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재즈에 의한, 재즈를 위한
진부한 표현으로 시작한다.
음악이라는 것은 나에게 첫 번째 동반자와 같다.(배우자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 역시 '나 역시 음악은 나의 삶이야!' 하겠지만
나에게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각별하다.
음악 없이 살아가는 삶은 어느 부분이 조금은 말라비틀어져 죽은 식물과 같고
알록달록한 색상의 일상도 꽤나 무채색으로 보인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이다. 경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만큼 음악은 나에게 삶의 여러 부분을 증진시켜 준다.
그리고 감동시켜 주는 역할을 해준다.
때로는 위로를 해주고 포옹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음악은
나의 옆에 항상 있었고 동경했고 깊이 사랑했다.
그러기에 음악과 매 순간 발맞추며 살아왔다.
예를 들면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Lawrence은
나의 중학생시절, 혼돈 그 자체인 사춘기의 버팀목이었으며
나얼의 노래들은 무료하고 지루한 고등학교시절을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게 해 준 유려한 서핑보드였다.
하드락도 들었고(sum41, 린킨파크 등)
브릿팝도 들었고(라디오헤드, 그린데이, 오아시스 등)
뉴에이지도 들었고(류이치 사카모토, 히사이시 조 등)
한국 발라드도 많이 들었고(김동률, 거미 등)
심지어 클래식도 들었다.(이건 아빠가 클래식 마니아라서 반 강제적으로.)
굉장한 잡식성으로 음악을 소비해 왔다.
대학교에 들어서면서는 힙합까지 섭렵하였다.
결국 나는 항상 음악적 삶에 속해있었던 것이고
장르고 뭐고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음악이 삶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재즈타령일까.
이제야 재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사실
재즈라는 것은 '멋에 취한 사람들.'이나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기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다.
무언가 혼잡한, 정형화되지 않은, 기승전결이 없는 음악과도 같은 느낌도 있었다.
노래가사 따위는 뒤로 밀리고 그저 악기들의 뚱땅거리는 소리에만 집중한 듯한
서로를 배척하고 그냥 돋보이기 위한 여러 악기들의 싸움과도 같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과거의 취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나도 인지하지 못한 때에 그저 듣고 있었다.
참 이상하게도 정말 그냥 듣고 있었다.
리듬감 때문일까. 힙합도 리듬감으로 듣기는 한다.
각기 다른 종류의 악기들의 조화롭지 못한 조화. 이런 점은 또 락음악과 비슷하기도 하고.
서로를 시기하는 듯 연주하는 하모니. 이건 좀 독보적이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자신의 색채를 뽐내려고 노력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 들리는 악기의 소리들.
치열한 듯 맹렬한 듯 가여운 듯 애절한 멜로디들.
어느 순간부터 현재의 취향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에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음악은 평생 듣고 살았다고 치자.
그런데 갑자기 왜 재즈를 듣고 있지?
도대체 재즈가 뭘까.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길래 이 장르에 흠뻑 녹아들고
삶과 비슷한 흐름으로 나와 같이 있어주고 있는 것일까.
(아기와 놀 때에도 재즈 플리는 기본이다. 아기도 좋아한다. 나만의 생각일 수도.)
답은 쉽사리 나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재즈의 계절’이라는 김민주 작가님의(Jazz is every where이라는 유투버로도 활동 중인 분)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는 윤곽이 잡혔다.
지금 현재 내가 왜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를.
결국 지금의 내가 취하고 있는 삶의 태도가
재즈였던 것이었다.
그럼 삶의 태도가 재즈라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예전에 나처럼 멋에 취한 채 자기 만족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이기에
‘나는 재즈’라는 한 장르를 통해 멋 부리고 있는 것일까?
사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멋이 있긴 하다.
올드함에서 나오는 무드.
아날로그적인 목소리들과 악기에서 나오는 그 시대의 향기.
그 모든 것들을 부정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내가 살아오는 인생에 방식에 있어서 ‘멋’이라는 것 역시 빼놓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전에도 이후에 살 인생에 있어서. 물론 내가 ‘멋’ 있다고 항상 생각하는 자아도취형은 아니다.)
그럼에도 단순 ‘멋’이라는 것에만 내 삶의 태도 혹은 방식을 가두어 놓고 싶지 않았다.
굉장히 모순적인 태도이다.
그러기에 나의 모순적 태도에 대한 답을 계속 찾고 싶었다.
답을 계속 찾게 되지 못할지라도 찾으려 하는 행위만으로도
어디론가 닿을 것 같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답을 찾기 위한 노력만으로도
무언가가 ‘되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되어지는 것은 두부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콩을 불린다. 몇 날 며칠 동안.(대게는 2~3일)
콩은 굉장히 단단한 열매이므로 불리지 않으면 쉽게 갈리지 않는다.
