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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여금 Mar 04. 2024

청춘, 밥벌이의 추억

녹록지 않음의 미학


Photo by. 하여금  Travel 2010 @ Boston in U.S.A




학기 중 한번 휴학을 하고, 졸업한 2002년.

나의 첫 직장은

모텔 건축 설계와 인테리어를 하는 회사였다.



멀티플레이어 혹은 일당 백


마지막으로 들어간 신입 막내 사원이었기에 건축팀, 인테리어팀을 아우르는 모든 잡무를 포함한 도면, 그래픽, 3D등의 설계 업무가 내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분명 전공과 같은 인테리어 설계팀으로 지원했지만 회계팀 팀장님께서 나를 면접 보고 뽑았다는 이유로 회계팀 업무까지 분담하길 원하셨다.

중3 때 혹시 몰라 따 두었던 워드, 부기(지금은 이름조차 사라진..) 자격증이 화근이었다.


건축팀의 바쁜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한가해질 때면 인테리어팀의 급한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쉴 새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그렇게도 빈 틈이 나지 않았기에 회계팀 업무까지는 분담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팀장님은 아쉬운 듯 볼맨 소리로

"여금씨 내가 뽑았는데.." 하곤 했다.

"아.. 그러게요. 하하"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렇게 일했음에도, 그때그때 외근이나 현장에 나간 직원들의 빈자리가 내 업무 공간이었고 정해진 소속이 없었기에 각 팀의 회식자리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아.. 이게 사회생활 이란 건가'

라는 생각조차 못할 만큼 나의 영혼과 육체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시절 업무 전화는 모두 사무실로 왔었기에 전화를 받아 선배들에게 돌려주는 일이 많은 부분 차지 했다.


매일 아침마다 20~30개 넘는 컵을 홀로 닦았으며, 사장실 청소, 업무 중간중간 나오는 설거지는 말할 것도 없이 손님이 오실 때마다 커피 타서 나르기, 복사, 출력, 제본, 라벨링, 퀵 보내기, 물통정수기 생수통 꽂기, 사무용품이 떨어질 때면 신청 받거나 중간중간 확인해 채워 넣고 점심시간이면 선배들의 자리를 일일이 돌며 메뉴를 받아 주문했다.


선배들이 디자인 한 설계안들을 그래픽 화하는 3D투시도등의 작업이 내 중요한 업무였지만, 그러한 잡무를 하다 보면 일할 틈이 나지 않아 당연스레 매일 야근을 했다.

고급사양의 컴퓨터들은 당연히 선배들의 몫이었기에 워드 타이핑에나 쓸법한 오래된 PC로 그래픽 작업을 하자면 한숨만 쉬어졌어도 불평할 수 없었다.


가끔씩은 급하게 던져준 업무로 홀로 밤을 새워 철야를 하는 날도 있었다. 자존심과 책임감 강한 내가 어떻게든 해낼 것을 알았기에 던져준 업무였을까.

자고로 사회생활이란 할 줄 아는 게 많으면 인정받는 게 아니라 개고생 한다는 진리..



이제 와 생각해 보자면

사무실 모든 팀의 온갖 잡무를 시킬 요량으로, 언제든 지치면 나가겠지란 맘으로, 빈자리조차 마련하지 않은 채 전공 따윈 알 필요도 없이 전문대 출신의 경력 없는 어린 나를 뽑았을진대,

80만 원 남짓 월급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곳까지 있었으니, 게다가 한마디 투정조차 하지 않고 묵묵하게 해냈으니 이 얼마나 사랑스럽고도 나이스한 호구직원이었을까 싶다.




아무튼, 그렇게 언제나 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10분의 지각에는 눈치를 봐야 했다.

그리고 그런 잡무, 업무들과 더불어 텃세까지 견뎌 내야 했는데, 인테리어팀 박*복 주임은 본인의 신입시절 설움을 가장 만만한 나에게 풀고 싶었던 것인지 프린터에 종이라도 떨어질라 치면 [굳이] 나에게 달려와 닦달하곤 했다.


그 시절 결심했었다. 나는 절대 저런 선배가 되지 말아야지.. 그리곤 잘 지켜왔었다. 선배가 되어 프린터에 종이 좀 채우고 설거지를 한다고 해서 팔이라도 떨어지는 건 아니었더라.


20여 년이 흐른 지금 생각해도 그 모든 걸 어떻게 견디고 버텼는지 나 자신을 크게 칭찬해주고 싶다. 난 참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인내심 많고 강한 사람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바보 같고 멍청한.


