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드는 릴스였고, 엄마들을 저녁메뉴 고르기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줄 나름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래서 트레이더스에 가는 길부터 영상도 이것저것 찍었다. 입구에 들어서는 모습, 카트를 밀며 매대를 둘러보는 장면, 이것도 나름의 콘텐츠니까. 마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북적였고, 나는 카메라 녹화버튼을 누르고 기대감에 들떠 카레 매대로 갔다.
하지만 막상 그 매대 앞에 서니 내가 찾던 하코야커리는 없었다. 그 자리엔 새로운 일본 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허망함이 밀려왔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었다. 하코야 커리는 내 콘텐츠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날 하루는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나는 MBTI J 성향의 사람이다. 계획이 틀어지면 온몸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면서 의욕을 상실한다. 괜히 트레이더스를 원망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트레이더스가 문제야.' 마트 직원을 붙잡고 왜 하코야가 사라진 거죠?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면 뭐 하나. 이미 내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문득 대학교 때 전공과목에서 배웠던 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 이론이 하필 떠올랐다. 배운 지 십여 년이나 지난 이론이 떠오를 줄이야. 사람은 누구나 생각과 행동이 다를 때 불편함을 느낀다. 그걸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나는 계획대로 살고 싶어. 그런데 계획이 틀어졌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면 뇌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행동을 바꾸거나 생각을 바꾼다. 대부분은 후자, 생각을 바꾼다. 바로 자기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광고학에서도 이런 사례를 많이 본다. 물건을 충동적으로 사고 나서 후회하는 소비자가 있다. 그런데 소비자는 곧 자기 합리화를 한다.
"이거 필요했어. 나에게 꼭 필요한 소비였어."
이렇게 자신을 설득하면서 불편한 마음을 덜어내는 거다. 나도 그랬다. 하코야 카레가 없어서 계획이 틀어졌지만, 어차피 콘텐츠는수정하면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자기 합리화는 나를 위해 필요한 마음의 기술이었다.
그리고 생각을 조금만 더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계획은 한 번에 완벽할 수 없어. 틀어지면 수정하면 된다.'
트레이더스를 돌아다니다가 아이들 간식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킷캣 초콜릿, 하리보 젤리 같은 것들. 어차피 사야 할 간식을 집어 들다 문득 우리 집 창고에 처박혀 있던 트리가 떠올랐다.
'간식으로 트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다음 날, 아이들이 하원하기 전에 나는 간식으로 만드는 트리 DIY 콘텐츠를 준비했다. 초콜릿과 젤리를 바늘과 실로 엮어 작은 고리를 만들고 트리에 걸어주었다. 작년에 쓰고 남았던 오너먼트와 전구까지 더하니 제법 그럴듯했다. 반짝이는 트리가 완성되니 나도 잠깐 설렜다. 과연 아이들이 좋아해 줄까?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과자 트리를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엄마, 이거 우리 먹어도 돼? 너무 예뻐!”
그렇게 말한 뒤 아이들은 신나게 과자들을 하나씩 뜯어먹기 시작했다. 트리는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그 모습마저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문득 첫째 아이가 블록놀이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계획대로 블록을 하나씩 쌓아 멋진 구조물을 만들고 있었는데, 어린 동생이 다가와 그걸 와르르 무너뜨렸던 날. 첫째는 너무 속상해하며 울음을 터트렸고, 동생에게 소리까지 질렀다. 그때 나는 단순히 “괜찮아, 다시 하면 돼”라고만 말했는데, 그날의 내 경험이 첫째에게 해줄 더 좋은 이야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아야, 계획이 틀어지면 엄마도 화가 나... 하지만 그럴 때 잠시 숨을 고르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처음부터 다시 쌓아도 되고, 다른 모양을 만들어도 괜찮아. 그렇게 다시 도전하다 보면 더 멋진 걸 만들 수 있을 거야.”
아이들이 이 말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삶은 항상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지만, 틀어졌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걸. 때로는 다른 길이 더 멋진 결과를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걸.
나 역시 그날 배웠다. 계획이 틀어질 때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을 다잡는 일이라는 걸. 자기 합리화는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 나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다.
계획이 틀어지면 어때. 나는 또 수정하고 자란다. 그리고 그렇게 오늘도 조금 더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