그다음 콩을 믹서기를 통해(과거에는 맷돌) 정말 세밀하게 갈아버린다.
그러고 나서 갈려진 물을 면포를 통해 여러 번 수분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계속해서 수분을 짜낸다.
끝까지 짜내고 난 뒤 그 물을 적당히 뭉근하게 끓여가며 간수를 부어주는데
여기까지 모든 과정이 수월하지 않았다면 혹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면 두부는 떠오르지 않는다.
뭉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맞겠다.
연예인 차승원이 섬생활을 하는 TV프로그램에서 두부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것을 참고하면 될 듯하다.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이리저리 적었지만
두부를 만드는 것 같이
삶은 매우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모든 것들이 모이고 모여 '무언가가 된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쌓이고 뭉쳐지다 보면 두부가 되는데
그 두부가 삶의 태도이고 방침이 되는 것이다.
나만의 태도.(두부. 여담이지만 두부를 굉장히 좋아한다.)
내가 살아오며 매력을 느껴왔던 그리고 실제 직업으로 삼았고 동경했던 것들이 있다.
요리사. 간호사. 바리스타 외 다른 것들이 나에게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내 시야에서는
모두 하나의 틀 안에서 단순하게 갇혀버리는 직업들이 아니었다.
즉, 하나의 굴레 속에서만 살아가는 삶이 아닌 것들이다.
물론 간호사는 ‘의학’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는 직업이기에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정답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각 질병에 맞추어 개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적성에 맞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리사나 현재의 내가 직업으로 삼고 싶어 하는 커피일 역시
항상 같은 것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내가 얼마나 그 일을 즐길 수 있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간단하게는
요리라는 것은 각 재료마다 칼이 다르고 조리 순서가 역시 모두 다르며
커피 역시 추출에 있어서 물의 온도나 커피분쇄도 그리고 보이는 사람에 따라
정말 1부터 100까지 모두 다른 것으로 배열될 만큼 맛의 큰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마음먹기 나름이고 행동하기 나름인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간호사는 아픈 사람들만 가득한 지겨운 공간일 것이고
요리사는 항상 똑같은 결과물을 찍어내는 생산직일 수 있고
바리스타 역시 동일한 것에 반복만을 일삼는 직업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태도'에서 발생하는 차이로 그리고
경험의 데이터가 쌓이는 것은 모두 나의 자산이자 나를 이루어가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들이다.
여러 별들이 부분 부분 모여 별자리를 이루듯 하나의 별에 해당하는 것이다.
재즈의 태도는
조화와 부조화. 반복과 변수. 창조와 도태.
서로 각기 다른 대극점에 있는 것들의 사이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조절하고 또 조절할 수 있고 나는 그것을 취하면 된다.
그것에 취하는 방식은 내가 선택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내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받아들임에 있어 내 선택에는 후회라는 것은 남기지 않고
실수라는 것은 나만의 방식이기에 내가 품고 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장황하지만 그런 것이 재즈의 삶이지 않을까.
재즈라는 것에 대한 역사를 찾아보면 그것 또한 명확하지 않다.
Jazz인지 jass인지 jaser(프랑스어)인지 어느 곳이 유래다!라고 외치는 곳도 없고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외치는 학파 따위도 없다.
그냥 Jazz인 것이다.
아무도 그 안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수용한다. 그냥 살아간다.
적응한다. 즐긴다.
그런 것이 jazz일까.(사실 평생에 걸쳐도 답은 구하지 못할 것 같다.)
결국 모든 것이 확실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불확실함과 불안정한 삶 속에서의 취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Jazz is everywhere라는 말이 정말 멋있다.
또 ‘멋’이라는 게 등장했지만 Jazz는 그만큼 나에게 ‘멋’이라는 단어 안에만 국한되지 않은 채
삶의 중요한 영역으로 침범하고 자리 잡고 있다.
솔직히 멋이라는 것을 빼고 삶을 살아가는 재미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싶다.
남에게 보이는 멋이 아닌
그냥 내재된 멋.
잠에서 일찍 깨어나 책을 읽는 모습
해가 적당히 비추어지는 길 위에서 달리는 모습
아내와 아이와 함께 공원에서 꽁냥꽁냥 놀아나가는 모습
적당한 조리방법으로 적당한 재료를 이용해 요리를 하는 모습
전문적인 지식(적혈구는 어쩌고, 머랭은 어떻게 치는가, 커피를 추출하는데 물의 온도는 등)으로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모습
그런 것이 멋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나는 그런 멋을 존중하고 동경하고 쫓으며 추구한다.
잠에서 깨고 나서
잠이 들기 전에도
책을 읽는 순간에도
밥을 먹고 있어도
커피를 만드는 자리에도
내가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재즈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고
나의 삶의 방식은 Jazz였고 이후에도 JAZZ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