에도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안 상태 그리고 감추고 있는 상태의 차이는 정말 깊다.
하늘의 해를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해는 없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감춰가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죽음 -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되는 순간 - 에는 자신의 약점은 별 볼 일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는 생生안에 약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이 드리워지면 강렬했던 사람도 한없이 누락하고 비상하고 번뇌하며 참회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숭고한 화두가 던져지니 조금씩 스스로의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성인은 무엇인가가 어느 지점으로 도달하고 있는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는 스스로를 많이들 객관화했다고 얘기하고 자신은 어떻게 산다라는 것을 강조하곤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멍청이바보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예를 들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운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아주 멍청하게 본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다.
누군가에게 정답은 다른 누구에게는 절대 정답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강요하는 것이 멍청한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해 보니 다름을 인정하는 것. 혹은 알고 있는 것이 성인의 중점인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중요하게 생각된다. 온건함. -생각이나 행동 따위가 사리에 맞고 건실하다.- 진실됨.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되다.- 인정.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심정- 이 세 가지의 삼위일체가 필요할 듯하다. 거짓 없이 바르기에 생각과 행동이 건실하여 사람의 본디를 이해한다. 그것이 참 성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드러내보자 나의 햇빛을- 나는 굉장히 편협하다. 노력하고 있지만 속이 좁고 질투도 한다. 비열하지는 않지만 베베꼬였고 쉽게 토라진다. 감정에 흔들림이 심한 편이고 그것을 감추지는 못한다. 게다가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이어서 자신감 또한 없다고 봐도 될 듯하다. 자존감은 말해서 뭐 하나 싶다. 한마디로 굉장히 약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성인이라는 것에 근접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자꾸 성인타령을 하나. 아마도 그것을 바라보고 살고 있기에 할 말이 이렇게도 많은 것이지 않을까.
나는 죽을 때까지 성인이라는 것을 쫓고 싶다. 그런 심정으로 이런 글을 찢어 갈기는 것이다. 그곳에 닿기 위해 노력을 하고 싶다. 모든 것에 솔직하고 싶고 진실되게 모든 것을 대하고 싶고 사람에 대한 감정이나 심정을 이해하고 나 역시도 그것을 이해받고 싶다. 즉, 내가 원하는 '성인'이라는 것에 해당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모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내가 규정한 성인이라는 것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안 되는 것은 너무 슬프기에 가능하다고 하고 싶다. 세상일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런 것을 알고 쫓고 있다면 내가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면 질수록 오히려 점점 성인에 가까워지는 것 아닐까. 이론상으로 말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누적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의 입구에 서있다면 행복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개념으론 행복해야겠다. 그러기에 나는 그것을 맹렬하게 쫓고 싶다. 정말로 성인다워지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성인’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만큼의 성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말이다. 생물학적인 성인 인증은 국가로부터 받았지만 실제 '성인'으로서의 기능을 할 만큼의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이 부족하다. 정말로. 갓 태어난 아기처럼 짜증을 확 부릴 때, 역시나 나는 아직 많이 멀고도 멀었다고 느끼곤 한다. 어떤 것을 어떻게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야 할지 아기보다는 조금 더 알지 않을까라는 작은 마음가짐의 차이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키워보면 아기가 더 나을 때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기는 온전하게 솔직한 부분이 있다. 나라는 인간은 고등교육과정까지 거치면서 오히려 솔직하지 말아야 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곤 한다. 사회생활을 통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배운 것 같다. 사회라는 곳을 향해 달리고 달려 성인이 되고 국가에 일원이 되지만 오히려 더 어린아이로 퇴보한 것 같다.
그래서 삶의 방식을 다르게 가져가기로 했다. 차라리 나의 해를 보고 살기로 했다. 햇빛이 따가우면 그늘로 조금 돌아서 가고 눈이 너무 부시면 선글라스를 낄 것이다. 하지만 해는 계속해서 바라본다. 나의 약점을 이해하려 가리지 않고 누군가의 해를 질타하지 않은 채 말이다. 나에게 솔직하고 모든 것에 솔직해지고 싶다. 그리고 사람자체를 더 바라보고 싶다. 선글라스는 나의 햇빛이 눈이 아파서 쓴 것이지 남을 판별하기 위한 색안경이 아닌 것이다. 진실되고 싶다. 진실되다 보면 온건해질 수 있지 않을까. 온건하게 살다 보면 인정이 흐르지 않을까. 그럼 성인의 길에 올라서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걸어가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성인의 길에 올라가는 발걸음이길.
장황했지만 성인은 그렇다. 성인이라면 모든 것에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도 인정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태도와 행동의 번거로움이 없이 말이다. 자연스럽게.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진실, 온건, 인정의 자연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나는 정말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내가 규정한 성인이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