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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여금 Mar 11. 2024

I studied English hard.

제1 인생의 전환점


Photo by. 하여금 Travel 2010 @ Philadelphia in U.S.A



이전 편 [청춘, 밥벌이의 추억]에서 이야기 한 첫 직장에서 나온 후 소개로 들어간 두 번째 직장은 처음 그곳과는 딱! 정반대 되는 곳이었다.


직원 5명 정도의 소규모 사무실이었고, 칼퇴가 일 년에 몇 없는 특별한 이벤트였던 첫 직장과는 달리 정시퇴근이 디폴트값인 꿈의 직장! 코카콜라 광고의 백곰을 닮은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이 계셨고, 하나뿐인 여자사람 직원이었던 나를 다들 친절히 대해 주셨다. 고정 자리도 물론 있었다.


다만 그래픽 작업이 주를 이뤘던 예전과는 달리 캐드 프로그램을 이용한 배치도와 설계작업을 해야 했기에 버벅거리던 나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주셨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답답했을지..

그마저도 작업량이 많았던 건 아니었기에 곧 적응했고 아주 편안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첫 직장과는 너무 달랐던 편안함에 무료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또한 그만큼의 큰 불안도 스멀스멀 들이닥쳤다. 직장생활 3년 차면 일을 가장 많이 배워야 할 때였고, 이렇게 편한 것만 하다가 경력만 쌓인 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어떡하나 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들.


그러나 다시 이직을 하기엔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이전 직장에서 몇 달 치 밀린 월급도 아직 받지 못했고, 그렇게 밀린 월급으로 인해 카드 현금서비스 등 빚까지 진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딱 맞는 직장이 바로 구해진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월급이 제대로 나올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시절 그 바닥은 월급이 밀리고 안 나오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기에.



일단은 회사를 다니며 급한 불을 끄기로 했고, 정시에 퇴근 후 남는 시간엔 자기 계발을 해보기로 맘먹었다. 그때 내가 왜 하필 많고 많은 분야 중 [영어]를 선택했는지는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형편이 넉넉했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기에 '외국에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조차 감히 하지 못했고, 외국인과 말을 해봐야지 라는 조건이나 환경도 아니었다.


일명 [보습학원]이라고 불리는 곳도 다녀 본 적이 없었기에 영어와 수학은 나에겐 너무 멀고 먼 존재였고, 국어나 다른 암기과목으로 끌어올린 점수들은 그 두 과목이 훌쩍 깎아먹기 일쑤였다.


어떻게 I am a boy. 가 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be동사는 무엇이고 boy면 boy 지 왜 a 따위를 갖다 붙여 사람 헷갈리게 하는지.


아마도 큰돈은 들일수 없었던 그때, 다른 [자격증]을 따야 하는 수업들에 비해서는 저렴한 편이었고, 퇴근 후 한두 시간 정도 시간을 내서 공부하기에 적당하다.라는 이유였지 싶다.



사무실이 강남 신사역 근처였고 집과 회사 중간 위치인 종각 [시사영어학원]이 적당히 좋아 보였고 일단 위에 쓴 대로 기초 지식이 너무도 없었기에 [기초 문법반]의 첫 수강권을 끊었다.


여기서 시사영어학원은 YBM시사어학원과는 다른 곳으로 지금은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오는 걸 보면 문 닫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나 보다. 그 당시에도 YBM이나 파고다어학원처럼 큰 규모의 프랜차이즈 어학원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정말 비기너인 나에게도 귀에 쏙쏙 들어오게 열정적으로 강의해 주시는 선생님들이 많았었다. 나중에 YBM에서도 수강한 적이 있었지만 그곳에 비해 조금은 형식적이란 느낌(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다.




기초문법반

BASIC ENGLISH GRAMMAR


2004년 10월. 그 시작이 앞으로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지 꿈에도 모른 채 공부를 시작했다.

그 책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 들추어 보니, 정말 열심히도 했다. 6시 퇴근 후 수업 전 남는 시간엔 꼬박꼬박 복습도 하고 절대 결석하지 않으려 애썼다.

