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학교 사정으로 한 달 동안 급식이 중단된 적이 있었다. 모든 학생이 도시락을 싸 와야 했고, 나도 엄마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안 그래도 바쁜 엄마는 아침마다 도시락까지 준비해야 하니 더 정신이 없어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이 시간이 싫지 않았다.
평소에는 아침마다 자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만 봤는데, 도시락을 싸기 위해 일찍 일어난 엄마와 부딪히는 순간이 생겼다. 피곤한 얼굴로 반찬을 준비하는 엄마를 보며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좋아졌다.
엄마의 도시락 반찬은 늘 비슷했다. 스팸, 비엔나소시지 그리고 사온 반찬들에 밥 위에는 계란후라이 하나..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엄마였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간혹 도시락을 못 싸가는 날이면, 동네 분식집에서 김밥을 사가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엌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엄마의 콧노래였다. 언제나 피곤한 얼굴로 움직이던 엄마가,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 엄마가 계란말이를 해봤어!!"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평소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며 항상 사온 반찬만 준비하던 엄마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계란말이.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도시락을 꼭 껴안고 학교에 갔다. 마치 작은 보물을 품은 것처럼.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펼쳤다. 보통 도시락을 나눠 먹는 분위기라, 나도 엄마가 정성껏 싸준 계란말이를 자랑스럽게 꺼냈다. 그러면서 사온 반찬이 아니라 엄마가 해준 반찬이라며 은근 자랑을 했다.
친구들은 "오오~ 맛있겠다~" 하며 한 조각씩 집어갔다. 나도 신이 나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런데 입안에 짠맛이 확 퍼졌다. 단순히 간이 센 게 아니라, 소금 덩어리가 씹힐 정도로 엄청 짰다. 순간 친구들의 표정을 살폈다. 누군가는 말없이 물을 들이켰고, 누군가는 억지로 삼키며 애써 웃고 있었다.
"오리야, 이거 너무 짠데?"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엄마가 처음으로 만들어준 계란말이가, 친구들 앞에서 창피한 순간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날 나는 반찬에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채 도시락을 덮었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여느 때처럼 피곤한 얼굴로 퇴근해 돌아왔다. 나는 방에 들어가려다 주방 쪽에서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 계란말이를 많이 남겼네? 별로였어?"
나는 대충 대답하려다, 점심시간 내내 맴돌던 짜증이 터져 나왔다.
"엄마, 계란말이 너무 짜서 못 먹었어."
엄마가 순간 멈칫했다. 나는 멈추지 않고 투덜거렸다.
"차라리 그냥 평소처럼 반찬 사서 해줘. 그게 더 나아. 애들이랑 같이먹는데 진짜 창피했어! 다른 엄마들은 일해도 요리만 잘하던데... 칫"
나의 계속되는 투덜거림에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남아 있는 계란말이를 한 조각 집어 먹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고... 그러네. 미안해. 잠이 덜 깨서 소금 양을 잘못 맞췄나 봐."
엄마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결국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날 이후, 엄마는 다시 익숙한 방식으로 돌아갔다. 항상 사 온 반찬으로 도시락을 만들어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엄마도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요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우리 엄마의 요리는 정말 맛있어졌고, 이제는 어떤 반찬을 해도 자신감이 넘쳤다.
오랜만에 집에 갔다. 독립한 후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들르지 못했지만, 엄마는 여전히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저녁 먹고 가. 네가 좋아하는 반찬 해줄게."
엄마는 이미 부엌에서 여러 가지 재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는다는 생각에 나도 괜히 들뜬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던 엄마가 계란 한 판을 들고 싱크대 앞에 섰다. 나는 엄마가 능숙하게 계란을 깨트리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엄마, 그때 기억나? 나 중학생 때 도시락 싸 가던 거."
엄마는 계란을 풀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말이야, 엄마가 처음 해준 계란말이 너무 짜서 나 제대로 못먹고 다 남기고 왔자나!"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소금 덩어리를 씹는 줄 알았다니까. 물도 몇 잔이나 마셨는지 몰라."
내겐 그냥 추억처럼 남아 있어서 가볍게 엄마에게 이야기한 건데, 엄마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계란을 젓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엄마의 진짜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그저 가볍게 추억을 꺼낸 거였는데, 엄마는 그 순간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계란말이가 정말 짜더라.내가 반찬을 잘 못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짜게 만들 줄은 몰랐어."
엄마는 피식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엔 묘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네가 ‘차라리 그냥 평소처럼 반찬 사서 해줘’라고 했을 때.. 그 말이 한동안 계속 마음에 남았어. 괜히 해본다고 했다가 너를 실망시킨 것 같아서. 안 그래도 그때 너무 바빠서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요리까지 엉망이니.. 스스로 엄마 자격이 없다고 느꼈지."
나는 엄마의 말을 듣고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저 투덜거리듯 한 말이었는데, 엄마에게는 그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던 거였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바빴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당황스럽고 속상했던 감정만 기억했다.
엄마는 조용히 계란말이를 뒤집으며 작게 웃었다.
"그래도 이제는 이렇게 요리를 잘하게 됐으니까 됐지, 뭐."
엄마는 능숙하게 계란말이를 뒤집으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쪽을 힐끔 보더니,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근데 너도 너무했어! 엄마가 혼자 너 이만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런데 그때 그렇게 투덜대고 짜증내고 말이야!"
나는 뜨끔했지만, 괜히 능청스럽게 웃으며 젓가락을 들어 갓 구운 계란말이를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물자 부드러운 계란 속에 은은한 파 향이 퍼졌다. 간도 딱 적당했다.
"엄마, 이젠 진짜 맛있어. 근데 솔직히, 그때 엄마 요리... 진짜 심각하긴 했어."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고, 엄마는 "아휴, 너 진짜!" 하며 혀를 차더니 이내 나를 따라 웃었다.
그렇게 가벼운 농담처럼 흘러갈 뻔한 대화였는데, 집에 돌아와 조용한 방에 앉아 있으니 엄마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엄마가 혼자서 너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내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라는 말을 자주 해서인지, 나는 항상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 혹은 ‘엄마의 고생을 얼른 보답해야지’ 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 무게가 점점 더 크게 느껴졌고, 때로는 부담스럽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왜 혼자지 라는 생각만 가득 차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엄마도 혼자서 버텨야 했던 사람 이었다.
그날 아침, 피곤한 눈을 비비며 처음으로 계란을 풀었을 엄마. 내가 도시락을 열어볼 순간을 기대하며 서툴지만 정성껏 돌돌 말아냈을 엄마. 그리고 짠맛이 가득한 그 계란말이를 남긴 도시락을 보고 속상했을 엄마.
나는 그저 짜서 못 먹겠다고 투덜댔지만, 엄마에게 그 계란말이는 처음으로 나를 위해 용기를 내어 만든 요리였다. 나를 위해 해보고 싶었던 것, 잘해주고 싶었던 것, 그리고 사랑을 담아 완성하고 싶었던 것.
그때는 몰랐다.
그저 한 끼의 도시락이었고, 짠 계란말이였고, 당황스러웠던 순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계란말이에는 엄마가 나를 위해 해주고 싶었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