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만난 사람들 -3]
이곳은 바다에 인접하지 않은 내륙이다. 내륙에서도 깊은 곳. 속세를 떠난 산과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법주사가 있다. 한때는 전국에서 찾아드는 관광객들로 불야성을 이뤘다. 수학여행과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던 시절의 명성은 많은 호텔과 여관들, 넓은 대로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식당들이 증명하고 있다. 호텔과 여관들은 많이 낡고 쇠락했다. 식당들도 예전만큼의 호시절을 누리지 못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곳이 많다. 이곳 식당의 대부분은 토속음식점이다. 산채비빔밥과 산채정식, 버섯전골과 파전에 동동주가 주메뉴다. 그래도 5월과 10월이면 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반짝 특수를 누린다.
옛 영화와 번성이 외양으로 남아 있는 이곳에 10년 전, 독특한 식당이 문을 열었다. 명산대찰 아래 도시나 바닷가에서 만날 수 있는 초밥집이 들어섰다. 등장부터 심상찮은 식당은 메뉴와 맛도 예사롭지 않았다.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식당은 성업 중이다.
식당 주인 권 셰프는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미술학도였다. 자란 곳을 떠나 학창 시절을 보낸 도시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많은 생각과 색다른 경험을 선물해 주었다. 사회가 안고 있는 현실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때의 순수하고 뜨거웠던 열정과 신념은 지금도 그대로다. 가끔씩 만나면 낯선 곳에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알고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사회생활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교육 관련회사에서 동영상 강의 자료를 판매하는 영업을 시작했다. 열심히 뛰어다녔다. 전국에서 3위에 오를 정도로 실적이 좋았다. 거기까지였다. 속출하는 계약 해지와 위약금이 발목을 잡았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그만뒀다.
두 번째로 시작한 일도 영업이었다. 발 교정기를 판매하는 일이었다. 역시 영업 체질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갔고 만나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팔았다. 영업의 정점을 향해 달려갈 즈음 문제가 생겼다. 가격을 속이고 리베이트를 주고받는 관행 속에 제값 받고 정직하게 일했던 그는 고객들로부터 오히려 사기꾼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것도 아니다 싶었다. 또 그만뒀다. 영업은 자신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됐다. 영업의 빛과 그림자를 톡톡히 체험한 시간들이었다.
새로운 일터는 형님이 운영하는 일식집이었다. 일하는 동안 요리는 물론 식당 운영에 관한 기본과 철학을 배웠다. 식당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의 사연과 예사롭지 않은 인연으로 찾아왔다. 맛있는 음식을 내놓으면 손님들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즐거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먹었다. 그곳에서 10년의 시간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는 깨달았다. "음식은 정직하다."
아내와의 만남은 숙명이었다. 결혼에 전혀 관심이 없던 그와 10여 년을 수녀원에서 생활하고 있던 그녀는 가톨릭 신자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피정'에서 만났다.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다. 종교와 관심사가 같았던 둘은 바로 마음이 통했다. 그는 자신이 일하던 식당에서 그녀 만을 위한 특별 요리를 해주며 청혼했다. 만난 지 6개월 만에 부부가 됐다.
결혼 후에도 형님 식당에서 계속 일했다. 때가 되면 제주도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싶었다. 운명은 그의 삶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지인으로부터 속리산 아래 가게 할 만한 곳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아내와 함께 바로 찾아갔다. 속리산이 강원도 어디쯤에 있는 산인 줄 알았는 데 가다 보니 아니었다. 성탄절 이브에 찾아간 속리산은 눈 속에 잠겨 있었다. 고요하고 청량한 속리산의 풍경과 분위기는 두 사람을 따뜻하고 푸근하게 감싸주었다. 주저 없이 산 아래로 들어왔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주는 부부의 사랑은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도 거뜬히 헤쳐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몸이 약한 아내를 위해서도 이곳은 안성맞춤이었다.
가진 게 없어 욕심 없이 시작했다. 간판도 그대로 사용했다.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단란한 가정을 꾸려 알콩달콩 사는 게 삶의 목표였다.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음식만 만들어 파는 것으로 초밥집은 문을 열었다. 그는 식당의 모든 일을 혼자 한다. '느림'을 모토로 하고 있다. 주문을 받으면 재료를 직접 손질하고 요리한다. 그래서 느리다. 한참을 기다려야 음식이 나오지만 누구도 푸념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권 셰프의 철학을 알고 오기 때문이다. 신선한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든 맛있는 음식과 착한 가격은 금세 소문이 났다. 친절함이 양념으로 버무려진다. 산 아래 초밥집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찾는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가게는 자리를 잡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생활하던 아내도 건강을 회복했다. 선물처럼 아들 '믿음'이가 태어났다. 식당 이름도 '믿음 초밥'으로 바꿨다. 일주일에 화, 수 이틀은 휴무다. 충실한 재료 준비와 재충전의 시간을 위해 마음을 비웠다.
맛집으로 알려지며 단골도 늘어났지만 뜻하지 않는 어려움이 찾아왔다. 소박하게 꾸려 가며 자리를 잡아가던 중 건물주로부터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런저런 요구를 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아무도 몰래 속울음을 삼켰다. 결국 대로변에서 골목 안으로 들어간 곳에 다시 가게를 얻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음고생을 했지만 고객들은 변함없이 그를 찾아왔다. 혼자 일했기에 코로나 팬데믹도 거뜬히 이겨냈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의 위력을 확인했다. 식당은 붐볐고 덩달아 큰 선물을 받았다. 기적처럼 바라던 늦둥이 딸 '사랑'이가 태어났다.
믿음 초밥의 모든 메뉴는 그만의 비법으로 숙성되고 만들어진다. 각각의 요리들은 미술학도인 그의 끼와 재능이 발휘돼 손님 앞에 놓인다. 완성된 맛의 정점은 비주얼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알밥'이다. 알밥은 비교할 수 없는 맛과 가성비를 자랑한다. 그곳에서 눈은 반짝이고 몸은 차오르며 마음은 행복해진다.
권 셰프의 철학은 '초심을 잃지 말고 늘 하던 대로 하자'이다. 그는 자신만의 작은 가게를 갖고 싶다. 느닷없이 내몰리지 않아도 되고 임대료 올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 늘 그 자리에 있어 언제든 찾아와도 되는 곳.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음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이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깃드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을 생각하며 힘을 낸다. 곧 그 꿈이 이루어 질듯 하다.
먼 훗날에도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권 셰프의 모습이 그려진다.