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조각을 잘라

숨바꼭질

by 은의 정원

꼭 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어디로 숨어야할지 생각했다.

담벼락에 붙어 서 있거나 몸을 작게 말아 쭈그리고 있으면 술래는 끝내 찾지 못하고


못 찾겠다 꾀꼬리

를 외쳤다.


나는 기세등등하게 깔깔 웃으며 술래 앞에 나타났다.


"바로 여기 있었는데 못 찾냐?"


어린 동생들은 숨바꼭질 할 때마다 나를 따라왔다.

인심 좋게 함께 숨어주면,

술래는 헛탕치며 이제 그만 나오라고 했다.


그 날도 나는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술래가 백기를 들기 기다렸다.


숨을 죽인 채 온 몸을 백지장처럼 납작하게 붙이고 있었다.

햇볕이 따뜻한 오후였다. 그렇게 볕을 맞고 서 있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술래는 어디쯤 있을까? 두리번거릴 때,

발 앞으로 선명한 에메랄드 빛의 긴 물체가 지나가고 있었다.

닿지 않을만큼 떨어져서 유유히 지나가는 투명한 에메랄드 빛의 긴 생명체는 나 따위는 돌맹이나 매한가지라는 듯 관심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나는 담벼락에 붙은 나방처럼 온몸이 얼어붙고 입이 달라붙은 채로

투명한 에메랄드빛 머리에 박힌 새빨간 다이아몬드 점이 두 발을 지나 멀리 멀리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머리에 빨간 점이 있는 에메랄드색 뱀'

'머리에 빨간 점이 있는 초록색 뱀'


우연하고도 어색한 만남 이후 그 아름답고 치명적인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아 검색을 해댔다.


초록색 뱀

에메랄드색 뱀

연두색 뱀

비취색 뱀


정확히 묘사하자면 연녹색의 옥빛으로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길이는 1미터 미만 굵기는 5센티미터 정도로 가늘었다.

머리를 치켜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정수리에 길쭉한 다이아몬드 모양의 빨간색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파충류를 좋아하지 않지만 다시 본다고 해도 정말 아름다운 뱀이었다.

하지만 그 선명한 색은 자신이 매우 치명적인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유로움도 그랬다.


본능적으로 조심조심 발을 끌어당기며 그 존재에게서 멀어질까.

얼른 반대쪽으로 달릴까.


온 몸의 신경 중 어느 하나도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이런 저런 궁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얼어붙은 채로 바라볼 뿐.


뱀의 움직임을 실재로 목격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저녁 먹으면서 시청하던 동물의 왕국에서는 뱀이 좌우로 구불구불한 선을 그리며 전진했지만, 화려하고 아름답고 치명적인 빨간 다이아몬드 뱀은 자력에 의해 이끌리듯 몸을 구부리지 않고 천천히 우아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곧 어디론가 사라졌다.


꿈이었을까?

아니다. 등으로 느껴지던 콘크리트 벽의 까칠함과 따뜻하고 따갑던 늦은 봄의 햇살은 실재였다.


곧 술래가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쳤고, 마법이 풀리듯 다리가 후둘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기적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심장이


두근


두근


왼쪽 귀를 울렸다.


수십년이 흐른 후 우연히 파충류 박사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뱀을 떠올렸다.


"그런 뱀을 어디서 봤어요? 다음에 또 보게되면 알려주세요"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그 아름답고 치명적인 존재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집으로 돌아오고 몇 년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냈어?

...

아이가 보고 싶은데. 우리 쿨하게 만나자. 다 지난 일이잖아"


쿨하게 라는 말은 나를 자극하고 자극했다.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하면 나는 쿨하지 않은 엄마가 된다.

다 지난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의 냉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결국 쿨한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다.

양육비도 보내지 않고 재혼한다며 이제 더는 아이도 볼 일 없다고 일년 전 쯤 연락을 끊었던 그가 장난감이 잔뜩 들어있는 쇼핑백을 내밀었다.


"차에 두고 와. 여기서 기다릴게"


'너한테 아이를 맡기고?'


망설이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럴 일 없어. 빨리 다녀 와"


초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지상 주차장.

걸음이 느린 아이를 잠시 맡겨두고 서둘러 트렁크에 쇼핑백을 던졌다.

심장 박동이 빠르게 느껴지고 온 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두렵지 않은 척'

'서두르지 않는 척 하자'


'내가 미련한건 아닐까?'

숨이 차오르게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니 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나쁜 놈. 널 믿은 게 아냐'


그가 다시 한가족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한 가족.


한 가족이 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를 지나 너에게 갔지.


그리고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그 길을 돌아왔다.


깊은 상처와 함께.


"재혼한다며.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말 한 적 없어"


"재혼할 사람 언니가 내 뒷조사해서 전화번호까지 알아냈다고 했으면서. 거짓말 좀 하지마"


상처난 마음이 치유되는데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다 지난 일이니 이제 쿨하게 지내자는 그 말에 나는 다시 혼란스러웠다.


짙은 밤 어둠은 나에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을거라고 했다.

그 말이 맞다.

아무리 기다려도 상처는 붉은 핏덩어리 그대로 어둡고 깊은 마음 속에 존재한다.


나는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꺼내놓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둠은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완벽하게 덮어두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상처 덩어리를 들어올려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보지 않으면 사라질거라고. 지워질거라고 믿었던 나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향해


어둠은


상처는 덮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나만이 이 핏덩어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

정말 힘들었어.

아프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는건데.

아프고 속 상하고 화도 났어.

무서웠어. 희망도 없었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할만큼 자책도 했어.

모든 것이 망가져도 아무렇지 않게 여길만큼 나는 메말라가고 있었어,

이제 괜찮다는 말로 덮어두지 말고 마음껏 울고 쏟아낼 거야.

아프다고 소리치고 원망도 할거야.

내 상처의 깊이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거니까.


어둠은

그렇게 쏟아내는 나를 품에 안았다.

절규하는 나의 울음소리와 몸부림을 가려 주었고, 나는 그 안에서 매일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울고 원망하며 쏟아냈다.


별이 반짝이는 밤이었다.

어둡고 짙은 하늘 가득 자리한 별.

그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는 순간,

어둠은 넓고 따뜻한 어깨를 벌려 나를 안아주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마워.

이제 짙은 어둠 속에서 별을 보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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