라떼는 사실 까라면 까야하는 시절이긴 했지만, 요즘 MZ세대의 당당함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나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아닌 건 아니라고, 힘든 건 힘든 거라고.

기성세대들이 요즘 세대들에게 말하는 것 중 많은 부분이,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서 비롯된 "질투"임을 확신한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라고! 칼퇴하고픈 마음이야 다 같은 거 아니겠어?! 쳇'




2002년. 나는야 붉은 악마


그렇게 고단한 삶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마도 2002년 월드컵의 열기였던 걸까. 하하

그렇게 야근을 하다가도 빨간색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친구들과 광화문으로 한강으로, 대형 스크린이 있는 호프집으로 가서 응원하고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 같다.


늦었지만 2002년 붉은 전사 박지성, 안정환, 김남일, 황선홍.. 모든 선수님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나를 살려주신 생명의 은인들.


치열하게 일하고, 미친 듯 놀고, 그 틈에도 나름의 썸을 타는 연애도 하며 청춘의 시간을 원 없이 즐겼다.

우당탕탕 많이도 울고 많이도 웃었던.

그러나 두 번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날들.




다시 끝.


나중엔 거래처의 부도로 회사가 힘들어졌는데 사무실 직원들도 현장을 알아야 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공사 막바지 모든 직원을 준공청소에 내보내곤 했다.


강원도 태백까지 내려가 2박 3일 숙식하며 수십 개의 호텔동들을 청소했고, 화창한 주말 오후 늦게까지 먼지를 마셔가며 서울 장안동, 수유동등의 수십 개 되는 모텔 객실을 청소했다.


그럼에도 한 달, 두 달.. 직원들의 월급까지 밀리고 있었다. 양재동에서 학동역으로, 또 강남구청역으로 짧은 시간 이사도 참 많이 했던.


그나마 비슷한 또래의 직원들끼리 일 끝나고 기울이는 술 한잔의 시간 또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을 버티게 하는 동력이었던 것 같다.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녹록지 않았을 삶의 순간들.


경쟁상대조차 안될 나를 상대로 기싸움하는 선배도 있었지만, 좋은 선배님들이 물론 더 많이 계셨다.


저기 뒀다간 애 잡겠다며 어떻게라도 내 소속을 만들어 주시려 애쓰셨던 실장님, 다정하게 챙겨주셨던 과장님과 대리님들.

힘들었던 삶의 순간을 함께 해서였는지 그리고 나의 [첫] 직장이어서였는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얼굴과 이름이 한 분 한 분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로 몇 년 전 기억처럼.

막상 정말 몇 년 전 직장을 함께 다닌 이들은 기억이 가물가물 한대도 말이다.


언제나 [처음]은 지극히 어렵고도 깊숙이 세겨져 오래 남는다.


그렇게 몇 달 치의 월급이 밀리면서 직원들이 하나둘 떠나거나 잘려 나가야 했다. 모두 힘겹게 버티고 버틴 시간들을 뒤로한 채 결국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고, 몇 년간 모임을 지속하며 만나기도 했다.


꼬꼬마 막내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선배님들과 지금 만난다면 "여금이 마-이 컸네!" 하시겠지.

그 시절의 그분들 보다도 훌쩍 커버린 마흔네 살의 막내입니다만.




긴 여정.


녹로지 않았던 나의 첫 직장생활을 자양분 삼아, 그 후 다녔던 직장들은 그래도 [비교적] 수월하게 보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올라간 것이 한몫했겠지만.


물론 밥벌이에 있어 쉬웠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쉴세 없이 바쁜 것은 차라리 견딜만했으나, 일이 없어 눈칫밥을 먹는 것은 백배는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정글보다 더 한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롯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시기와 질투로 얼룩진 인간관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작은 회사는 작은 회사대로 해야 할 역할이 많았기에 배울 것이 많았고 크면 큰 회사대로 또래 직원들과의 유대감이나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15년 가까이 치열하게 사회생활에 부딪히고 넘어지고 깎여 댔지만 결국 남은 것은 [경력단절녀] 임이 퍽 허무하고 원통스럽긴 했다. 힘들고 깨질 때도 많았지만 성과물을 내고 내가 디자인한 설계안들이 눈앞의 현실로 펼쳐지고 인정받을 때면 쑥쑥 자라나는 자존감에 행복하기도 했었건만, 이제는 추억의 한 조각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잘 이겨내며 견뎌온 지난날의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본다.

수고했어. 고생했어.

"돌이켜보니 그래도 너 참 잘 살아냈네."





그리고 지금도 묵묵히 밥벌이를 하며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 남편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직장인, 자영업자 분들께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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