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것의 처음이 너라서
스무 살. 대학에서 만난 첫사랑 그 아이와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의 시간을 함께한 후.
스물셋이 되던 해 2월
인생의 첫 이별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은..
“헤어지자”는 말과 함께 눈물 펑펑 흘리며
뒤돌아서 떠나는 그런 이별이 아니라
헤어지자 말 한마디 없이
서로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의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아니. 이미 멀어졌음을 직감하며
서서히 처음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그것을 직감했을 때,
헤어지잔 말은 이미 의미를 잃었고
붙잡는 것도 떠나보내는 것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함을 안다.
그런 식의 이별은 울며불며하는 이별보다
당장은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슴깊이 박혀 아주 오랜 시간...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은
소리 없이. 아주 서서히
그렇게 찾아온다.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다 했다.
그는 100일을 만났을 때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한동안 공항에서 돌아서던 그의 뒷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을 펑펑 쏟곤 했다.
그리고 그는 1년 후 돌아왔다.
헤어질 무렵에는 지원했던 카투사에 떨어지고 군대에 가야 했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엄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또다시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더 이상은 서로를 붙잡을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했고 기다릴 용기도 사실 없었다.
그러나 먼 훗날 깨달은 것은
그 무렵 사랑의 유통기한 또한 이미 다 되었음이다.
2 남중 장남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삶에 좌절감을 느끼고 힘들어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와중에 원하는 것들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절망의 시간들에 방황했었고, 하루하루 친구들과 술로 보내곤 했다.
나는 그런 그를 품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한심스럽게 바라봤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나의 부족한 모습들이 점점 크게 와닿았던 건지 평소와 같은 모습에도 짜증을 내곤 했었다.
삶이 버거웠고, 서로가 버거웠다.
그렇게 헤어지자는 선전포고나 헤어짐의 절차 없이 옷깃에 물이 스미듯 이별을 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끝이 났다.
군 제대를 머지않아 앞둔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발인 전날, 늦은 밤 그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힘들어하고 있으니 잠깐만 나와줄 수 없겠느냐고.
장례식장 근처의 호프집에 갔을 때 그는 이미 많이 취한 상태였다.
그러한 경험이 처음이었고,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어야 할지도 미처 몰랐다. 친구는 나에게 그의 집에 갔다가 다음날 있을 발인식에 참석해 줄 수 없겠냐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침에 출근을 해야 했고, 다 늦은 새벽 출근을 미루거나 갑작스레 결근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 없다고 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었던 순간은 아마도 그때였던 것 같다.
그때만큼은 함께 해 주었어야 했다.
나의 마음이나 그의 마음. 과거와 현재, 미래. 모든 것을 떠나 그날만큼은 그저 함께 해 주었어야 했다.
군 제대 후 그는 가장이 되었고,
유학은 떠날 수 없었다.
그러고도 꽤 오랫동안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늦은 밤 전화가 오면 무엇이 그리 미안한지 몰라도 미안하다고 했다.
대학시절 귀를 뚫지 않았던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처음 귀를 뚫고 귀걸이를 했었는데, 꼭 한 번쯤 선물해 주고 싶었었다며 귀걸이를 생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아마도 후회였겠지. 사랑에 대한 미련이나 애정의 마음이라기보다.
더 잘해주지 못했음을, 더 많은 걸 해주지 못했음을 지나고 보니 후회하는 마음이었으리라.
언젠가 한 번은 스물여덟 살이 되었을 때 서로에게 애인이 없으면 그때 우리 결혼하자는 공수표도 날렸다.
참나.
그리고 그는 스물여덟이 되던 해 결혼을 했다.
나와 성만 다른, 같은 이름의 그녀와.
어린 시절의 나는.
어찌 보면 사랑을 쉽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순간 무언가에 끌리듯 서로에게 호감의 마음을 갖고,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며, 애달퍼하고 그리워하는. 그러한 마음이 살면서 몇 번은 있지 않을까라고 오만했었다.
그러나 첫사랑 그 후에는
항상 마음을 다 주지 못했고, 나를 언젠가는 떠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집착이 가득한, 사랑 아닌 연애만을 했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겐 마음이 가지 않았고, 내가 좋아한 사람에겐 용기 내어 다가가기보다 오직 상처받지 않으려는 악착같은 마음으로 발악하며 멀어졌다.
그러한 나날들이 쌓여갈수록 그가 그리워졌다.
틀렸다.
[그]가 아닌, 그 시절의 순수하고 무모했던 내 모습과 그때의 우리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후회를 했다.
그는 이미 깨닫고 후회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라도 있었으나,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기에 그 후회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붙잡고 뒤흔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와의 만남과 사랑과 이별과 방황으로 나의 20,30대는 온통 얼룩졌었다.
그와 헤어졌을 당시에는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하게 흘려보냈던 많은 슬픔, 아픔과 절망들이
뒤늦게야 터져 나와
울고 불고 통곡하며 무너졌던
더욱 지난한 오랜 이별의 시간들을 겪어내야만 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해 여름, 술에 취해 독립문공원 벤치에서 그의 고백을 들었던 그날.
술에 취해 잠든 척, 그의 고백을 못 들은 척 그냥 그렇게 모른 척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까.
그러나 나의 대답은 항상 같다.
살면서 그렇게 미친 듯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청춘의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있어 너무나 행복했던 삶의 순간이었다고.
미안했고, 고마웠고.
네가 있어 너무나 다행이었다고.
그 모든 것의 처음이 너라서
정말로 다행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