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 나는 프리랜서로 방송작가 일을 하며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잠시 일을 쉬기로 했을 때도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신혼여행으로 한 달 동안 유럽을 여행하며, 언제든 다시 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인생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첫 임신은 기쁨과 동시에 고통을 가져왔다. 입덧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물만 마셔도 토할 정도로 힘들었고, 탈수 증상으로 응급실 신세를 졌다. 복직은커녕 기본적인 일상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입덧이 조금 나아질 무렵,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마침 전에 함께 일했던 작가님에게 연락이 와서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임신 소식을 전하자 돌아온 대답은 "몸조리 잘하라"는 한 마디였다. 이후로는 아무도 나에게 일을 제안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불안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도 괜찮을까?’
불안은 점점 커졌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재테크 관련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신사임당 채널을 통해 스마트스토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케팅을 전공했던 경험을 살려 나만의 의류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몇 달 동안 브랜드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스마트스토어 운영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옷을 만들 줄도 모르고, 물건을 떼어 사진을 찍고, 택배를 포장하는 일은 장사나 사업에 경험이 전무한 임산부에게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또다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스마트스토어를 포기한 후, 내가 비교적 잘할 수 있는 다른 일을 고민하던 중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이 떠올랐다. 부동산은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과 집을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 나의 취향이 맞물렸다. 부동산 투자의 흐름을 알게 되면 나중에 재테크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뱃속의 아이와 함께 열심히 공부했고, 시험을 보러 갔다. 하지만 당시가 코로나 시기였다. 마스크를 쓰고 시험을 보는데 숨이 가빠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핑계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시험을 망쳤다. 출산 후 다시 도전했지만,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공인중개사의 길도 포기하게 되었다.
시도할 때마다 반복되는 좌절에,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스스로가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작은 즐거움을 찾기 위해 시작한 일이 블로그였다. 육아용품과 가전제품 리뷰를 올리며 차곡차곡 콘텐츠를 쌓았다. 네이버 애드포스트에 도전해 소소한 광고비를 벌었고, 리뷰 이벤트에 당첨되어 백화점 상품권도 받았다. 그 작은 성취가 그나마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현실은 또 한 번 내게 벽을 세웠다. 오래된 주택에서 시댁과 함께 살던 우리는 비가 많이 올 때마다 누수로 고생했다. 시부모님은 편안한 노후를 위해 이사를 결심하셨고, 우리는 결혼 1년 반 만에 분가를 준비했다. 한편으로 시부모님이 집을 팔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서울에 있는 아파트 한 채 정도는 해줄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고 안일한 생각이었다.
역시나 현실은 내 기대와 달랐다. 강남에 집이 있어도 양도세와 증여세를 내고 나면 생각보다 남는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강남에서 한참 떨어진 경기도의 한 낯선 지역에 전세금을 마련해 들어갔다.
그곳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동네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손님도 없었다. 하루 종일 아이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 속에서, 고립된 섬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은 매일 출퇴근으로 왕복 4시간이 걸렸다. 나는 육아로 지친 몸을 이끌고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기다림조차 나를 더 외롭고 힘들게 만들었다. 남편도 왕복 4시간의 출퇴근으로 지쳤겠지만, 나 역시 하루를 버텨내는 일이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지금 이대로 주저앉아 있다면, 내 삶은 더 이상 나아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내게 필요한 건 용기였다. 작은 실패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설 힘,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믿는 마음.
낯선 동네에서, 아이를 안고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기던 그날.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내가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다음 이야기는 그 시작의 기록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한 걸음이 어떻게 무너진 나를 다시 일으켰는지, 그리고 고립된 시간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