문장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알게 되니 영어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과거분사, 3 형식, 5 형식.. 점점 깊이 들어가기 전까진!


아니 왜 학교에선 이렇게 재밌고 알기 쉽게 안 알려 주신거지?! 음.. 선생님이 안 알려주신 건지 내가 애써 듣지 않았던 건지는 미지수다.


문법 수업이라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라 생각할 테지만 Lynn선생님은 책에 나온 예문을 무조건 큰소리로 몇 번씩 읽게 만들어 단지 암기뿐 아니라 입에도 자연스럽게 붙어 회화도 겸할 수 있게끔 알려 주셨다.

그렇게 연말까지 3개월간 월, 수, 금 영어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았다.



기초회화반

SIDE by SIDE


2005년이 되면서 회화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어쨌든 영어를 배우는 목적은 토익이 아닌 이상 말을 하기 위함이었으니 회화는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외국에서 살다오신 한국인 Suzi선생님은 명랑 쾌활한 귀여운 분이셨다.

Suzi 선생님은 매주 수업시간 일기 쓰기를 숙제로 내주셨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하루에도 몇 타임이나 있는 그 많은 수강생들의 일기를 일일이 체크하고 수정한 후 돌려주는 게 꽤나 귀찮은 일이었을 법한데도, 열정적으로 그렇게 해 주셨다.


관심이나 주목받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며 항상 구석 끝자리에 숨죽이고 있던 나에게

"Amy! 일기 쓴 거 보니까 문장력 너무 좋던데?! 여러분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Amy한테 물어봐요!"

라며 갑작스레 나의 존재를 널리 부각시켜 주셨다. 하하.


그렇다. 학원을 다니며 지었던 나의 영어 이름은 에이미다. 그냥 모르는 건 검색해서 이어 붙이며 일기를 썼던 것뿐인데 나의 문장력을 칭찬해 주셨다.

당혹스럽긴 했어도 기분은 좋았다. 어쨌든 칭찬이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국어와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 다른 언어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작용을 하긴 했었나 보다.


집에서 비난만을 듣고 자랐던 나에겐 밖에서 듣는 작은 칭찬조차 얼마나 귀한 것인지. 국민학교 무렵부터 선생님들께 들었던 칭찬들을 아직도 하나하나 기억하는 걸 보면 말이다. 집에서는 내가 상장을 받아와도,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칭찬하거나 기뻐하는 일은 없었다. 나쁜 성적에도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회화수업은 그룹을 만들어 퀴즈를 푼다거나 짝과 서로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역시 재미있는 수업시간이었다.



그리고 토요회화반

Sean kim


월. 수. 금은 기초회화반 수업을 들었고, 주말에 좀 더 들을 수업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여기서 내 인생의 전환점이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원어민강사의 수업까지는 아직 들을 용기가 없었기에 한국말이 가능한 재미교포 2세 선생님의 수업을 선택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0대 중후반의 남자, 이름은 Sean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른 강사들에 비해 가장 선생님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은 날라리스러웠다. Sean의 수업 시간에는 무언가를 제대로 배웠다기보다 학창 시절 토요일 특별반(?)처럼 이런저런 특별한 경험들을 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마찬가지로 사라졌지만 용산에 있던 미군기지를 견학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안은 마치 없는 것이 없는 작은 마을과도 같았는데, 극장에 가서 한글 자막 없는 영화를 보았고 식당에 가서 햄버거와 음료를 시켜 함께 먹었다. 같은 반 또래의 언니 한 명, 동생 한 명과 친해져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며 색다른 경험에 참 신났던 것 같다.


또 다른 한주는 남산 힐튼호텔에 있는 클럽에 갔다.(힐튼호텔도 사라진 다지.. 아이고 나의 추억들) 클럽과 영어수업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20대 한창나이, 마냥 즐겁고 신이 났다. 힐튼에는 고급스러운 나이트 같은 곳(?)이 있었고 캐주얼한 클럽이 있었는데 그곳은 병맥주 하나를 시켜놓고도 몇 시간이고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학원 교실에서 수업을 했을 때도 있었다. Sean이 뜬금없이 나를 “우리 Amy~“라고 부르는 바람에 학생들의 야유와 함께, 시선을 한 몸에 받고야 말았다.

풉, 내 사주에 있다는 홍염이나 도화의 기운 탓이었을까. 지극히 내성적인 내 성격과는 별개로 숨죽이며 숨어 다녀도 꼭 남들의 시선을 받을만한 일들이 하나둘 생겼던 것 같다.


그 후 수업이 없던 어느 날 휴대폰으로 Sean선생님에게 전화가 와 짧지 않은 시간 통화를 한 적이 있었고, 다음 수업시간 전에 한 타임이 빈다며 학원 근처 커피숍에서 함께 차를 한잔하고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의도까진 모르겠지만, 일단 밥도 술도 아닌 커피 한잔이었고 따로 약속 잡는 것도 아닌 수업시간 전 잠깐 이었으니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음, 쓰면서 생각하니 참 고단수의 날라리가 아니었을까 라는. anyway.



그 카페에서 나눈 잠깐의 대화에

나는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었다.


“amy는 형제가 어떻게 돼?”

“오빠 한 명 있어요. 5살 차이. 안 낳으려다 낳았대요 “

“에이, 무슨 그런 말을!

그 말에 amy가 알게 모르게 상처받았었나 보네 “


예전부터 사람들이 오빠의 나이를 물으면, 꼭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그냥 엄마나 할머니께 들었던 말을 은연중에 똑같이 전달했을 뿐이라 생각했고, 상처라 생각했던 적은 딱히 없었는데.

그랬다.


상처였다. 난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근데 사람들에겐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난 하나뿐인 막내아들이라 부모님께 정말 사랑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하면 그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아. 소중하고 귀하게 대해주지. amy마음은 알겠지만, 너의 소중함을 알아야 남들도 그렇게 대해주거든 “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그리고 그 이후론 누구에게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까지 보태어 오히려 “나도 귀하게 컸어!”라고 대꾸하곤 했다.


그리고 Sean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Amy 영어 왜 배우는 거야?

영어도 배우는데 외국도 한번 나가보고 해야지! 어디 가고 싶은 나라 없어? “

“에이. 이제 기초반이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간다면 가까운 일본?이나 호주 같은 곳은 한 번쯤 가보고 싶어요. “

“영어 배우는데!! 미국은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어?! 갈 수 있어. 도전해 봐~”

“미국요? 무서운데. 하하.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랬다. 그의 말에 갑자기 의문이 샘솟았다.

그렇지.. 외국? 까짓 거 한번 가볼까?!


그 무렵 이전직장에서 진 빚은 모두 갚았고, 한 달 월급의 80%를 적금에 넣었던 나는 앞으로 몇 달 후 이자를 포함한 천만 원짜리 적금을 탄다. 못 갈건 없겠는데?!




그렇게 나에게 큰 느낌표 두 개를 던져 준 그와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토요반 수업도 그다음 달엔 수강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차례 카페에서의 만남과 몇 차례 통화를 했던 그가 궁금해진 나는, 그 당시 유행했던 [싸이월드]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거기에서 나는 그의 결혼사진을 보게 됐고 그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통보를 내렸다.


그에겐 별다른 의도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 사진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에게 작은 호감과도 같은 마음이 생겨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한두 달간 스쳐 지나간 짧디 짧은 인연은 나의 미래에 작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어쨌든, 그로 인해 상처받거나 아팠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기에, 지나고 보니 나에겐 귀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까지 문득 들곤 했다.

돌이켜 보면 지나치게 쓸데없이 차갑고 매몰차게 끊어낸 게 아닐까 라는 미안함과, 그보다 더 큰 고마움을 함께 전하고 싶다.


Sean 선생님_

그리고 열정적이셨던 종각 시사영어학원

선생님들께.

Thank you very much.

In my life, You are important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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